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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골안 사람들1


차로 달리면 서울에서 30분 거리고, 고개만 넘으면 차로 가득 찬 경춘국도가 있는 곳인데도 수동은 참 묘한 곳입니다. 마치터널을 넘어서면 맑던 저 편의 하늘이 금세 안개나 이슬비에 덮여 있기도 하고, 차창을 열면 대번에 바람 냄새가 다릅니다.
그런데 마석에서 가곡리 고개를 넘어 오면, 이것은 단지 눈에 뵈는 자연 풍경뿐만이 아니라 일시에 타임머신을 탄 듯, 나는 60년대 정도로 돌아가 있는 듯합니다.

800여 미터의 천마산, 철마산, 주금산, 축령산으로 둘러싸여 움푹 파여 들어간 분지형의 수동은 아직까지 불편한 도로와 교통사정으로 예전의 모습을 그런 대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에는 노래방도 있고, 피자집도 있고, 카페도 있지만, 수동이란 곳이 워낙 물골이 많고, 그렇게 가지를 치고 들어선 수십 개의 숨겨진 골짜기들과 그곳에 대를 잇고 살아오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성격도 고개 넘어 마석과는 차이가 큽니다. 우선 사람들이 느릿느릿하고, 웬간한 일로는 변화가 없는 무표정한 얼굴.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지던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 사실 오래 전 우리들이 지녔던 그 때의 표정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늑장을 부려도 뒷사람에게 밀려나는 요즘의 도시생활에서 늘 시간에 쫓기듯 아둥바둥대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물골 사람들의 표정은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가게에 들어가도 ‘어서 오라’는 말 한마디 없고, 물건을 사고 나와도 ‘잘 가라’는 말 역시 없다. 마주친 차에게 양보를 해 주어도 꾸벅 고개 숙이는 일없이 덤덤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나친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분개도 해보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니꺼, 내꺼 살벌하게 따지지 않고,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짓다가도 어쩌다 발등이라도 밟을라치면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도시사람들의 그 냉혹한 이해타산에서 한 발 비켜선 이들이 지닌 여유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급한 바람에 새치기를 해도, 여기 사람들은 불을 번쩍거리거나, 경적을 울려대지 않았다. 아마 무슨 바쁜 사정이 있나 보다 여기는 정도다.

고개 하나만 넘어도 용납되지 않을 일들이 이곳에서는 대체로 말 한 마디 없이 잘 넘어갔다. 돈이 모자란다고 하니 설계비도 깎아주는 사무소 사람들과, 세금도 싸게 감면해 주려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 주는 공무원들과,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지내는 철물점과 설비상회, 기름가게 주인들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우리와 담장을 붙이고 살던 바로 그 이웃들이었음에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되었으며, 그래서 낯설고 생경하게만 느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지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 골짜기에서 그런 대로 중국집도 하고, 비디오가게도 하고, 슈퍼도 하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장사가 되나 했더니, 이곳은 거의가 대를 이어 지내온 한집안 식구들이나 마찬가지이고 보니, 가게를 가도 오로지 그곳만 가고, 철물점은 중국집에서 짜장면 팔아주고, 중국집은 그 철물점에서 문고리를 살며, 살아오는 것입니다.

고개만 넘으면 대형 할인매장도 생기고, 시간마다 할인점 버스도 드나들지만 여전히 그런 가게들이 문을 닫지 않고 장사를 해 나가는 걸 보면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몇 푼 돈의 무게보다 오랫동안 그들이 이어온 안면의 온기를 더 무겁게 여기는가 봅니다.

이런 안면의 무게는 사실 처음 들어선 외지인에게는 다소 무겁고, 차갑게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더욱이 식당이나 가게를 처음 하려는 외지인들은 몇 달 안 가 기겁을 하고 문을 닫고 말지요. 목욕탕도 하나이고 보니, 이 골짜기 사람들은 죄다 거기서 만나게 됩니다.

언제 볼까 싶어 이 땅, 저 땅 구경만 잔뜩 하고,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헤어졌던 부동산 주인을 나는 거기서 만났고, 깜박이 켜지 않고 끼어 든다고 전조등을 번쩍이며 경적을 올렸던 중국집 배달원도 거기서 만났습니다.

적어도 이 골짜기에서는 언제 다시 보겠느냐는 배짱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치게도 되고. 얼굴이라도 붉히며 말다툼을 했던 이도 목욕탕 안에서 서로 등을 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나는 요즘 절대 이 골짜기에서는 경적을 울리지 않습니다. 새치기를 해도 ‘아마 바쁜 일이 있나 보다’ ‘누가 갑자기 병이라도 난 걸까’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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