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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부역 나와요!

처음 시골로 이사와 살 때입니다.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털어서 땅을 장만하고 나니 집 지을 돈이 없어서 농가를 7백만원
전세로 빌어 살 때입니다.
이사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벽 6시에 누군가 방문을 마구 두들기며 소리를 칩니다.
기겁을 해서 깨어 보니, 뒷집 아줌마가 무어라 소리를 칩니다.
“부역 나와욧!”
미처 잠이 덜 깬 상태로 부역이라는 외침을 들으니, 이게 무슨 전쟁이 난 건가?
나는 부역이란 게 육이오 전쟁 때나 일제시대 때의 강제 노역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나오라고 방문을 마구 두드리니 놀랄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가 부역이 뭐냐고 물으니, 뒷집 아줌마는 참 딱하다는 얼굴로
“부역도 몰라요? 마을 길에 풀 베는 거 말예요. 빨리 낫이나 들고 나와요.”
영문을 모른 채 나는 아주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낫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내 낫을 보더니 혀를 찼습니다.
아니, 그 낫은 뭐하러 들고 나왔수?
마을 반장이란 분이 야단을 치는 이유를 몰라 멀거니 서 있으니, 내 낫은 나무 자르는
조선낫이랍니다.
얼마 전 시골생활 기념으로 철물점에서 산 것인데, 날이 두텁고, 자루가 투박한 나무로
박아 제법 터프하고 고풍스러워 일부러 고른 것입니다.
다른 이들 낫을 보니 정말 맵짜하고 날이 얇은 것들로 왜낫이라는 거더군요.
구박을 받고 남들보다 앞서 풀들을 날랜 검객처럼 베어나가는데, 또 반장이 소리칩니다.
“아니, 무슨 풀을 그리 베오? 낫질 안 해 봤소?”
“안 해 봤는데요.”
“벌초도 안 해 보았수?”
“예초기로 하는데요.”
반장은 혀를 차며, 몸소 시범을 보입니다. 한 쪽 손으로 풀단을 잡아 들고 밑둥을 싹싹
자르는데 거의 신의 경지입니다.
이제껏 한 손으로만 조선 검객처럼 풀들을 허공에서 베어가던 내 뒤편으로는
허리가 잘린 채 뒤숭숭히 남아 있는 풀들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구박과 조롱을 받으며 부역을 열심히 하는데, 멀리서 또 반장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놀라서 보니, 이번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먼 거리에서도 그 이도 부역에는 초보로 뵈는 얼굴 허연 사람이었습니다.
“나, 오늘 참 죽갔네. 그건 또 뭐하러 들고 나왔수?”
반장의 말에 다가가 보니, 얼굴 허연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얼토당토한 걸 들고 있었습니다.
그건 나뭇가지나 향나무 다듬을 대 쓰는 커다란 전지가위였습니다.
그날, 부역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 마실 때,
한구석에서 그이와 나는 서로 통성명을 하며 시골생활의 설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 부역은 고달픕니다.


물골안에서 이시백
글쓴이 이시백씨는 중학교 교사이며 소설가다.
서울서 생활하다 현재 남양주시 수동면 물골안이란 동네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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