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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알밤 지키는 순경 아저씨들


물골안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사람이 자연의 영향을 얼마나 닮게 되는지 놀라곤 합니다.

불과 서울에서 몇 발자국 물러선 곳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도회지의 그것과 대별되는지 문득문득 깨닫게 되지요.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점이 공무원분들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 때만 해도 도회지의 공무원들은 참 마주 대하기 거북한 분들이었지요. 관공서라는 곳에 다녀오면 으레 이맛살이 찌푸려지게 되고 보니, 그 불친절과 권위적인 태도는 자못 동사무소건, 경찰서건 발걸음을 무겁게 하곤 했지요.

그런 선입견을 지니고 있던 나는 물골안에 들어와서 이따금 들른 면사무소나 파출소에서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었지요. 우선 주민등록신고를 하러 들른 면사무소에서 마주 대한 여직원분들의 말씨와 태도가 너무나 여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물어 보려 아무리 눈을 맞추려 해도 서류더미에 눈을 박은 채 고개도 들지 않다간, 겨우 몇 마디 물으면 이 쪽의 이야기는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입 속으로 무어라 재빨리 중얼거리는 사람들. 아니면 아예 손짓으로 이리저리 가리키다간 재차 물어 보면 인상부터 쓰던 도회지 공무원들에 비해 그분들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여유로웠습니다.

이쪽의 말이 끝날 때까지 다 듣고 나서는 직접 일어나 자세한 이야기를 일러 주는 모습은 그 분이 공무원이라기보다 다정한 이웃처럼 느껴졌지요.

이런 친밀감은 면에 하나 있는 파출소도 다를 바가 없지요.
경찰서라는 곳이 세무서와 마찬가지로 쉽게 드나들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이곳의 파출소는 그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시골 파출소 직원이라고 해 봐야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따금 지나다닐 때 보아도 서너 분이 바삐 움직이던데, 한 대뿐인 순찰차로 꼬박꼬박 그 넓은 수동면을 밤늦도록 돌아다니는 걸 몇 번이고 보았지요.

워낙 후미진 골짜기에 외따로 떨어져 지내다 보니 좀 으슥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문틈에 메모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순찰하던 경관이 남기고 간 쪽지였는데, 너무 외진 곳이라 문단속을 제대로 했나 돌아보았다며 혹 급한 환자나 방범상의 문제가 있으면 즉시 연락을 달라며 파출소 전화번호까지 적어 놓고 갔습니다.

그 뒤로도 비탈진 산길을 순찰하는 경찰차를 보곤 했는데 나는 그런 의례적인 순찰을 넘어 외따로 떨어진 집까지 걸어 올라와 주변을 살피고 가는 시골 경관의 세심한 배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테러 폭파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우연히 파출소 경관을 마주친 아내가 ‘요즘 바쁘시지요’ 하고 인사말을 건네니, 밤송이 지키느라고 무척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테러사건으로 뒤집혀졌는데, 무슨 밤송이인가 해서 물었더니, 집 주변에 밤나무를 지닌 분들이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밤을 따 간다며 신고를 해서 그 곳에 나가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골 파출소라도 왜 일이 없겠습니까. 정례적인 순찰도 있고, 시국이 그러하니 비상령도 내려졌을 테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겠지만 그래도 주민의 민원이나 신고가 들어오면 아니 나갈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아마 어느 밤나무 주인이 외지 사람들이 와서 밤을 따 가는 걸 말려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자 파출소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습니다. 도회지 경찰서 같으면 들은 척도 않거나, 그런 일로 전화냐고 투박이나 맞을 일지만 물골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뤄지는 걸 보여 주는 일화이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물골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삶의 방식이었고, 직책이나 일을 넘어서 이 곳의 분들이 서로 끈끈하게 얽혀가며 살아온 생활의 유대감이었지요. 면사무소 직원이건, 우체국 집배원이건 알고 보면 누구네 둘째 아들, 누구네 며느리이고 보면 그분들이 민원인을 대하는 모습이 그리 정겹고 세심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서 익히 보아오던 풍경들. 우리가 이제는 잃어 버렸던, 일과 삶이 하나가 되고, 일터와 집터가 한데 어울리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밤송이를 지키러 출동하는 파출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두 가지 엇갈린 생각에 빠져듭니다. 하나는 일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의 따스한 관계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떨어지는 밤알을 두고 말다툼을 벌여야 하는 사람과 사람의 차가워지는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물골안은 이제 그런 두 갈래의 서로 다른 삶이 마주치며 우리의 올바른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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