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나의 전원일기

대를 이어 농사짓는 심재욱, 심익보 부자의 미소


오월 초순까지 유난히 많은 비가 내리더니 중순 들자 가물기 시작한다. 가문 날씨야 물이 부족하지 않아 견딜 만하지만 일찍 찾아 온 더위는 농사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더한다. 날씨가 어디 농군 마음에 딱 맞아떨어진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때 이른 더위에 농사일이 즐거울 리 있으랴.
--------------------------------------------------------------------------------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세월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 곳은 유형근 씨가 공인중개사 일을 주로 보고, 이장 심재준 씨가 마을 일을 보는 일종의 합동사무실이다. 마을회관과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하는데, 길가에 있는 옛날 새마을탑에 ‘부동산’이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간판도 없고, 농촌의 구옥을 그대로 쓰고 있어 흙바람 벽이 유난히 눈에 띄는 정겨운 곳이다.
오늘도 일을 마친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청년회장인 심은섭, 청년회 총무 심충섭 그리고 청년회원들인 심재만, 심익보, 심용보 씨 등이 그들이다. 총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40대인 이들은 하루 일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언제나 이곳으로 오면서 너나할 것 없이 소주와 안주거리를 챙겨 들어온다. 술잔이 돌아가면 그들은 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농사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우리집 골목 입구에 사는 심익보 씨의 말이 저녁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비가 좀 왔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불만이라는 것이다. ‘비를 기다리는 이유야 가지 모종을 냈으니 비가 오면 가지가 뿌리를 내리는데 좋아서겠지’ 짐작한 내 생각과 달리, 심익보 씨의 속뜻은 비가 오면 좀 쉴 수도 있을 거란 의미였다. 참 정직하면서도 농민의 고단함이 스민 말이라,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심익보 씨는 오늘 가지 모종을 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모종을 노지로 옮겨 심은 것이다. 물론 가지 농사뿐만 아니라 오이, 배추, 상추, 고추, 파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면서 논농사도 곁들여 짓는다. 밭농사 8000여 평, 논농사 3000여 평을 지으니 중농이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5일장인 양평장에도 고정 가게를 두고 내다 팔며, 서울의 가락시장과 청량리시장에도 출하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농협빚 3000만 원은 갚을 길이 요원하다며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순진함과 현실의 고달픔이 겹쳐온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과 더불어 한 집에 산다.
그의 아버지 심재욱 씨는 세월리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지금은 장남 찬보 씨와 4남 문보 씨 그리고 딸인 선미 씨는 출가했고, 차남인 익보 씨가 아버지를 거들어 농사일을 하며 산다. 대를 이어가며 농사일을 하는 셈인데, 이런 건 세월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재욱 씨는 키가 별로 크지 않다. 반면에 아주 단단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한평생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리라. 밭두렁에서는 밭두렁과 함께, 논두렁에서는 논두렁과 함께 살아온 세월의 모습이 그의 작으면서도 단단한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 분은 언제나 웃으며 살아간다. 이사 와서 얼마 안 돼 아직도 이 마을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서먹서먹한 나에게도 만날 때마다 친절하게 웃으며 맞아 준다. 가끔 우리집 앞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데,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 언제나 오토바이를 멈추고 말을 건넨다. 나무를 심을 때는 나무 이야기를, 수돗가에 있으면 물 이야기를, 잔디를 심고 있으면 잡초 이야기를 하면서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하는 마음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분을 볼 때마다 나는 고향에서 지금도 작은 농사일을 돌보며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 때는 중농을 경영하면서 11남매를 키운 우리 아버지의 작고 단단한 몸맵시나 남을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아내나 자식들에게는 가끔 무섭게도 보였지만 남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실한 농부의 마음이라는 것을 나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집안 식구들에게는 짜증을 내지만 남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코 우연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노동의 고달픔으로 인해 집안 식구들이기에 짜증을 낼 수 있는 것이고, 남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바로 흙에서 배운 마음씨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집안 식구들에게는 고달픔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고 남들에게는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그 정신이 바로 흙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요한 세월리의 밤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심재욱 씨인들 5남매를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있었겠는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도시의 문명 따라 등록금과 물가는 해마다 치솟아 오르고, 가뭄과 수해는 한 해 걸러 돌아오는데 가난한 농부가 어찌 마음 편히 살 길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땅이요, 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한 생각하는 것이다. 땅만한 스승이 없고, 흙만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 고달픈 농사일을 오늘까지 해오면서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얼굴색이 검고 체구는 작지만 이 세상 누구도 지을 수 없는 미소를 심재욱 씨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들 익보 씨가 연신 팔뚝을 걷어올린다. 검게 탄 팔이 굵고 단단하게 보인다. 비가 좀 와서 쉬었으면 하는 말은 농담이라고 강조한다. 비가 온다고 해도 비닐하우스에서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도 좋다. 이른봄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일을 했으면 좀 쉰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으랴.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월리가 아니면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심재욱, 익보 두 부자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미소와 고달픔이 아련하게 배어나는 그 농담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돌아오는 사람들이여,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맑고, 청산의 우거진 수풀도 아름답지만 진실한 농부의 웃음과 농담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할 따름이다. 田

■ 글 이기윤<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나의 전원일기] 대를 이어 농사짓는 심재욱, 심익보 부자의 미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