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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일의 건축일기

명달리 이야기


건축주와 시공사로 만나면 집을 어떻게 지을지, 공사금액은 얼마인지, 어떤 자재를 쓸지 의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공사가 한 참 진행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하는 실랑이가 있고, 입주가 끝나면 서로 남남이 되거나 아니면 친분이 두터워지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달리 두 내외는 만남의 과정이 특수해서인가 몇 번의 만남 속에 건축주와 시공사라기 보다는 인생 선배로서의 매력에 점점 더 끌려 들어간다. 두 내외 모두 의사였다는 신분 때문일까?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묻힌 인생사에 대한 호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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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경인가, 주 5일 근무제 시행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펜션 전원주택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가 있었다. 우리는 유럽형 펜션하우스에 대응한 한국적 황토 민박 모델을 제안했고 이 내용이 각종 일간지에 기사화 된 적이 있었다.

몇 십통의 문의전화를 받던 중 ‘아 -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여기는 양평 서종면 명달린데요, 건물 평수는 약 25평정도 되고요, 5년 전에 지은 집을 부수고 새로 집을 짓고 싶은데 흙집으로 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된다면 찾아 가구요.....”

잠깐을 망설였다. ‘25평 건물을 지으려고 사무실에서 2시간여 걸리는 곳에서 공사를 한다. 일반 관리비도 안 나올텐데......’

그러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뭔가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예, 오세요. 만나 뵙고 정하지요” 하고 말았다.

5년 전 지은 집을 부수고 흙집을 짓고 싶다

안주인이 운전을 하고 두 내외가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안성 죽산 용설리의 마감공사가 한창일 때라 그쪽 현장으로 방문토록 주선했고, 바로 상담이 이어졌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우리가 짓고 있는 목구조 흙집에 대해서 - ‘다 좋은데 나는 이렇게 짓고 싶어요’ 하는 생각을 드러냈다.

우리의 집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고......, 현장을 와서 보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거라고...... 그래서 또 일단은 현장 답사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상담에 지쳐 겨를이 없었고, 언론사들의 취재 요청도 계속되어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시공중인 현장들의 마감공사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약속을 두 번 어기고서야 현장을 방문했을 때..... 5년 전에 지은 사각 통나무(소위 팀버하우스)주택은 외형에서 보기엔 멋져 보였다. 저 집을 헐자고?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가 아닐까.

겸손한 집

기존의 집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이었다. 거실과 주방이 터져 있으며 동남향의 산을 향해 열려 있었고, 거실에서 올라가도록 되어있는 다락방은 천장고도 높고 서재로 활용하기엔 그만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셀 수 있다는 꿈을 충족하기 좋은 집이었다.

두 내외가 주장하는 내용은 두 가지였다.

“집이 그림 같으면 뭘 해요, 겨울에 너무 춥고, 밤에 자는데 ‘딱-딱’ 나무 터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가 있어야지요..... 남들한텐 말도 못했어요, 집 없는 사람도 많은데 성한 집을 부수고 다시 짓겠다니, 남들은 욕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 살면 얼마나 산다고, 버릴 거 다 버리고 내려왔는데...... 욕심 없어요, 그저 편안한 삶터만 있으면....., 내 손으로 농사짓고 산에 다니고.......”

그러면서 바깥 주인장이 손수 그린 밑그림을 내 놓았다. 그것은 예사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다. 옛 집처럼 토방이 있고, 나즈막한 기초에다 창문은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크기며 위치 지정, 그리고 지붕은 초가 지붕을 닮은 모습이었다.

두 내외가 머물 안방과 거실. 주방, 그리고 하나인 자식을 위해 마련한 구석방(구들방)에 재래부엌 같은 아궁이......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울컥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소망이 담긴 집’이었다.

5년 전 처음 전원으로 내려올 때는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팠지만...... 살아보니 노년의 인생을 담는 그릇은 천장이 높지 않아 아늑하고, 마당에서 집에 들어서는 턱이 낮은 집,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집이 그리운 것이다.

‘겸손한 집’

이 분들을 만나며 나는 한국건축의 자긍심에 대해 생각했다. 자연과 이웃에 거스르지 않는 겸손한 집, 바로 한국의 건축미가 아닐까. 밑그림으로부터 시작한 이 집이 완공되는 날 우리는 한국적 조형미가 살아나는 겸손한 현대 흙집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화려함을 부수고 겸손함을 채득한 이 부부에게 진정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드려야 할텐데...... 2002년 2월 25일 드디어 철거작업과 착공에 들어갔다.

의사로서의 영화를 버리고...

건축주와 시공사로 만나면 집을 어떻게 지을지, 공사금액은 얼마인지, 어떤 자재를 쓸지 의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공사가 한 참 진행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하는 실랑이가 있고, 입주가 끝나면 서로 남남이 되거나 아니면 친분이 두터워지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달리 두 내외는 만남의 과정이 특별해서인가 몇 번의 만남 속에 건축주와 시공사라기 보다는 인생 선배로서의 매력에 점점 더 끌려 들어간다. 두 내외 모두 의사였다는 신분 때문일까?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묻힌 인생사에 대한 호기심일까?

바깥양반은 이렇게 말을 한다.

“나도 목수여, 하루종일 다리 부러진 놈 뼈 맞혀주는 것부터 두들기고 꿰어 맞추고...... 정형외과 의사가 목수지 뭐야, 그래서 이곳에 와서는 진짜 목수가 되었지. 여기 있는 책꽂이, 가구, 창문까지 내가 다 만들었지, 판화도 만들고.....”

“내가 의사로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있었지. 일주일에 한 번 자원봉사를 나가던 곳이 있었는데 하루 동안 환자를 한 2백명 쯤 보았을 거야. 자원봉사 의사라고 소홀히 한다는 소릴 들을까 봐 정말 열심히 했어.

하루도 안 빠지고...... 그곳에서 개근상 준다고 했다니까? 이곳에 내려와서도 나갔는데 건강에 자신이 없어 자원봉사를 그만 둔 다음 날, 글쎄...... 벼락이라도 치듯이 한쪽에 풍이 온 거야......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내 몸을 내가 가눌 수 없더라니까.

자원봉사 그만두었다고 벌을 내린 건지.......허.....허.....허, 내 의사 생활동안 가장 신나던 때였는데...... 아무 대가 없이 의사로서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 그거 신나는 일인데......”

“진짜 의사는 이 사람이었어 - 부인을 가르킨다- 피부과였는데, 잘 나갔지. 개인 병원을 연지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어.

환자 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 다 들어 주는 거야. 나는 그저 째고, 맞추고, 꿰매는 일...... 면담은 1~2분에 끝내지, 똑같은 일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 사람은 피부만을 보는 게 아니고 피부병이 생긴 원인을 환자가 이야기하는 속에서 찾아내고, 환자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어 내 스스로의 병 치료를 반쯤은 하게 만드는 거지. 한 30분쯤 면담을 하는 거야. 그 때 알았지. 병은 저렇게 고쳐야 하는 건데...... 왜, 옛말에 심의(心醫)라고 하잖아......”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아직도 일할 나이에 그것도 의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두고 산으로 숨어버렸냐고 묻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했던 두 부부가 ‘똑같은 일의 반복 속에 기계화되고 황폐화 된 자신들의 삶’을 자연 속에 의탁하고 싶었던 열망을...

숨어 지낼(?) 은신처에 집을 지었는데, 의사라는 직업이 그랬던 것처럼 또 처음의 집은 그림 같은 집이었을 것이다. 살아지다 보니 자연에 의탁한 삶의 그릇으로서는 맞지 않았을 것이고 이제야 정말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삶을 위해 그들은 자신이 지었던 집을 부수는 것 일게다......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단오날 새벽 쑥을 뜯는 남자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명달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밝은 달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다. 밝을 명(明)자에 한글로 ‘달’자..... 뭔가 문법상 맞지는 않지만 밝은 달 아닌가, 나중에 들으니 ‘달’자가 다다르다라는 ‘달’(達)자란다. ‘밝음에 다다르는 동네.....’ 이 보다 더 기막힌 이름이 있을까?

두 내외를 보며 동네 이름과 너무도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밝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산으로 찾아든 것일까? 집을 방문했을 때 손 수 키운 고구마로 튀김을 만들어 주셨다. 조촐한 저녁상 뒤로 나온 쑥차는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쑥차라......, 그 향기에 취해 물었다.

안주인이 말을 받는다.

“글세 이 양반이-남편을 가르킨다-올해 단오날 새벽에 뜯은 쑥인데 향도 좋고 뒷맛이 너무도 깔끔해요. 꼭 단오날이 아니라도 그 시기에 쑥을 뜯으면 되는데, 이 양반은 꼭 단오날 새벽에 나가서 해뜨기 전까지 어제 나온 쑥 대공 끝만 따는 거예요. 새벽이슬 머금은 가장 신선한 것으로만요...... 아마 자기 최면일 거예요. 그 날은 꼭 미친 사람 같아요....하하하......”

벙거지 모자 하나 쓰고, 산으로 들로 나가면 그는 자연인이다. 그렇게 이슬 맞고 스러지면 아마도 밝음에 이르려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지.

“집은 땅에 바짝 붙여서 낮게 하고, 기둥도 9자는 높아요, 8자 정도로 야트막한 초가집 같으면 좋겠어요.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창도 낮게 해 주세요”

두 부부는 아마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이미 깨달아 밝음에 도달한 것인지 모른다. 더 높고, 더 화려하고, 욕심부려 자연을 가두려는...... 가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두 내외는 스승이다.田

글쓴이 이동일은 전통 방식의 목구조 황토주택을 전문으로 시공하는 ‘행인흙건축’의 대표다. 이 글은 자사 홈페이지에 ‘이동일의 건축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고 있는 글을 옮겨 실은 것으로, 예비 건축주들과의 상담과 시공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잔잔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행인흙건축’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은 볼 수 있으며 본지에서는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가감없이 이 글을 연재한다.

■행인흙건축(031-335-8133): www.hang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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