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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 날아 내리듯 사뿐히 날아 내렸다. 가벼이 가벼이. 바람 자락이 스쳐도 끄떡 않고 버티고 있던 마른 잎은 비로소 떠날 때가 되어서야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에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몇 잎 남아 있던 잎들이 떨켜에서 밀려난 감나무엔 따지 않은 주홍빛 감이 꽃보다 곱다. 주절이 주절이 매달려 휘어진 가지는 흡사 광안리의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되었다.

서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어는 이맘때쯤이면 우리 황토집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온 마을을 뒤덮은 감을 말끔하게 거둬들인 잿빛 산자락에 오직 한 곳 집 둘레를 주홍으로 장식하는 감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가지에 달린 감은 제 빛을 잃지 않는다. 하얀 눈을 소복이 덮어쓰고 절묘한 어울림을 연출한 후에 홍시가 되어 새들의 먹이가 된다. 집 둘레의 감은 따지 않고 한동안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던 나도 그때가 되면 장대를 들고 새들과 동무되어 홍시를 따먹는다. 가지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거무스레 빛 바랜 홍시는 보기와는 달리 가장 좋은 단맛이다.

산골은 참으로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다. 잎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무성하게 숲을 이루던 잎들이 단풍이 들어 떨어지는 순리가 해마다 되풀이되어도 늘 새롭다. 항상 흐르는 강물도 계절마다 다르듯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일까. 추억과 그리움이 머무는 자리가 되는 것일까.

늦가을 해질 녘에 부산에서 한 무리 문인들이 찾아들었다.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기는 것은 집 둘레의 감나무다. 발갛게 익은 웃음을 주렁주렁 매달고 소스라치며 손을 내민다.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안겨드는 걸음이 환호를 지른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늦도록 둘러앉아 시와 수필 낭송이 이어지며 노래가 이어졌다. 저마다의 그리움과 추억이 먼 길을 달려와 어깨를 겯고, 이순을 넘긴 선생님들도 소년이 되고 소녀가 되었다. 하루가 바빴던 마을 어른도 피곤을 잊은 채 초대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밤하늘은 큼직한 별꽃을 수놓아 주고, 타오르는 장작불과 감나무도 불꽃 배경이 되어 함께 어울렸다. 진정 《풍경 속의 집》이 되었다.

황토집 구들방에 추억을 묻어 놓고 모두 돌아간 산골엔 겨울 적막이 쌓인다. 산모롱이 돌아 저 멀리 도로를 지나는 차들도 뜸하고 텅 빈 골목은 나 혼자 마을을 지키는 듯 적요하다.
겨울 산골의 고요를 향유하기 위하여 나는 이제 나를 다스리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잎을 버리고 몸 속의 수분을 몰아낸 겨울나무처럼. 그런데 나는 아직 떨켜를 만들지 못했다. 이별해야 할 것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욕심 한 움큼 치장처럼 매달고, 아직도 사랑을 기다리는 허무를 버리지 못한 마음 자락에서 스산한 바람이 인다.

도려내지 못한 상처는 굳은살을 돋우지 못하고 아리는 법이거늘, 매몰차게 잎 꼭지를 밀어내는 떨켜를 만드는 나무의 지혜를 따르지 못한 어리석음이 들여다보인다. 이 청랭한 산 기운과 저 맑은 강물을 얼마나 더 바라보고 느껴야 나도 산이 되고 강이 될 수 있을까. 겨울나무가 될 수 있을까.

12월엔 나를 위한 떨켜를 만들어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삶을 진정 향유하기 위하여. 새가 날아 내리듯 가벼이 가벼이 지상에 내려앉는 나뭇잎처럼 아름다운 이별을 위하여.

나뭇가지와 잎과의 이별 점, 굳은살로 자신을 다독이는 떨켜는 생성을 준비하는 자리다. 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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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떨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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