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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부여군 청소년수련원에서 청소년을 위한 푸른 음악회와 가요, 댄스 경연 대회가 열렸다. 초대 가수로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와 ‘배틀’이 공연한다는 소식에 부여군의 청소년들은 진작부터 들떠 지냈다. 무료로 나누어 준 티켓이 암거래된다는 소문도 돌았고 티켓을 못 구한 청소년들이 수련관으로 문의 전화를 하는 통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처럼 청소년 푸른 음악회는 공연 문화의 혜택이 적은 부여 청소년들에게 인기 행사로 자리잡았다.

아이들이 어려서 부여에 살면서도 청소년들의 대중 문화에 관심이 없었지만, 나도 주최 측에 부탁해 티켓을 어렵게 구해 공연장을 찾았다. 출연 가수와 그들의 히트곡은 몰라도 방송으로만 보던 연예인을 보며 관객의 생생한 반응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청소년들 못지않게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2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아이돌인 미국의 팝 가수 레이프 가렛의 내한 공연을 TV로 보면서도 열광했던 열정이 아직도 남았는지 확인하고픈 마음도 자리했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속속 자리를 채우고 공연장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드디어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관객에게 프로그램이 적힌 종이 한 장 나눠주지 않은 채 행사를 진행했다. 관객에게 행사 진행 순서나 출연자들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이 관람하라는 것에 기분이 좀 그랬는데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에 어른들의 훈수도 지나쳤다. 행사를 주관한 부여와 논산 범죄피해자지원센터장들 소개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들까지 줄줄이 소개하고 한 마디씩 하느라 훌쩍 1시간을 보냈는데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음악회가 아니라 행정의 구태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모처럼 학교 공부를 떠나서 그들만의 문화를 맘껏 향유하게 한 그러한 날만큼은 어른들의 훈시는 생략돼야 옳았다. 머리 굵은 고등학생들은 그동안 몇 차례의 행사를 통해, 본 행사에 앞서 어른들의 지루한 요식 행위가 있음을 눈치 채고 본 행사가 시작될 즈음에야 입장해서 뒷자리를 채웠다.

드디어 개그맨 황기순의 사회로 가요, 댄스 경연 대회가 시작됐다. 개그맨 황기순을 요즘 청소년들이 알까 싶어서 옆자리에 앉은 여중생에게 물어보니 방송에서 보았다고 했다. 첫 순서로 퓨전 가야금 연주와 비보이들의 현란한 댄스 공연이 펼쳐지자 청소년들은 숨조차 막혀 버린 듯 공연에 빠져들었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듯한 비보이들의 현란한 춤 솜씨에 우리 세대들은 그저 ‘잘하는 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청소년들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부여에서 노래깨나 한다는 청소년들이 다 나와서 솜씨를 겨루는 무대였다. 우선 학교 대표로 뽑힌 중학생들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불렀다. 무대 매너라든지 의상들이 어설펐지만 랩도 많고 음량도 높은 노래들을 잘 소화해 냈다. 그래도 고등학생들은 신경을 써서 의상과 머리를 다듬고 무대에 올라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했다. 청소년들이 경연을 펼치는 사이사이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참여 공연이 이어져 치열한 경연 대회가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축제의 장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내년부터는 올해 경연을 통해 뽑힌 청소년 팀들을 단련시켜 좀 더 성숙한 무대 매너를 갖춘 공연으로 기획했으면 싶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요보다 훨씬 흡인력이 강한 댄스 경연이 이어졌다.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청소년들의 춤 솜씨는 프로 못지않았다. 최우수상을 받은 부여여고 팀의 공연은 무대 매너며 의상까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 더 놀라운 사실은 스스로 경연 대회를 위해 기획에서 안무까지 했다는 것이다. 공부 시간도 모자랄 인문고생들에게도 춤에 대한 열정과 끼를 발산할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웠다.

어느 덧 경연이 끝나고 하얀 의상을 입은 미소년 6명이 무대로 뛰어들더니 ‘배틀’이라고 소개를 했다. 조금 전 공연을 마친 팀과 비슷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자 어느새 객석의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사고를 우려해 곳곳에 배치된 의경들은 학생들은 제지하느라 작은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20여 년 전 레이프 가렛 내한 공연장에서 여학생들이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는 전설에 비하면 부여 청소년들은 벌써 ‘충청도 양반 기질’이 몸에 배어서인지 너무나 얌전한 편이었다. 인기 가수들의 공연을 기회로 청소년들이 소리지르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나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쌓였던 스트레스가 쫙 풀릴 텐데 지역 특성상 청소년들도 어르신들처럼 감정을 발산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러 보였다.

저녁 8시가 넘어서까지 청소년 수련원 강당은 청소년들로 꽉 찬 상태였다.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보겠다는 아이들이 배고픔도 잊은 채 자리를 지키며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드디어 서양 인형들 같은 네 명의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나와서 노래를 한 곡 부르자 여기저기서 청소년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배틀’ 때만 해도 여학생들과 달리 지긋이 팔짱을 끼고 있던 남학생들이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표현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부여 청소년들이 유명 가수의 초청 공연을 통해 감정을 발산하고 내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놓으려 할 즈음에 아쉽게도 공연이 끝나고 말았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열린 청소년들의 잔치는 끝나고 환호성이 가득했던 공연장의 열기도 식었다.

내가 청소년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사와 문화에 쉽게 적응되지 않았지만 행사 진행에서 미숙한 점들은 속속 눈에 들어왔다. 세련되지 못한 음향시설은 대회 참가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연습이 제대로 안 된 게스트들의 출연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관계 당국의 문화 불모지를 옥토로 만들겠다는 의지만큼은 엿보이는 행사였다. 월드 가수라는 ‘비’의 공연도 실패하는 마당에 지방자치단체가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을 동원해 청소년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년에도 이 행사를 개최한다면 전문가의 짜임새 있는 기획력도 엿보았으면 좋겠다.田


오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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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40대 아줌마, 청소년 푸른 음악회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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