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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네들의 추억 속에 긴 겨울밤이 저물고







난방용 석유도 미리 채워놓고 겨울을 지낼 아이들의 방한복도 새로 장만해 놓고 김장도 넉넉하게 담아 놓고 추운 겨울을 보란 듯이 기다렸건만, 뒤뜰에 난데없이 개나리 봉오리가 노랗게 부풀어 오르는 이상한 겨울 속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목도리에 털실 모자에 긴코트를 입고도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사이로 캐롤 송이 울려 퍼져야 연말이니, 새해니 하는 기분이 나기 마련인데 어쩐지 이번 겨울에는 그런 풍경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토끼발 맞대고 사는 시골 마을에서는 추위가 온 동네를 감싸고 폭설이라도 쏟아져 인적조차 끊어지는 겨울날에는 구들장 따뜻한 ‘만만한’ 집에 모여 앉아 내기 윷놀이에 김치전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날씨마저 춥지 않은 올 겨울에는 동네 노인들의 도시 외출도 잦고 노동력이 남아 있는 여인네들은 옆 동네 비닐하우스로 품을 팔러 다닌 탓에 동네 사랑방에 사람들이 모일 틈이 없습니다.







김장 특수를 보려고 무를 심었다가 채소 값이 폭락하자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겠다는 옆 동네 친구의 밭에서 무말랭이라도 해보겠다고 무를 욕심껏 뽑아다 놓았습니다. 바깥 수도 가에서 큰 함지박에 무를 쏟아 놓고 수세미로 슬슬 문지르며 힐끔힐끔 울타리 바깥으로 눈길을 주었지요. 시골 마을의 일은 내 일, 네 일이 따로 없어서 누군가 지나가다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고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와 훈수를 놓기 마련이지요. 그러다가 내 서툰 일솜씨에 팔을 걷어 부치고 달려들어 일이 각이 날 때까지(끝날 때가지) 도와주는 것이 시골 인심입니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김 부자 여사가 우리 집 일에 걸려들어서 무를 다듬고 씻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 옆집 할머니까지 합세한 일은 너무도 쉽게 끝나버렸습니다. 내가 무말랭이를 하기 좋게 무를 써는 일까지 걱정하기도 전에, 두 여인네는 저녁에 동네 다른 여인네들까지 불러서 함께 썰어 주겠다며 벌써 전화를 돌리고 있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옆집 할머니 집에 들어서니, 방문 밖에서부터 벌써 칼도마 소리가 정겹게 들려옵니다. 방 안에는 우리 동네에서 젊은 축에 끼는 아줌마들은 다 모여 있었습니다. 어쩌면 올 겨울이 시작된 후에 이렇게 동네 여인네들이 모인 일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들 하나 덜렁 낳아놓고 남편은 군대에 가버렸는데 시어머니는 모시틀에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지, 나는 잠이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벤소간에 앉아서 졸았어. 근데 꿈인지 생시인지 그렇게 선명하게 우리 수호 아부지가 군복을 입고 대문간으로 들어서쟎여.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뛰쳐나간다는게 주저앉아 버렸당께.”



73세 김 경희 여사의 젊은 날의 추억담이 무 써는 소리 속에 한참이었습니다.



“어머나 어쩐디야, 그래서 에피통에 빠졌남유?”



소녀처럼 여린 성격의 66세 이윤희 여사가 무 썰기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잠깐, 에피통이 뭔데요? 혹시…”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시골 살이를 즐기고 있는 저한테 사소한 사투리 한 마디라도 그냥 놓칠 수가 없었지요.



“에이, 또망말여. 그거 있쟎여.”



 60세 김부자 여사가 에피통의 뜻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또 다른 사투리를 불러왔습니다.



 “이잉! 또망? 웬 불어? 이거 충청도 사투리인지 불어인지 모르겠네…”



 저는 다시 헛갈리고 말았습니다.



“무수 쓰는데(무 써는데) 드럽게 똥수간 얘기는 다 나온디야. 가서 손들 씻고 와.”



깔끔하고 손맛이 좋기로 소문난 박명우 여사의 핀잔이 이어졌습니다.



“저 잡것은 원판(어지간히) 깔끔도 떤다니께. 화장실 얘기만해도 손을 씻으러 다니면 오늘 이 많은 무수는 언제 다 쓸겄냐(썰겠냐)?”







박명우 여사와 절친한 친구 사이인, 우리 동네 멋쟁이 김순희 여사였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에피통’과 ‘또망’의 뜻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충청도 사투리가 불어 발음과 비슷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무 써는 일보다 저한테는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피통에 빠졌슈? 안빠졌슈?”



“빠질뻔 했는데… 걸쳤지.”



김 경희 여사의 입담에 우리 동네 아줌마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겨울밤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올해는 날이 춥지 않아서 폭폭 김장 짠지(김치) 시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해가 바뀌게 생겼네. 또 한 살 더 먹으면 무신 재미로 사나?”



김 순희 여사가 무심한 세월 탓을 합니다.



“얼라, 혼자 사는 우리도 있는데 서방 있는 것이 더하네.”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고만고만한 다섯 아이들과 사느라고 고생한 박명우 여사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요.







“근데 제선 엄마 무수 쓰는 게 왜 그 모양이여. 우리가 해 놓은 거 보고 맞춰서 해야지. 작게 쓸면(썰면) 너무 말라서 먹을게 없쟎여.”



항상 동네 여인네들과 일을 하면 지적을 당하는 사람은 저 밖에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동네 아줌마들의 새해 소망을 들어보겠습니다.”



근엄하신 어르신들로부터 제일 나이 어린 제가 말 도마에 오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습니다.



“새해 소망은 무슨? 굴품하니께(출출하니까) 뭐라도 먹고 하자구. 그만들 칼 내려놓고 이쪽으로 모여 앉으랑께.”



도토리묵 한 사발과 떡 한 접시에 맥주 한 잔씩이 아줌마들한테 돌려졌습니다. 제가 나이가 젊은 탓인지 말발이 잘 먹히지도 않지만 정식으로 판을 벌리면 제대로 못하는 것이 우리 여인네들입니다. 하지만 맥주 기운이 조금씩 오르자 우리 여인네들은 대처에 나가서 사는 자식들이 불경기 안타고 사업 잘되고 자손들마다 잔병치레 없이 건강했으면 더 이상 원이 없다는 우리 한국 여인네들의 공통된 소원들을 그 날 모인 동네 아줌마들한테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철부지처럼 시골 마을에 끼어든 저의 소원은 새해에도 이 아줌마들과 같이 오순도순 같이 일을 하고 항상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자식들, 남편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여유를 찾는 것입니다. 田







글   오수향 (ocho2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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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여인네들의 추억속에 긴 겨울밤이 저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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