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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핀다. 며칠 동안 집을 떠났다 돌아오면 맨 먼저 아궁이에 불부터 지핀다. 한 개비 성냥불은 구겨진 신문지를 태우며 잔가지에 옮겨 붙고 이어 장작에 옮겨 붙은 불은 아궁이를 달구며 순하게 구들로 빨려 들어간다. 부넘기를 타올라 구들장을 떠받친 굄돌 사이를 거쳐 고래로 빠져나가는 맹렬한 불길로 달궈진 구들장은 두어 시간 후면 뜨끈뜨끈한 온돌방으로 나를 쉬게 한다.

한 아궁이 땔감을 밀어 넣고 집을 살핀다. 하얀 눈길에 발자국이 찍힐 때 환하게 생기를 되찾는 집의 기운을 느낀다. 굴뚝은 뭉글뭉글 신나게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주인이 돌아왔음을 마을에 알린다.

사람에게만 기다림이 있는 것이 아님을 집을 짓고부터 알았다. 집을 비우면 집은 주인을 기다린다는 것을. 둘레의 나무들도, 마당에 놓인 바윗돌까지도 모두 함께 주인이 어서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산골에 우리 집을 짓고부터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집을 떠난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이 보고 싶은 이유 속엔 기실 산골생활의 적적함이 큰 몫을 한다. 그것은 전원에 대한 감동의 척도가 낮아진 때문이며 집을 나섬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내 나름의 방편이기도 하다. 마당을 나설 때부터 우리 집과 이곳이 그리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쁨이 보태진다.

강을 품어 안고 어깨 두른 산자락이 다시 신비가 되고, 적요하던 산골 마을이 사람이 살 곳으로 아늑해 보이는 것도 먼 길을 한 바퀴 돌아왔을 때이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간 멧돼지 가족의 선명한 발자국이 반가운 것도, 대숲을 스치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청아한 음률이 되고, 겨울나무 빈 가지 앞에서 마음을 여미게 되는 것도 집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이다.

그렇다. 떠남은 돌아오기 위함이며 새로운 모색이 시작되는 걸음이다. 희망을 찾는 출발이 되고 가슴 떨리는 그리움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새해에 더욱 길을 떠난다. 해맞이, 그 벅찬 희망을 만나기 위하여. 느슨해진 삶이 탱탱하게 조율되어 모든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

오래전, 그 해의 첫 해오름을 나는 동해 바닷가에서 맞이했다. 아파트 거실에서 편안히 볼 수 있는, 해운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두고 어둠 속을 두 시간쯤 달린 그곳은 울산시를 벗어나 솔숲이 아름다운 작은 갯마을 앞이었다. 파도에 밀려 자갈이 긴 둔덕을 이루고 있는 바닷가에 닿았을 때 고요한 새벽인데도 자갈 구르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차르르차르르차르르르… 거세게 뭍을 할퀴던 바다의 포효. 해를 낳기 위한 바다의 요동. 그 거센 진통 앞에서 나는 전신을 떨었다. 이윽고 동녘 하늘 가득 모래집물을 붉게 터뜨리며 둥근 얼굴 하나 솟게 하고 기진해 눕던 바다. 어디에서 새벽을 기다렸는지 갈매기들의 비상이 시작되었다. 남아 있던 어둠이 갈매기의 날갯짓에 털려 흩어질 때쯤 바다는 서서히 환희의 출렁임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천지 창조의 첫날이 그러했을 듯 수평선 너머 온 하늘이 새벽 노을의 장관으로 숨을 멎게 하던 그때, 나의 환호는 노을이 아름다운 동녘 하늘로 달려가고 그 기운은 다시 새 즈믄 해 새벽 백두대간 능선에 나를 서게 했다.

해보다 먼저 산이 솟아올랐다. 힘찬 맥박을 뿜어내며 서서히 서서히 솟구쳐 오르던 검은 숲. 건장한 나신을 드러내던 나무들 너머로 심해의 물빛 같은 새벽 하늘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신비롭던 하늘빛. 산정에 도착하여 바라보았던 광활한 우주의 새벽은 나를 무중력의 우주인이 되게 했다. 그 황홀한 유영. 이윽고 검푸른 하늘에 진홍빛 양수를 질펀하게 터뜨리며 해를 낳던 산의 요동. 붉은 햇덩이 하나 솟구쳐 올리고 비로소 산은 제자리를 잡았다. 떠오른 해는 세상의 순리를 내려다보고 산은 엄숙한 위엄으로 땅의 질서를 다스린다는 것을 그 겨울 새벽 백두대간 진부령 능선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 해맞이를 맞이한 이후, 내 삶은 그때 겪고 있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고를 새벽에 시작하고 새벽에 마무리하는 버릇을 들였다. 잠자리에 들 때부터 새벽을 기다리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장작불이 사그라진 아궁이를 닫고 뜨끈해진 아랫목에 먼 길을 돌아온 몸을 누인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산골의 밤은 태고인 듯 고요하다. 오늘밤 켜놓은 촛불이 천장의 서까래를 돋보이게 하며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이 신비로운 안식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꿈인 듯 몽롱하다.

새해의 새벽을 기다린다. 아직도 불꽃처럼 발갛게 감이 달린 우리집 마당 감나무 앞에서 우러러 해맞이를 할 것이다. 내 아이들과 함께 강 건너 앞 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힘차게 당겨 안을 것이다.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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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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