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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누워 있어도 살아만 달라고 의식을 잃어가는 며느리 앞에서 몸부림치며 손자 이름을 부르던 언니의 절규는 죽어가는 꽃나무 앞에서 기도가 되었다.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은 물론 틈틈이 언니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을 받은 꽃나무는 생기를 되찾아 꽃을 피우고 언니는 그 꽃나무들을 더욱 아꼈다."


우리 집 화단에 맨 먼저 터를 잡은 꽃나무는 수국이다. 화분에서 옮겨 심은 수국은 한 해 동안 무성한 잎으로 가지를 뻗더니 이듬해 여름엔 두 손을 둥그렇게 감싸 쥘 만큼 큰 꽃봉오리를 여기저기 맺어주었다. 처음엔 연둣빛으로 피어나 연분홍이 되었다가 보랏빛을 띠다가 가을 하늘빛으로 변하는 신비를 연출하며 집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또한 피어난 꽃은 오랫동안 머물러주어 바라보는 마음이 푸근하기까지 했다. 유난히 꽃빛이 고운 해거름엔 곧잘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을 늘어놓으면 맞장구를 쳐주는 언니의 기운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수국은 경산에 살고 있는 언니가 가져와서 심어준 꽃나무다.

산골에 황토집을 지어 이끼 낀 산돌로 둘레를 쌓은 우리 집 화단에 언니는 아끼던 수국 화분을 맨 먼저 들고 와 심어준 것이다. 언니 집엔 여러 종류의 꽃이 담긴 화분이 많다. 이층 양옥으로 시멘트로 포장한 좁은 마당엔 사람이 드나들 통로만 남겨놓고 크고 작은 화분이 놓여 있다. 지나던 길손들이 곧잘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고 더러 새 촉을 얻어가기도 하면 능소화가 각시처럼 환한 웃음으로 담 위에서 배웅한다. 주름진 언니의 얼굴이 능소화만큼 아름다울 때는 꽃을 바라볼 때다.

꽃을 가꾸던 언니가 눈물겨울 때가 있었다. 두 살배기와 젖먹이 손자를 안겨주고 갑자기 먼 세상으로 가버린 며느리의 빈자리를 몇 해 동안 눈물로 채우던 언니는 언제부터인가 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전화선을 타고 폭포처럼 흘러들던 언니의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 때마다 언니 집엔 화분이 늘어났다.

방울꽃 초롱꽃 금낭화 조팝나무… 그늘진 담 밑에도, 옥상을 오르는 계단 층층이, 창문 앞 작은 공간까지 크고 작은 화분에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향기를 풍기며 집 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자귀꽃을 눈꽃이라고 부르는 언니는 이름 모를 꽃은 그 모양새에 적합하게 이름을 지어주고, 길을 가다 가게 앞에서 화분에 담긴 꽃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얻어와 정성으로 가꾸어 꽃을 피워 냈다.

평생 누워 있어도 살아만 달라고 의식을 잃어가는 며느리 앞에서 몸부림치며 손자 이름을 부르던 언니의 절규는 죽어가는 꽃나무 앞에서 기도가 되었다.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은 물론 틈틈이 언니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을 받은 꽃나무는 생기를 되찾아 꽃을 피우고 언니는 그 꽃나무들을 더욱 아꼈다.

한 집안에 새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요즘은 보통 삼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삼십 년 동안 자식에게 쏟는 부모의 정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터. 어찌 부모의 정성뿐이랴. 온 우주의 기운이 보태지는 것을. 태어나는 생명 앞에 그토록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여기는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닌가.

꽃인들 다르랴. 한 송이의 꽃은 어느 날 그냥 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 날을 우주의 모든 정성이 유기적으로 스며든 사랑의 결실이다. 삼십 년 만에 집안에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난 새 생명을 안고 젖을 물리는 며느리가 하늘이었던 언니에게 이별의 아픔이 그토록 깊었던 것도, 죽어가는 꽃나무를 살려놓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이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무성하게 커가는 우리 집 화단의 수국을 본 언니는 또 다른 화분을 들고 왔다. 꽃 모양새가 병을 닮아 병꽃이라 부른다며 되풀이 꽃 자랑을 늘어놓으며 앞마당에 심어주었다. 땅에 뿌리를 내린 꽃나무는 놀라우리 만치 무성하게 번져 가지마다 진자주 예쁜 꽃을 오지게도 피워 올렸다. 그 왕성함과 꽃빛깔에 놀란 언니는 아끼던 화분들을 하나씩 내어주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껏 자라는 꽃나무를 보니 화분에 갇힌 꽃나무가 불쌍하여 바라보기가 미안하다고 했다. 언니가 마당 넓은 집을 마련하면 그때엔 곁뿌리 하나씩만 두고 큰 나무는 도로 돌려주어야겠다며 정성을 들여 땅에 심었다.

영춘화가 피고 지고, 제비꽃과 민들레가 피었다. 뾰족뾰족 새순을 돋아 올리는 꽃나무들을 살핀다. 혹여 얼어죽었을까 염려했는데 가지마다 싱싱하게 잎이 돋아나는 수국 앞에서 놀라움과 기쁨에 가슴이 설렌다. 산골의 추위를 견뎌내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위한 힘찬 자맥질이 지표를 울리며 내게 번져온다. 떨림과 희망이 되는 기다림.

그것은 경이며 환희다. 그리움이다. 언니는 알고 있었다. 산골에서 혼자 지낼 동생에게 꽃이 진정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인가. 꽃을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현실은.

사는 일이란 때로 꽃을 가꾸는 모습까지도 눈물겹게 하지만 기쁨은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법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이 있는 이에게 다시 꽃피는 봄은 더욱 슬픔이 될 수 있다. 형벌이 될 수 있다. 꽃을 꽃으로 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슬픔을 삭이며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가.

이봄,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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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꽃을 꽃으로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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