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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이 참 많이 왔다!" 감꽃이 활짝 핀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한다. 감꽃을 맞이하는 반가움과 기쁨이 배어든 인사말이다. 높푸른 하늘 아래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진홍빛 감을 바라보듯 흡족한 표정이다.

산골 사람들에게서 나온, 꽃이 '피었다'가 아닌 '왔다'의 이 형이상학적인 언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에도 더러 들어 본 말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감꽃이 참 많이 왔네!"

감꽃이 많이 필 때마다 뜰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 그런 말을 하셨다. 손님이 올 때 예의를 지키듯 반가워하며 고마워하며 감꽃을 맞이하셨다.
유독 사과꽃이나 복숭아꽃 배꽃 감꽃 들을 보고 농부들은 '피었다'가 아니라 '왔다'고 한다. 전원으로 돌아온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따른다.

"오빠, 올해 복숭아꽃 많이 왔어요?"

"오냐. 올해 복숭아꽃 많이 왔다. 놀러 오너라."

재 너머에 살고 있는 오빠의 목소리가 기운차다. 꽃 진 자리에 맺은 열매를 솎아내는 일이 힘들어도 꽃이 많이 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밤새도록 지표를 울리며 풋감이 떨어져도 감꽃이 많이 온 것은 기쁜 일이다.

꽃이 '피었다'가 아닌 '왔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의 먹을거리에 대한 고마움과 소중함, 반가움의 대우로 여겨진다. 그것은 희망이다. 꽃이 피고 실한 열매가 많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간절함이다. 또한 왔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이니, 도대체 그곳은 어디이며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산골을 온통 분홍빛 화원으로 물들이는 복숭아꽃 살구꽃, 달빛 아래 눈부신 배꽃 자두꽃 사과꽃… 때 맞춰 피어나고 맺는 저 신기한 꽃들과 열매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어디에서 왔기에 그토록 고마워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곳은 플라톤이 명명한 이데아의 세계? 감각적 현상 너머에 참된 본질로서 실재한다는, 이 누리로 오는 뭇 생명들의 본래적인 자리 이데아! 그런 것인가. 어디엔가 정녕 그런 곳이 있어 그래서 해마다 그 모습 그대로 왔다가 돌아가는 것인가. 눈부신 화합과 질서로.

먼 길을 돌아 발길이 머문 이 산골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의 봄을 기억한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감나무 아래에서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감꽃을 맞이하시던 부모님 곁을 맴돌며 즐겁게 뛰놀던 어린 시절, 아껴먹은 감꽃이 긴 목걸이가 되어 함께 출렁이던 그 봄날의 마당에, 비녀를 꽂은 어머니의 머리 위에 살포시 앉았다가 땅으로 떨어져 구르던 감꽃의 낙하! 정갈하게 빗어 넘긴 쪽진 머리가 감잎처럼 윤이 나던 어머니를 곱게 치장해 주던 순간은 영원으로 선연하다.

눈을 뜨면 맨 먼저 감나무 아래로 다가가 감나무 품만큼 땅에 널려 있던 감꽃을 맞이하던 새벽, 떨어져 내려 더욱 싱싱한 네 잎의 꽃이 손안에 쥐어지면 그토록 신나게 손맛이 나던 것은 단지 보릿고개 시절 먹을거리가 되었던 넉넉한 기쁨보다 우주의 기운이 닿은 상쾌함이었을 것이다. 지금 한 손 가득 감꽃을 주워든 나는 누군가에게 막 달려가고 싶으니 말이다.

"올해도 많이 왔네! 참 많이 왔네!"

감꽃만이 반가운 것은 아니다. 언덕에 피어난 제비꽃 앞에서, 골목길을 수놓은 민들레와 이름 모를 풀꽃들 앞에서 나는 비로소 겸손해진다. 어디에선가에서 사람 사는 세상으로 찾아온 생명들. 모두가 고맙고 소중하여 새삼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귀히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마냥 흐르는 저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저기 푸른 보리밭, 저 초록의 원색도 그냥 초록이 아니다. 짝을 지어 음률로 나는 새들과 나비, 바람결까지도 어제와 다르다. 세상이 온통 고귀한 생명체다. 경이이며 신비다. 이 산골에서 내가 지낼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 외롭지 않는 풍요다. 팔 벌려 품어 안고, 누리고 또 누리다가 언젠가는 나도 돌아가리라. 때로는 이 세상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깨우치고, 때로는 불변적인 이념계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며 꽃이 지는 것도 진정 사랑하리라.

나고 늙어 병들고 죽는 인간의 삶인들 감꽃이 왔다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온갖 생명들이 모여든 이 누리를 찾아와 잠시 함께 어울림이 되었다가 돌아가는 것을. 어쩌면 어디엔가 있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더러는 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분명히 기억할 것은 감꽃이 오듯 언젠가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아야 할 일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이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현재가 진실로 아름답기 위하여.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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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감꽃이 오는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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