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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을 이중계里中契(마을 구성원들의 공동체 회의)를 했습니다. 연중에 마을에선 제일 큰 행사이지요. 더구나 올해는 3년마다 선출하는 이장 선거가 있는 해라 더욱 중요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마을 주민의 입장에서는 어제의 대통령 선거보다 더 중요한 날이라고 할까요.


새벽에 잠을 깨서는 잠결에도 긴장이 되었는지(제가 출마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을 회관 2층에서 총회를 하기로 했는데 어지러움증을 가진 새낭골 노인 분들이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오실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마을 막내이자 귀농 후배가 선거에서 지면 어찌될지 걱정도 되는 등등 ….

온갖 잡스런 잡념들 속에서 잠을 설쳤습니다.
이런 상념과 긴장은 순전히 이장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시골마을의 이장 선거는 참으로 무거운 것이고, 더구나 귀농한 사람에게는 외줄을 타는 심정이 됩니다. 마을 일을 남에 일처럼 전혀 신경을 안 쓴다면 모를까 마을일에 개입을 하고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선 부담이 됩니다. 특히 올해는 귀농인이자 마을의 막내를 이장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장 선출을 둘러싸고 벌써 오래 전부터 말들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이장을 넘겨 주어서는 안된다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시골마을의 이장은 제왕적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강한 권한의 이장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마을의 진로와 미래가 결정 됩니다. 요즘 우리 마을이 해양수산부의 위성송신탑 문제와 마을종합개발사업 등 굵직한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한가한 시골마을의 평온한 상황이라면 그냥 누가해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
우리 마을의 상황은 그야말로 난제가 첩첩으로 쌓여 있지요. 고민에 고민을 해봐도 이장은 교체되는 게 맞는 듯 했습니다. 나이 칠십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 다시 맡기에는 힘겨운 상황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마을 분위기는 하나로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칠십이 다된 분을 다시 세우자는 입장과 바꾸자는 입장이 엇갈리며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은밀히 양 진영이 작업을 했지요. 어디선가 꼬투리가 잡히면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미묘하게 흘러가는 판에서 귀농인의 선거개입은 단순한 이장선거가 아니라 잘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는 생존을 건 싸움입니다.
전 이장님이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칠십 다되는 노인이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인식시키고 젊은 사람을, 귀농인을 마을의 지도자로 받아달라고 했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은 길이었습니다.

드디어 회의가 개최되고 묘한 분위기 속에서 '차기이장 선거' 안건까지 왔습니다. 표 점검에서 불리함이 느껴졌는지 갑자기 전통적인 선거관례를 깨고 '투표 없이 그냥 이장을 유임시키자'는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긴장을 했지요. 나서서 정면으로 반박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전에 예상된 의견이었고 나름대로 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명분 없이 마을의 관례를 뒤집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큰 마찰 없이 쉽게 투표하기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투표!
대대로 내려온 관례대로 추천자 없이 그냥 백지 나눠주고 이장이 되었으면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게 하는 우리 마을만의 특이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결과는 과반을 넘는 지지로 우리 마을 막내가 이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4년차 귀농인이 온갖 텃세를 극복하고 마을의 중심인 이장이 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선자는 당선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이장을 할 수 없다고 고사를 했습니다. 저보다도 2년 늦게 귀농한 4년차라 마을일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사전에 설득하느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인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진땀이 났습니다. 당선자가 고사하는 틈을 비집고 선거를 무위로 돌리고자 하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고사하는 후배의 입장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일단 유보하고 점심 후 최종 심의를 위한 회의를 재개했습니다. 후배에 대한 설득과 무위로 돌리려는 시도들의 틈바구니에서 표 안 나게 정리하려니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선자의 승낙.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땅에 머리박고 농부로만 살고 싶다며 완강히 고사하는 후배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과 지역에서 젊은 농부가 자기 한 몸과 내 가족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맡아야할 짐의 무게가 무거웠습니다. 이런 문제는 특정한 우리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농촌마을의 축소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마을의 최고 막내이자 귀농한 사람을 이장으로 선택해 달라고 마을 분들을 설득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그 후배가 그간 보여준 삶의 순간순간이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농부로서의 삶이 단지 순간적인 제스춰나 면피식의 행태였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실성과 진심을 보여준 후배와 이를 받아준 분들 모두 고마웠습니다. 어떤 악조건이라도 진정성과 진심은 통한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우리 농촌의 변화를 암시하는 작은 사건을 보았습니다.田


김태수

글쓴이 김태수 씨는 강원도 춘천 새낭골에 거주하는 귀농 6년차 농부다. 춘천에서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을 친환경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얼마전 <연봉 5천이 부럽지 않은 귀농>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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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띄운 편지] 귀농인의 애환... 진심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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