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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흘 비가 내린다.

겹겹이 에워싼 산들이 푸르게 푸르게 키가 큰다. 줄기차게 산을 밟아 온 비가 우리 집 감나무에서 연주회를 가진다. 경쾌하고 감미롭게, 웅장하고 부드럽게, 끊어질듯 이어지고, 멀어지다 다가오는 음률의 질서. 무성한 감나무 잎이 튕겨 올리는 수천 수만의 선율이 참으로 장중하다. 불어난 집 안의 도랑물이 배경음이 되는 화음에 사흘 연주회가 지루하지 않다. 수많은 병정들의 행군이 스쳐 가고, 비단자락을 끌며 무희들의 사뿐거림이 뒤를 따르는 화려한 잔치다.

오직 한 사람 관객인 나는 어깨가 드러난 노란 원피스를 꺼내 입고 분홍 꽃무늬 양산을 들었다. 맨발에 닿는 마당의 흙과 풀잎의 맛이 참으로 싱싱하다. 마당 가운데 양산을 내려놓고 나도 맨발의 무희가 된다. 땅을 딛고 비를 맞으며 원시를 흉내 내는 몸짓이다. 비를 머금은 화단의 꽃들이 둘레 바윗돌들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백일홍 금잔화 봉숭아 채송화… 요란스런 웃음소리에 우리 황토집도 덩달아 싱글벙글이다.

소리는 세상을 깨운다. 아가의 울음소리가 집 안을 깨우고, 새들의 지저귐이 아침을 깨우며, 골짜기를 달려온 새벽의 물소리가 사람의 정신을 깨운다. 그렇게 장맛비는 여름을 깨우고 우리 집을 깨우며 나를 깨운다.

감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이리도 우렁차다는 것을 산골에서 느낀다. 고요 속에 퍼져나는 빗소리가 다시 고요가 되는 무음無音. 여름을 깨우는 소리다. 그랬구나. 그래서 옛 선비들은 애써 연못을 만들어 연을 심었구나!

소리를 누리고, 빛을 누리고… 아는 것만큼 세상이 보인다면 아는 것만큼 누릴 수 있는 일. 보지 않아도 보이는,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비 내리는 산골의 여름. 오늘 내 몸짓도 나를 지켜주는 우리 집을 위한 선율이 된다.

더욱 젊다.
장마가 물러난 여름은 숨막히게 젊다. 무성하게 짙푸른 고요 속에 풋감이 떨어진다. 우리 집 지붕 위로 풋감 떨어지는 소리는 야무지게 명징하다. '쿵!'이었다가 '탁!'이었다가 '톡!'이었다가 '토르르륵!'이다. 지붕을 굴러 내린 풋감은 물받이 양철에 닿아 소스라치는데, '퉁!'으로 거세게 튕겨 오른 것들은 다시 '툭!'이 되어 지표를 울린다. 풋감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매번 놀란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이 산골에 무슨 침입자인가 싶어 흠칫 신경이 곤두서는 놀라움이다. 밤이면 벌떡 일어나 앉아 주위 동정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공포의 굉음이다. 어찌 나만 놀랄까. 뜰에 나서면 감잎을 파르르 떨게 한 어둠의 경련이 피부에 닿는다. 어둠만이 아니다. 땅 속 깊이 전해지는 울림이 전율로 번진다. 어둠도 놀라고, 땅도 놀라고, 어둠 속의 우리 집 도랑물도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는, 풋감 떨어지는 소리에 산골 예전리 여름밤은 어찌나 소란한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침이 되어도 이어지는 소리. 쿵! 탁! 토르르르륵! 아랫집 할머니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골목길에도 쉴새없이 풋감이 떨어진다.

"꽃피워 열매를 맺었으면 결실을 거둬야지 풋감은 왜 자꾸 떨어지노?"

빗자루를 들고 안타까이 감나무를 올려다본다.

"떨어져야제. 아직도 더 떨어져야제. 달린 대로 다 붙어 있으면 하나도 쓸모가 없다."

내 염려와는 달리 마을 할머니의 표정은 느긋하다. 그렇구나. 사람의 손이 가지 않아도 제 갈 길을 헤아려 돌아갈 줄 아는 풋감의 지혜가 놀랍다. 남아 있는 것들을 위한 희생의 용기가 그토록 지표를 울리며 장중했구나 싶다.
풋감 떨어지는 소리를 깨우치고 나니 지붕 위에 떨어지던 우리 집 풋감이 내 가슴을 때린다.

'사랑아, 나는 너를 위해 툭 툭 나를 던져 본 적 없었구나. 없었구나.'田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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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4)] 황토집에 찾아든 여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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