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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신발이 올 겨울에만 밑창이 떨어지거나 발등 부분이 찢어진 것이 벌써 네 켤레째였다. 잘 정비된 길과 많이 걸을 일이 없는 도시 생활에서 신발은 이미 실용적인 면보다도 기능적인 면이 부각되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문 밖을 나서면 돌과 흙이 울퉁불퉁한 맨땅이 더 많은 시골에서는 무조건 튼튼한 것이 최고다.

매번 딸아이의 신발을 사러 갈 때마다 투박하더라도 튼튼해 보이는 것보다는 반짝거리는 구슬 장식이 있거나 발등에 인조 꽃송이라도 붙어 있는 시골 환경에는 걸맞지 않는 화려한 신발들을 고르는 것은 내 어린 시절 신발에 맺혔던 기억들 때문이다.

10살쯤이었던가. 산타가 다녀간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동생과 내 머리맡에 빨간색 부츠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마침 바깥에는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어서, 우리 자매는 그 부츠를 신고 너무 좋아서 눈밭을 춤을 추는 신발을 신은 듯이 뛰어다녔다. 백일홍 꽃처럼 빨간 색에 반짝반짝 윤이 나고 안에는 노란 털이 덧대어진 그 부츠는 흰 눈길을 아무리 뛰어다녀도 발이 시리지 않았고,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꽃잎이 한 점씩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발을 난생 처음 신어 보는 환희의 그 순간은 20여 년도 더 지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지금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며칠 흥분 속에서 빨간 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어느 날, 나무 등걸 같은 뾰족한 것에 걸려 넘어지면서 하필이면 그 부츠 한 짝의 발목 안쪽이 쭉- 찢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쉽게 찢어진 것을 보면, 그 부츠는 그리 좋은 품질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 신발을 품질이 좋은 것으로 사 줄 정도로 부모님이 마음의 여유가 있는 분들이 아니었으니까.
환희의 순간이 순식간에 낭패감으로 뒤바뀌어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고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혼날 일에 눈앞이 더 캄캄해졌다.

“다시는 부츠 같은 거 신을 생각하지 마라.”

보너스를 타는 달에 큰마음 먹고 딸들의 부츠를 처음으로 사준 부모님은 조심성 없는 딸의 만행을 보고 노발대발 끓어오는 심정을 누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치셨다.
그러나 나는 당장 그 찢어진 부츠 대신 신고 다닐 만한 신발이 없었다. 그 부츠는 그 동안 신었던 운동화가 다 떨어져서 새로 신을 사주는 김에 부모님께서 크게 인심 쓰듯 사 주신 거였다. 다시 마음만 먹으면 부츠는 아니더라도 운동화라도 사 주실 법도 하건만 우리 부모님 사전에는 절대로 그런 사치는 없었다.

며칠 후에 내 부츠의 찢어진 부분에 하필이면 외눈박이 궁예의 검정색 눈가리개 같은 땜질 자국이 생겼다. 엄마가 신발 수선하는 곳에서 비슷한 색깔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며 손을 봐 온 것이 그 지경이었다. 그 당시 내 친구들 중에는 내 부츠를 따라서 똑같은 것으로 사 신은 친구들도 있었는데 검정색 땜통이 붙은 내 빨간색 부츠는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10살짜리 여자아이는 외출을 할 때마다 부츠에 난 검정색 상처를 가리기 위해 항상 바지가랑이를 잡아내려야 했으며 신발을 벗는 장소에는 가지 않으려고 친구네 놀러 가는 것도 꺼려했다. 그 검정색 땜통 부츠로 인해서 난 열 살 생애에 미리 동류의식에서 벗어나 차별화의 참담함을 경험해 버렸다.

땜질이 있는 부츠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던 12살 여름, 엄마와 같이 신발 가게에 가서 빨간색 샌들을 함께 골라서 사게 됐다. 그 샌들을 사다 놓고는 좋아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머리맡에 두고 잘까 하다가 마루 밑에 고이 모셔 놓고 그 샌들을 신고 나는 듯이 학교에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가려고 마루 밑에서 샌들을 꺼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밤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내 샌들을 잘근잘근 물어서 이빨 자국들이 선연했고 끈의 일부는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 강아지를 아무리 두들겨 패도 내 샌들은 원상회복이 될 리가 없었고, 이번에도 부모님은 제대로 간수를 못한 책임으로 실컷 잔소리만 들었을 뿐 내 샌들 비용을 두 번 지출하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찢어진 그 빨간색 샌들을 실로 얼기설기 엮어 보았지만 샌들의 상처는 회생 불가능이었다. 그 12살 여름에도 나는 새 샌들은 꿈도 못 꾸고 낡고 빛 바랜 운동화로 또 한철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땜질 자국이 선명한 부츠와 한 번도 못 신어보고 상처투성이가 된 샌들은 12살 내 감수성에 선연한 빨간색 상처를 남겼었다.

시장에는 좋은 물건들도 얼마든지 있고 마음먹으면 한 철에 신발 두 켤레 정도는 사 신고 살 정도는 됐는데 그 당시에 우리 부모님은 참으로 내핍을 지향하며 사셨다. 철이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이해는 하게 됐지만 딸의 감수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생활에만 급급했던 당신들을 원망했던 적이 더 많았다.

한참 멋을 부리고 외모 가꾸기에 눈을 뜨는 대학 시절에도 나는 빨간색 신발과의 악연을 겪으면서 파악한 부모님의 성향에 자포자기하듯 맞추느라고 하이힐 한번 사달라고 하지 않고 수수하게 보냈다. 그것은 부모님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 타협조차 하기 싫어서 외면하는 식의 나름대로는 반항의 한 방법이었다.

대학 졸업식이 코앞에 다가 왔고 마땅히 직장도 구하지 못한 상태였던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백화점엘 가자고 하시더니 평소에는 눈길 한 번도 안 주던 쟁쟁한 디자이너 브랜드만 입점해 있는 층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제 너만 졸업시키면 우리 집도 한숨 돌릴 수 있다고 아빠가 좋은 옷 좀 한 벌 사주라고 하셨어.”

이렇게 말씀을 하시며 열어 보이는 엄마의 핸드백 속에는 현금 다발이 두둑했다. 나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입게 됐고 덤으로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짝반짝 윤기도 선명한 유명 브랜드의 부츠까지 신게 되는 호사를 누렸다. 그동안의 부모님의 이유 있는 내핍 생활에 대해 내 가슴 속에 틀고 있던 똬리가 스르르 풀렸다.

하지만 감수성이 싹트는 시절에 겪었던 신발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은 딸아이의 신발에 대한 편력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신발만큼은 종류별로 다 장만해 주고도 디자인이 예쁜 신발은 다 사 줘야 직성이 풀렸다. 현관에서 마구 굴러다니는 딸아이의 신발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처럼 사는 방법이 옳았는지도 모른다고 잠시 후회를 하다가도 예쁜 신발을 보면 또 사주고야 만다.

다행히도 딸아이는 신발을 얼마나 험하게 신는지 나의 예쁜 아이 신발을 사들이는 병적인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명분을 만들어 주곤 한다. 언 땅이 풀리고 겨우내 신었던 세 켤레의 부츠가 무거워 보이는 딸아이에게 신기만 하면 꽃 냄새가 묻어날 것 같은 꽃무늬 봄 구두를 장만해 줘야할 것 같다.田


글 오수향(ocho2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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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꽃무늬 봄 구두를 신고 띄어보자. 팔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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