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전문가 제언

집을 짓는 사람과 집을 지을 사람들에게


집은 언제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언제나 숨쉬고 있고 공기가 그 안에 머물러 있다가 나가고는 합니다. 성장이 있는지는 다른 눈을 가져야 보이지만 변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집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안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텅 비어 있는 집을 보십시오. 거미나 곤충의 서식처가 되지 윤기가 나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걸인이 머무는 곳을 보면 그 곳에는 음산하고 습기가 차 있고 어둡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이 머물러서 가다듬어져야 하고 먼지로부터 멀리하도록 우리의 집을 보존하고 그런 상태로 유지하는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아왔으며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


다른 집을 볼 때 금장을 둘렀다고 언제나 좋은 집이라고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성급하게 말씀을 드리면 좋은 집은 호화나 화려의 형용사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기대했고 또 기대하는 것처럼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합니다.

기업가의 집, 군주의 거처, 서로 화목하게 조화를 이루는 개인들의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것들을 우리는 보아왔고, 그 안에서 우리는 건축의 개념을 알게 혹은 모르게 익혀왔습니다.
평범한 개인으로서 집의 모습에서 권위와 위엄을 가지려고 하는 다른 집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균제, 균형과 조화가 무엇보다도 우선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라는 것이, 비단 집을 지을 때뿐만 아니라 많은 일의 경우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건축가만의 일?

건축이 건축가만의 일일까 하는 질문은 아마도 누구라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어떠한 형식이던지 간에 하나의 건축물에서 살고 있고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 나름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며 또 그 집을 집으로 만들어 가는 능력이 부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부여되어있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삶을 영위해 가는 근간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에서는 ‘집을 짓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밥을 짓는다’라고 표현할 때 그의 동사가 동일한 단어로 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글을 짓는다’라고도 표현합니다. 더 나아가서 농사조차도 ‘짓는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재료의 다양성만 다를 뿐 그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는 같다는 것입니다.

건축가와 농부, 그리고 시인

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대리석이나 철근 콘크리트를 다루던지 간에 혹은 모종과 토양을 다루던지 아니면 한 단계 높여서 농사의 문제를 다루던지 간에 먼저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형식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종자로서의 모종은 아주 중요합니다. 밥을 짓는 사람에게는 쌀이 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집을 짓는 사람에게 자재가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그가 사용할 단어들이 중요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재료가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인도한다는 인과율은 없습니다.

금칠을 한 집이 언제나 좋은 집이 아닌 것은 밥을 짓는 사람에게 쌀 품종이 중요하다고 하여서 그만 판단을 중지하면 안 되는 것처럼 언제나 정도나 절제를 해야하는 규율과 재료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원칙이 따릅니다.

자원이 모자라거나 자재가 고가치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인이 쓴 시를 생각해 보면 길고 장황하면 시가 되지 못하고 산문이 됩니다. 농부라면 누구나 농사의 문제에 몰두해서 좋은 수확을 거두려고 합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재료를 가지고 주어진 대지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건물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지어진 밥이 좋은 밥인지 알고 판단해서 그렇게 밥을 진 사람에게 칭찬하고 때로는 비평을 가하기도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자신의 농사가 성공적이었는지 아니면 더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반성을 할 것이면 시인은 방금 자신이 지은 시가 인쇄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자신의 손때가 묻은 종이 위의 활자들을 잊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합니다.

건축 행위에 내재된 또 다른 의미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판단 기준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둘 이상의 대상물들을 세우는 행위, 즉 물건들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과를 원하는 것으로 이끌어 주는 원칙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산을 해내는 경험을 통해서 더욱 개선해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이 가져다 주는 판단 기준을 의미합니다.

밥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절차이지만 언제나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훌륭한 밥이 되고 어떤 때는 무미 건조한 밥이 되기도 합니다.

집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짓는 것에는 재료들을 맞추어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때의 법칙, 즉 중력의 법칙을 만족시키고 나더라도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이나 역사를 통해서 형상화해 온 것이 있고 그것은 매 번의 구체화된 집들 하나 하나에서 추출된,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재료를 잘 다룬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구조형식을 잘 갖추었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건축을 그리스어로 ‘Archi-tektonike’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조물을 건축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의 작품이 작품다워지는 것은 단어들의 문법적 나열이 아니고 그것들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집을 지었다’라는 표현이 틀린 이유

다시 건축의 문제로 돌아가면, 건축은 삶을 구체적 현상, 즉 시간에 언제나 지배를 받고 그래서 언제나 변화에 휩싸이는 삶을 일정한 형식으로 굳혀주는 방식이 경험을 통해 정제되고 세련되어지며 그것이 눈에 보이는 구축물이라는 형식으로 현재에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짓는다는 것과 삶을 영위한다는 것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짓는다(bauen)’라는 의미가 집을 짓는 것 이외에도 중세 독일어에서는 ‘내가 있다(bin)’,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내가 집을 ‘짓는다(bauen)’라는 표현과 동일하고 더 나아가 내가 ‘산다(wohnen, wuon-wunian)’라는 표현과 또한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단어 사용은 과거의 경우로 잊혀진 일이라고 하지만 현재에도 어느 부분에는 그 의미가 살아있어서 이웃이라는 말은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옆에서 집을 짓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흔히 ‘집을 지었다’라는 과거형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건축 공사가 끝이 나면 건축가이던 건축주이던 그렇게 표현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기한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언제나 집을 짓고 있어야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집 짓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가치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건축가가 시공자를 통해 건물을 세우고 나면 열쇠뭉치를 전달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서서 훌륭한 실내에 감탄하고 다시 구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곳에는 어떤 가구가 들여져야 하고 커튼은 어떤 색상의 것이 되어야 하는 지 등등부터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건축은 끝나고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건축은 끝맺음을 한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 집을 위해 사용된 재료와 구조물들이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그와 존재를 같이 하고 보존하고 또한 윤기가 나도록 돌보고 가꾸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때의 윤기는 기둥이나 유리의 맑고 투명함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삶의 진실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그 때의 진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흔히 정의합니다.

건축과 우리 삶의 공통점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오히려 삶의 표현이 더 나은 표현인 듯 싶습니다. 집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합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어제의 우리의 모습이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는 벽, 더 이상 땅속으로 내려앉지 않는 바닥 그리고 천장, 이것들은 우리가 뼈와 살을 갖추어야 우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필요한 최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농부의 일은 농사를 짓는 것이고 시인은 시작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집을 짓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집을 짓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것을 여러 경험을 통해 고쳐 나가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좋은 수확을 기대하고, 시를 읽을 때 더할 나위 없는 감흥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집을 지어 갈 때 우리의 감성이 기대하는 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집을 지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이 결국 되어져야하는 가는 시를 이해하거나 농사의 수확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들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과정을 수정하거나 만족해하거나 더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잠시만이라도 그 절정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시인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하려는 이야기를 우리가 전달받게 되는 순간과 같습니다. 그때의 감흥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시적 감흥을 찾으면 우리의 삶은 분명 건축적입니다. 田

■ 글 김영철(독일 베를린 공대 건축과 박사과정, 서양 건축 이론 전공)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전문가 제언] 집을 짓는 사람과 집을 지을 사람들에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