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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이 저녁식사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을 하면서 휴대폰을 눌러 대는 그런 스타일의 아내가 아니다. 남편이 저녁식사 시간까지 집에 돌아와 밥상머리에 앉아 주는 공무원적인 성실함을 기대하는 대신 어차피 사업의 길로 들어선 바에야 저녁식사 시간을 인맥을 넓히거나 그 외 사업적인 일로 활용하라고 오히려 대문을 열고 지갑을 챙겨 주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는 이유로 부부싸움을 만들거나 바가지를 긁는 일은 없다. 현모양처라기보다 어지간한 일에는 속 끓이지 않는 가슴이 트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나긋나긋한 여성적 성격과 거리가 먼 편으로 요즘 말로 ‘왕가슴’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런 왕가슴 아내를 믿는 남편은 가끔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나가거나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에도 나는 집 안에 있는 두 대의 차 중에서 남편이 어떤 차를 타고 나갔는지, 들어와서 무슨 옷을 입고 나갔는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오니까 무조건 휴대폰부터 눌러 대지 않는다.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느긋하고 관대한 데에는 남편이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하기에 사고 칠 염려를 조금 덜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결혼 생활 7년 동안 부부지간의 믿음을 보이지 않게 쌓아온 결과다.

시골에 부모님이 살고 도시에 자식들이 사는 가족 패턴이 우리나라의 주류를 형성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다. 7년 전에 혼자된 시어머니는 도시의 아파트에 사시고 아들 내외인 우리는 시골에 살면서 어머니를 자잘하게 챙기며 산다.

우리는 원래 시골 출신이 아니다. 농대를 졸업했다는 알량한 이력을 밑천으로 8년 전 시골로 들어와 농산물 가공업을 시작한 남편 때문에 나는 졸지에 시골 아줌마가 됐다.

소심하고 잔심대는 성격에다가 한평생 도시를 떠나 본 적이 없어 시골은 심심하고 무서운 곳으로 치부하는 어머니가 시골 오지 마을에 있는 우리 집에 떴다 하면……. 웬만한 일에는 무심하고 끄덕도 않는 왕가슴인 나와 이 세상 사람의 90%는 도둑놈으로 여기고 차만 끌고 나가면 교통사고가 나는 줄 아는 새가슴인 어머니가 한 집에 살면 소소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 왕가슴에 새가슴인 어머니를 부분집합으로 품어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이 고부간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 스르르 사라져 버린 남편은 저녁식사 시간까지 무소식이었다. 집에서 입던 작업복 차림에 트럭이 없는 것을 진작부터 파악한 나는 우리 집에서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있는 송 반장 댁이나 김예석 씨 댁에 갔다가 저녁을 해결하고 오겠거니 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두 사람하고 서로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서 때에 밥 한 끼 먹는 것은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의 오늘 행적은 대학 동기인 김예석 씨 댁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시설 하우스를 짓고 있는 김예석 씨가 요즘 일손이 달려서 남편이 시간이 날 때마다 도와주러 가곤 했으니까 나의 추리는 정확하게 맞을 것이다. 또 10년을 같이 산 부부의 텔레파시는 서로 통하는 법이라 굳이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므로 휴대폰을 눌러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전화 요금만 올리는 짓이다.

나는 태연히 저녁 밥상에 남편의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아비한테 전화는 왔었냐?”

“어디서 먹고 오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에게 ‘밥 때’는 목숨 줄 같은 것이었다. 가장이 출타 중일 때는 밥 굶지 말라고 따로 밥 한 그릇을 챙겨 놓던 세상을 사셨던 어머니에게 잔정이 없고 딱 부러지는 성격의 며느리는 낯선 세상에서 살다 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날 밤 안으로 끝낼 원고가 있어서 얼른 저녁상을 물리고 원고 쓸 생각에만 골몰해 있어서 남편에 대한 무심함이 그대로 묻어 있는 내 대답이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한 줄은 모른 채 대충 설거지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자판만 두드렸다.

“전화도 없고 도대체 뭔 일이다냐?”

TV에서는 9시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고, 어머니는 벌써 두어 번씩이나 문 밖을 들락거리며 행여나 아들이 언제나 들어올까 고개를 빼고 안절부절 기다리셨다. 그날따라 원고가 잘 풀리지 않던 난 어머니의 그런 조바심을 안심시킨다는 한 마디를 던졌는데…….

“가끔 한 번씩 그래요. 들어올 때 되면 오겠죠.”

깊이 생각할 틈이 없어서 말이 이렇게 나오고 말았다.

“아직 그 버릇 못 고쳤다냐.”

어머니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일찍 귀가하지 않은 남편 때문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원고 때문에 내 목소리가 조금 볼멘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이런 내 행동에 어머니는 내가 화가 나서 남편에게 휴대폰도 안 걸어 보는 줄 오해하시는 거였다.

신혼 초에 사소한 말다툼 끝에 남편이 일주일 동안 가출해서 어머니와 내 애를 태운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일을 끄집어내며 하소연 섞인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으실 태세였다. 받아 주기 시작하면 원고 마감은 날 새는 일이 되기에 나는 못들은 척 등 돌린 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더 흘렀고 내 머리 속에는 소식이 없는 남편도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도 없었다. 대신 잘 맞춰지지 않는 글자의 퍼즐들이 점령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남편의 귀가를 알리는 차 소리가 들리자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득달같이 현관으로 달려나가 남편의 앞을 막아섰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눈 빠지는 줄 모르고.”
어머니는 제법 근엄하고 강한 어조로 남편을 닦아세웠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일격에 남편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역력했고 어머니 뒤쪽으로 한발 물러나 있던 내 눈치를 보았다.

핏줄에 대한 사랑이 과잉 보호 수준인 어머니는 결코 자식들이나 손주들을 혼내거나 야단치는 법이 없는 분이다. 어머니는 내가 소식도 없이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바가지를 긁을 줄 알고 미리 그렇게 선수를 치고 계신 거였다. 거기다가 살림 제쳐 두고 컴퓨터라는 묘한 기계에 매달려 심심하고 따분한 당신 심사를 안 챙기고 있는 며느리에 대한 서운한 감정까지 그렇게 표출하신 거였다.

결혼 생활 10년, 나는 이제 남편도 시어머님도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확신한다. 뒷모습만으로도 이심전심의 전파를 감지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됐다고 믿는다. 그러나 원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성격에 험한 세상을 살아오느라 새가슴이 된 우리 어머니와 현실적이지 못하고 털털한 며느리의 성격 사이에는 묘한 전파도 흐른다.田


오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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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새가슴 시어머니 왕가슴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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