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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난장 같은 모내기철이 지나고 나면 시골 마을의 여름 들녘 벼들은 어미 뻐꾸기들의 새끼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쑥쑥 자라는 일만 남는다. 처음 모내기를 시작했던 논에서는 앳된 동자승의 머리 같았던 것이 금새 푸른 보자기를 깔아 놓은 듯 변해 간다.
이즈음 시골 마을에는 노랗기도 하고 주황빛이기도 한 원추리 꽃의 자태가 아름다운 시기다. 뒷산으로 한 시선만 돌려도 원추리 꽃들이 가는 허리를 고혹(蠱惑)적으로 낭창낭창 흔들어 대고 하얀 나비가 꽃 사이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자생화들이 작고 소박한데 비해서 원추리 꽃은 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처럼 세련되고 인위적인 매력이 있어서 왠지 시골 언덕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이다.

원추리 꽃 같은 그녀와의 만남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 원추리 꽃처럼 돋보이는 도회적인 분위기에 항상 상큼한 향기가 나는 그녀를 만난 것은 벌써 3년 전이다.

자녀를 둘 이상 둔 결혼 4, 5년 차의 주부들은 살림의 무게와 아이들 등쌀에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시들어 가는 꽃처럼 생기도 빠지고 푸석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해져 서서히 ‘아줌마’의 본색을 갖춰 가게 된다.

큰아이가 다니는 ‘어린이 집’의 엄마들 모임은 그런 아줌마화가 진행되어 가는 여인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늘씬하고 큰 키로도 시선을 끌었지만 전문직 여성 같은 세련된 옷차림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먼저 낯을 가리지 않고 나한테 말을 건네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장롱 면허였던 그녀를 모임 때마다 내가 태우러 다니면서 그녀와 나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처럼 도시에서 귀향을 했으리라는 추측과 달리 그녀는 우리 고장 토박이였으며 소를 키우는 고향 남자를 만나 고향 근처에서 살림을 꾸린 경우였다.

그녀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맞추면 요철처럼 꼭 맞물릴 것 같은 나와는 반대의 이미지와 성격을 발견하곤 했다. 통통하고 작은 내 체격을 보완하듯 큰 키와 늘씬한 체격도 그렇고, 수줍음이 많은 내 성격을 대신하듯 곰살궂고 낙천적이고 명랑한 그녀의 성격은 주변까지 밝게 해주는 듯했고, 매사를 알량한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나와 반대로 그녀의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의 추진력은 잘 조화가 되어 끈끈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거기에 그녀와 나는 우연하게도 같은 성씨(姓氏)와 한 살 차이의 근소한 나이 차가 예정된 인연이었던 것처럼 쉽게 친한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서 항상 풍겨오는 산뜻한 향기가 만남을 즐겁게 해 준다.

그녀와 나는 시골 여자로 살아가는 어려움도 털어놓고 야생꽃으로 집안을 장식하고 산나물을 뜯고 텃밭의 반찬거리들을 나눠 먹으며 흉금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했고 무엇보다도 우리 같은 타향 출신들에게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 정보들이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져 더 이상 우리의 시골 살이를 서럽지 않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갑자기 찾아온 손님 대접에 허둥거리고 있을 때 서슴없이 소매를 걷어 부치고 우리 집 주방으로 들어와 주는 친구였으며 내가 볼일을 보러 멀리 갈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는 보모가 되어 주는 그녀는 쓸쓸하게 시작한 내 시골 살이를 윤택하게 해 준 또 하나의 정겨운 이웃이다.

그녀가 시골 살이에서 얻는 보람
두 해전 가을이었던가. 전화도 없이 불쑥 그녀의 집을 찾아갔을 때, 집 안에는 그녀 대신 노오란 국화 화분만이 그윽한 향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 집 뒤에 있는 축사에 갔다가 나는 처음으로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헐렁하고 낡은 작업복에 고무장화를 신고 축사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는 그녀의 낯선 모습은 한 마리 백조가 수면 위에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수 없이 발을 젓고 있는 결과라는 비유 그 자체였다.

“나, 소 냄새 안 배게 하려고 하루에 목욕을 두 번 씩 하고 빨래할 때는 섬유린스를 남들보다 두 배로 진하게 쓰면서 살아. 하지만 이제는 세 마리로 시작해서 열아홉 마리로 늘어난 이 소들이 내 시골 살이의 작품들이고, 그들이 불어나는 보람에 산다.”

그녀한테서 항상 배어 있던 향기의 진실에 나는 그만 가슴이 아릿해졌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시처럼 쏟아 내던 그녀의 말은 여전히 내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다.

당시 우리 가족의 시골로의 방향 전환은 실의에 찬 낙향도 아니었고 풍족한 전원주택에서의 삶도 아니라 남편의 사업적 배경만 바꾼 것에 불과한 채 정착이 안 된 상태였다. 도시적 사고 방식으로 시골에서 살자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참이었다.

겉으로는 원추리 꽃 같기만 하던 그녀의 엉겅퀴 꽃 같은 참 모습을 보고 온 후, 비로소 나는 그동안의 부적응과 내면적인 혼란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녀처럼 이 시골 살이에서 내 작품들을 꿈꾸게 되었고, 그녀의 향기는 물 설고 낯 설은 시골 살이를 낭만적 상상력만으로 뛰어 든 철없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5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내 시골 살이의 최대 행운
문득 돌아보니, 원추리 꽃만 보면 떠오르는 그녀에게 나는 겨우 장롱 면허 면하도록 운전 연습시켜 준 것과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는 것 밖에 없는데 그녀는 내 시골 살이에서 내게 없는 모든 것을 채워 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는 짝꿍 같은 친구였다가, 내가 곤란할 때는 키다리아저씨로, 삶이 버겁고 나태해질 때는 스승 같은 존재가 되는 그녀를 빼면 내 시골 살이에서 뭐가 남을까?

그녀는 오늘도 그녀의 작품들이 노니는 축사로 고추밭으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다가도 외출을 할 때는 캐리어 우먼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차림으로 문 밖을 나설 것이다.

다소 거칠고 험해 보이는 엉겅퀴 꽃 같은 생활을 원추리 꽃처럼 변신을 시키며 사는 그녀를 만난 것은 내 시골 살이의 최대의 행운이다. 田

■ 글쓴이 오수향 (ocho290@hanmail.net)

∴ 글쓴이 오수향은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 폐교에 살면서 글쓰기의 꿈을 좇아가고 있는 주부입니다. 공주 KBS,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수향의 시골살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메일을 보내보세요. 더욱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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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원추리 꽃 같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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