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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올해도 설날이 오기 전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들판에도 산에도 또 얼어붙은 강물 위에도 눈은 많이도 쌓였다. 그래서 2003년 1월의 세월리는 온통 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울 농사를 하지 않는 탓인지 논둑에 내린 눈은 저 혼자 쌓였다 녹았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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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다행스런 것은 도로에 쌓인 눈은 금새 녹아버려 교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양리에서 세월리로 넘어가는 사슬고개를 걱정들 했지만 고갯길이 대부분 양지쪽으로 나 있어 그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로가 나기 전인 30여 년 전만 해도 사슬고개가 하도 험해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버스가 다니지 못해 시오 리(十五里) 길을 걸어가곤 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추억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오르내리는 나에게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은근히 걱정스런 말을 건네곤 했는데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로가 잘 나 있으며 제설작업도 제때에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는데, 추억이란 이렇게 사람을 오래도록 가두기도 하는 모양이다.

세월리에서 처음으로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섣달그믐날 세월리로 온 식구가 내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네가 조용하기만 하였다. 한길에는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먼 고향으로 내려가는지 자동차만 분주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수소문하여 찾아가 보니 마을회관 2층에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명절 전날 고향의 어느 사랑방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을. 그래서 달 없는 깜깜한 밤을 오히려 더 밝게 지새우는 것을.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지고 간 술도 마다 한 채 오락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은 내가 그리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몇 마디 인사 끝에 되돌아 나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한 사람이 뒤따라 나왔다.

그 사람은 이 동네에 살고 있지만 성남으로 출퇴근하는 바람에 동네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기가 한 달에 한 번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는 도회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위에는 주먹만한 별들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설날 아침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설날 다음 날 아침, 서울에서 내려온 이명화 씨 부부와 함께 청송 심씨 입조인 심권의 신도비를 찾았다. 신도비는 아랫마을 야산에 있는데, 이 마을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수필가인 심영구 씨에 의하면 이 비로 인해 이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보학(譜學)에 상당한 조예를 지닌 이명화 씨는 신도비를 살핀 후, 이곳은 심권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다 객사(客舍)에서 병사한 이 분을 선영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면 그의 선친인 심희세를 모신 이곳에 다시 심권을 모심으로써 그 후손 일족이 여기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0여 년 동안 14대에 걸쳐 청송 심씨 일족들이 이 마을의 중추를 이루면서 청주 한씨, 최씨 등과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 일족이 한창 번성을 이룰 때는 70여 세대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20여 세대만이 남아 있다.

점심을 먹은 후, 마을회관 아래층에 있는 노인정을 찾았다. 미리 연락을 한 관계로 노인회 총무이신 심재욱 씨를 비롯하여 임덕재, 심재성, 이창호, 임준현, 전홍선 씨 등 여러 분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설날을 맞아서 그런지 촌로답지 않게 모든 맵시가 세련되어 보였다. 이사를 한 후 아직 공식적인(?) 인사를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기도 하여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로 앞다투어 말씀을 해 주시는 모습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이 마을의 물맛이 너무 좋다고 하자, 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아랫마을, 윗마을 그리고 다랫골 등을 합쳐 세월리라 통칭하지만 옛날부터 5·16 이후 행정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세월천을 기준으로 강가 아랫마을은 세심리(洗心里), 산 쪽 윗마을은 세월리, 그리고 시냇물이 발원하는 골짜기는 다랫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심리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렇게 불리웠고 골짜기에는 다래가 많이 열려 다랫골이라 불렀다 한다. 여하튼 씻을 세(洗) 자가 많이 들어간 것을 보면 예부터 이곳은 물이 맑고 깨끗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되기 전까지 이곳에는 양조장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물맛이 좋기 때문인데, 당시 주류에 관한 법에 의하면 1개 면에 막걸리 양조장 1개가 통상적인 원칙이었지만 이곳은 그것을 초월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면소재지도 아닌 이곳에 세워졌던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는 전량 세심리 나루터를 통해 서울로 직송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고 하니 이곳의 물맛은 알아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1984년에 21가구가 발의하여 설치한 간이 상수도는 다랫골 뒷산인 양자산 줄기 8부 능선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집에도 그 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온천물로 착각할 정도로 비누가 잘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생수로 마실 때는 단맛이 혀끝에 감돌기도 한다.

선인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물맛이 좋은 곳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 없다고. 그래서인지 10여 년 전에 다랫골로 들어와 살고 있는 전홍선(67) 씨는 “이 마을의 인심과 우애는 남다르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믿고 도와가며 살기 때문에 담장도 필요 없다”고 하는 전홍선 씨의 안색은 뒤늦게 이곳에 들어 온 사람답지 않게 긍지와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런데 정월 열 이튿날(양력 2월 12일) 조용하던 마을에 잔치 마당이 벌어졌다. 오전 11시쯤 갑자기 동네 마이크에서 트로트 풍의 흥겨운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전달 사항에 앞선 전주곡이려니 했는데 음악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래서 마을회관 앞으로 나가보니 이게 웬일인가. 마을회관에는 ‘대보름 맞이 윷놀이 한마당’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고, 마당에서는 마을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모두 나와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서는 청년들이 어른들을 대접하려고 삽겹살을 굽고 있고, 마당 가운데에서는 윷놀이가 한창이었다.

아, 그래서 설날에는 가족 중심으로, 대보름에는 마을 중심의 축제 행사를 하는 것이 이 마을의 전통이구나 하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축제를 보면서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또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田

이기윤〈시인·육군사관학교 교수〉

[글쓴이 이기윤은 시인이자 육군사관학교 교수이며, 현재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살고 있다. 1997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99년 시집 《자전거와 바퀴벌레》 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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