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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벼들이 야산의 단풍잎들과 색 겨루기를 하고, 햇볕은 따가워도 한번 씩 변심한 연인들 사이에 부는 찬바람 같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에는 매콤하고 코끝이 찡한 별미가 먹고 싶어진다. 저녁거리로 무엇을 해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편이 청국장 먹을 때가 됐다며 콩자루를 꺼내 놓고 청국장을 띄울 준비를 했다.
남편이 콩을 물에 불려 놓았는데 전화를 받더니 나갈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콩을 삶는 일은 내 몫으로 떨어졌다. 솔직히 가마솥에 불을 때서 콩을 삶는 일은 나는 잘 못한다. 그 일은 전적으로 남편이 해왔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장작을 넣었다.
여름 동안 잘 마른 장작개비는 그윽한 그을음 냄새를 풍기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는 모습이 어쩐지 금기를 깨트리라고 유혹하는 듯한 마력을 느끼게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 팔이’ 소녀가 남의 집 창 밑에서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는 방 안을 훔쳐보면서 팔아야 할 성냥을 그어 댔던 것은 바로 그런 불의 마력에 혹해서가 아니었을까. 도시 내기인 나에게 이렇게 어린시절 정서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것들은 동화책 속의 한 장면이고, 시골 할머니 댁에서의 기억들은 부수적으로 떠오른다.
방학과 명절이면 찾아가던 아버지의 고향에는 할아버지가 지게에 가득 나무를 해오시고,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가마솥에 밥을 짓던 할머니가 계셨다. 방학에 다녀 갈 때면 나도 할머니의 치마꼬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궁이에 불 좀 때 보겠다고 조르던 철부지 손녀딸이었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싸니께 저리 나가 놀란 말여…”
할머니는 부지깽이로 불타는 장작더미를 헤집으면서도, 결코 손녀들에게 불을 때 보게 하는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그래도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고 계속 조르는 손녀들을, 할머니는 부지깽이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부엌문 밖으로 쫓아내곤 하셨다. 할머니는 모처럼 도시에서 놀러온 손녀들이 아궁이 앞에서 얼씬거리다가 혹시라도 몸에 불티라도 튀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그러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손녀는 할머니의 깊은 배려를 헤아리기에 앞서 호시탐탐 불장난의 기회를 노리다가 할머니의 손때로 단련된 부지깽이까지 땔감으로 집어넣고는, 할머니가 부엌 문 앞에 나타나면 신발을 신은 발로 부뚜막으로 뛰어올라 도망치는 불경스런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 여고생이던 고모는 할머니 눈을 피해 잿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서 뒤란 장독대로 쫓겨난 조카들에게 공수해다 주었다. 고모는 조카들에게 큰 장독대에 숨어서 입에 검댕이를 잔뜩 묻히며 구운 고구마를 까서 ‘몰래 먹는 맛의 묘미’를 터득하게 해 주었다.

생각난 김에 장작불에 감자를 구워서 유치원에서 돌아올 아이들에게 내 어린시절에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추억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가마솥 부뚜막에서 불을 때고 있는 나를 보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달려왔다.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궁이 속을 바라보던 아들아이는 땔감을 날라다 주는 척 하더니 어느새 불이 붙은 장작을 꺼내서 움켜쥐고는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엄마, 불꽃놀이야. 멋있지”
아들아이도 타오르는 불꽃의 마력에 끌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유희였다.
“이리 내, 얼른. 위험하단 말야, 엄마 말 안 들을래”
아이들 때문에 불을 때는 아궁이 앞은 마치 어린시절 할머니 댁 부엌 풍경이 됐다. 나 역시 눈을 부릅뜨며 부지깽이로 그 옛날 할머니처럼 아들 녀석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재현되니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아들아이를 겨우 진정시켜 부뚜막 앞에 앉히고는 불 속에 던져 둔 감자를 꺼냈다.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의 껍질을 호호 불며 벗겨서 과자의 단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건네 주었다. 도저히 감자 같지 않았던 까만 덩어리가 신기하게도 껍질을 벗기자 김이 폴폴 나며 하얀 속을 드러냈다. 구수한 냄새로 후각까지 자극하는 감자를 아이들은 의외로 잘 먹었다.

“가마솥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면 불 조절에 들어 가야해.”
남편은 이런 말을 남기고 외출을 했다.
아이들과 감자를 굽는다고 소동을 피우느라 콩이 익고 있는 가마솥에 소홀한 사이, 드디어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마솥 뚜껑 안쪽에서 참았던 설움 같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장작을 더 넣는 대신 가마솥 뚜껑을 물행주로 닦으면서 온도를 조절하고, 불 아궁이에도 물을 뿌려 열을 식혀서 뜸을 들여야 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음식이 조리되는 세상에 사는 요즘에도 타오르는 불꽃으로 고고하게 단련된 검정색 가마솥의 미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로 남아 있다. 가을이 깊어가고 몸도 마음도 웅숭그리게 되는 이즈음, 뚜껑이 따뜻한 가마솥이 걸린 불을 때는 아궁이와 반질반질 윤이 나던 부뚜막이 사람들의 가슴마다 살아났으면 좋겠다. 田

글 오수향 (ocho290@hanmail.net)
∴ 글쓴이 오수향은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 폐교에 살면서 글쓰기의 꿈을 좇아가고 있는 주부입니다. 공주 KBS,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수향의 시골살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메일을 보내보세요. 더욱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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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가마솥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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