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세월리로 이사 온 지 한 해가 다 되어 간다. 봄부터 시작한 잔디와 나무 심기에서 비롯해 채소와 푸성귀 키우기, 화단 가꾸기, 계단 만들기 등 여름과 가을 동안 쉼 없이 일을 한다고 했는데도 또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봄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거름을 주지 않는다면 나무들이 꽃을 온전히 피우겠는가. 김장을 하지 않는다면 겨울과 이른봄에 무엇을 먹겠는가. 여기는 시골이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준비는 봄을 기다리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초겨울 바람이 세월리의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들판에는 이제 바람이 머물고 갈 벼들도 무 배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갈대들만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바야흐로 이제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이다.

겨울 준비는 아직은 뭐라 해도 김장하는 데서 시작된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과 무채로 김장 속을 만들어 김장하는 모습은 전통적인 김장 담그기 그대로다. 물론 모든 재료는 세월리에서 농사를 지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김장하는 모습은 도시에서도 가끔 볼 수 있지만 자신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채소와 양념으로 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지난 토요일 한창슈퍼에서는 큰 길가에서 김장을 하는데, 서울 사는 아들딸들이 모두 내려와 함께 하고 있었다.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운데 김장은 한 항아리씩 채워지고 있었다. 서울로 가져 갈 것들은 주로 비닐 포대에 담겨지고 있었지만 김장독을 묻는 것이 최고의 맛이라고 이장이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김치 냉장고가 그 맛을 따라가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라고 말이다.

용보네도 김장을 다 끝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고추밭 농사는 망쳤지만 다행히 강가에 있는 고추를 거둘 수 있어서 양념 걱정은 없었다. 세 식구 먹는 데 백 포기 정도 했으니 넉넉하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할 때 용보는 가장 행복한 듯했다. 내가 김장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이장이 이렇게 말했다. 김장하는 집 세 군데만 들리면 올 해 김장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정말이다. 이렇게 인심이 살아 있는 곳이 세월리다.

김장을 하는 데는 아직은 품앗이가 절대적이다. 도시에 사는 가족들끼리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끼리 김장 날을 서로 다르게 잡아 품앗이를 하는 것이다. 익보네가 아직 김장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김장 날을 늦게 잡은 모양이다.

품앗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노동 방식의 하나다. 그러나 모내기에서 풀베기, 타작까지 기계로 하는 실정이다 보니 김장 같은 가정일에 품앗이가 남아 있는 것도 다행이다 싶다. 품앗이는 노동의 효율을 올리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크게 기여해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장을 같이 하다 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집마다 각기 독특한 김장 맛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천차만별인 사람들의 성격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세월리에서 첫겨울 준비를 하는 우리집은 아직은 김장이 문제가 아니다. 개집 보수, 수도꼭지 보온대책, 나무 거름주기 등 겨울나기 준비가 태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개 한 마리를 키우기로 한 것이 이렇게 일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개집을 짓기도 전에 아내가 개를 몰고 오는 바람에 서둘러 지었는데, 목공에 능숙하지 못한 관계로 개집 하나를 만드는 데 이틀이나 걸렸을 뿐 아니라, 앞집 동완이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중요 기둥만 세우고 거기에다 베니어판을 대기만 했기 때문에 판자로 지붕과 옆을 보완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멍석을 만들어 넣는 등 보온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됐다. 세월 주유소에서 데려온 개는 러프 콜리라는 스코틀랜드를 원산지로 하는 종류인데 덩치에 비해 매우 온순하여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만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평소 개나 애완동물들을 그렇게 썩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정이 들어버린 데는 콜리(이름을 그냥 콜리라고 부른다)가 사람을 잘 따르고 온순한 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내와 둘만 사는 집이다 보니 가족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집을 떠나있는 상훈, 상섭 두 아들이 오는 날이면 옛 식구가 만난 것처럼 좋아하니 이제는 영락없이 같이 살아가는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올해 심은 나무들도 우리 집에서 첫겨울을 나게 되었다. 나무들의 겨울나기는 가을에 거름을 주는 것부터 시작된다. 봄에 뿌리를 내리고 첫여름을 나는 데 나무들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한다. 그것을 나무들의 몸살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음력 유월만 넘기면 그 나무는 자연적인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산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이 겨울을 온전하게 나기 위해서는 봄과 여름 내내 소진해버린 에너지를 보충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거름주기인데, 생각보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에 보통 20킬로그램들이 한 포대 이상은 주어야 한다니 퇴비도 퇴비지만 거름 주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월리로 이사 온 지 한 해가 다 되어 간다. 봄부터 시작한 잔디와 나무 심기에서 비롯해 채소와 푸성귀 키우기, 화단 가꾸기, 계단 만들기 등 여름과 가을 동안 쉼 없이 일을 한다고 했는데도 또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봄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거름을 주지 않는다면 나무들이 꽃을 온전히 피우겠는가. 김장을 하지 않는다면 겨울과 이른봄에 무엇을 먹겠는가. 여기는 시골이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준비는 봄을 기다리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장 심재준 씨는 오늘도 걱정을 했다. 내년에는 우리 마을에 여성회관을 하나 짓는 것이 소원인데 하면서. 이런 마을일에 정작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세월리에서 일 년 동안 살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허풍만 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마을일이나 개개인의 사정에 같이 걱정하면서 동참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오늘은 달도 늦게 뜨는 밤, 달빛 대신 별빛이 세월리 초겨울의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밤을 지키는 저 별처럼 세월리 마을 주민 모두의 마음 속에 언제나 별 하나씩 빛나기를 바라본다.

그동안 변변치 않은 글을 연재해 주신 전원주택 라이프에 감사 드린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세월리 이장을 비롯한 주민 여러분께 건강과 보람이 언제나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田

■ 글 이기윤(시인·육군사관학교 교수)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전원일기] 다시 봄을 기다리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