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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상동역은 부산에서(출발한) 무궁화열차가 한 시간 만에 도착하는 역이다. 승객이래야 겨우 두세 사람, 아니면 네댓 사람이 오르내리는 간이역이다.
십여 년 전 초겨울 어느 날, 목적도 없이 완행열차를 탄 나는 이곳 간이역에 내렸다. 철길 너머로 휘돌아 강이 흐르는 산기슭 어디쯤에 내가 살아갈 작은 터가 있을까 싶어서 세찬 강바람을 맞으며 한나절을 다닌 적이 있다.

"내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 친구야 놀러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오렴"- 김대규의 시 <엽서> 중에서

이 마을 저 마을을 아무리 돌아다니며 물어봐도 삼등객차를 타고 친구가 놀러올, 내가 거처할 터를 찾을 수 없었다. 그후 십 년을 보내고 다시 찾아든 나는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산모롱이를 돌아 기차가 지나가는 것은 볼 수 없지만 흘러드는 강이 훤하게 바라보이는 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예전리다. 기차를 탈 적엔 우리 집에서 십여 분 거리인 이곳 상동역을 이용하니 어쨌거나 인연이 닿은 곳이다.

내가 기차를 탈 때는 사람이 보고 싶은 날이다. 역에 도착하면 대체로 보따리를 이고 든 할머니 몇 분들이지만 "잘 다녀 오이소." 역무원이 이웃인 듯 인사를 하는, 간이역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 거기에다 도로비만으로도 충분히 부산을 오갈 수 있는 경제적인 이득과 편안하게 기대고 앉아 차창 밖으로 낙동강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는 즐거움이 보태진다.

기차에서 내려 이곳 간이역에 도착하면 나는 매번 먼 세상을 한 바퀴 돌아온 듯하다.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그것이 그냥 그것인 세상 속에 내가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대합실을 들어서는 걸음이 가볍다.

부산에서 손자를 공부시키는 아랫마을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어느새 저만치 앞서 버스 정류소로 향하고, 봉지 봉지 먹을거리를 싼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곧잘 딸네 집에 가던 옆 마을 할머니의 빈손도 가벼이 걸어 나간다. 역전에 트럭을 세워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검게 그을린 얼굴의 농부에게 사뿐히 다가가 팔짱을 끼며 "아빠!" 라고 부르는 고운 처녀, 아버지와 딸의 행복한 웃음이 환하게 대합실을 밝히는, 해질 녘의 간이역엔 만남의 기쁨도 있다.
오늘아침 간이역엔 젊은 할머니가 들어섰다. 한 손엔 청도 감 말랭이 봉지가 든 쇼핑백을 들고, 한 손엔 큰 사진액자를 포장도 하지 않은 채 들었다. 시골 어귀에 둥그렇게 큰 정자나무가 터 잡고 있는 사진이다.

"이 정자나무 사촌(마을이름) 아입니꺼?"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을 대뜸 알아차린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맞아요. 맞아! 우리 마을 정자나무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데 우째 아능교?"

환하게 밝은 목소리에 기운이 넘친다.

"그곳에 밭이 있어서 압니더."

"아이고, 그렇능교? 이 정자나무가 지금은 태풍에 많이 상했지만 우리 처녀 적에는 이러쿰 좋았던기라요. 이 나무에 줄을 매어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탔는데 명절이면 이곳 유천(간이역 근처 마을) 총각들이 이도령 춘향이 찾아오듯이 와가지고 같이 놀자고 야단이었제. 좀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면 소죽 끓이던 아버지한테 부지깽이로 얻어맞기도 하고… 그네를 타다, 여기 이 논에 풀쩍 떨어져 나자빠지기도 하고… 모든 게 추억인기라. 추억이 그리버서 마침 그때 찍어 논 사진을 크게 확대해 가지고 부산 우리 집에 가지고 간다 아입니꺼."

"그래서 유천총각하고 연애하여 부산에 삽니까?"

나도 한마디 끼어든다.

"아이라, 신랑은 이웃마을 사람이었지. 근데 어디 사능교?"

"저는 예전리에 삽니다."

"아이고, 예전리에 이래 이뿐 색씨가 사능교?"

손수 운전할 때와는 달리 기차를 탄다고 좀 꾸민 매무새가 톡톡히 대접을 받았다. 추억이 그리워서 추억을 데리고 가는 젊은 할머니의 눈망울이 유난히 맑다.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두르면 금방이라도 정자나무 그네에 사뿐히 올라설 것만 같은 그리움이 스며있다.
지금은 춘향이도 도령도 떠나버린 마을의 정자나무는 외롭다. 외로운 정자나무는 태풍에 쉬이 상처를 받는다.

언제일까? 추억이 그리운 춘향이와 도령이 정자나무가 있는 고향마을로 돌아오는 날은. 간이역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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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간이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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