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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기획Ⅲ

유웅천의 시골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


이런 저런 시골생활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노라면 어느새 시골에 가 있는 기분이다. 시골생활의 재미와 이모저모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이 같은 수기는 예비 전원생활자들에겐 적잖은 길잡이 역할도 하게 된다. 시골 생활의 경험이 없는 도시인이라면 설레임으로 다가올 것이고, 경험이 있는 사람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올 것이다. 본지는 시골생활의 단면이 진솔하게 배어 있는 유웅천씨의 전원 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를 창간 2주년 기획으로 싣는다. 유웅천씨는 40대 초반으로 현재 방송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주 근처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 글은 본지 홈페이지(http://www.countryhome.co.kr) 게시판에 실린 것을 정리한 것으로 필자의 느낌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내용은 물론 문장이나 문체의 손질없이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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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전원 주택을 짓고 시골행을 준비할 때부터 글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집을 짓는 과정이며 시골행에 대한 준비 과정 등을 모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땐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2년을 산 뒤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돌아오면서 그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안타깝기도 했다. 2년간의 시골생활에서 내게 남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골에 사는 2년 동안 정말 농부처럼 일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었다. 이북에서 월남한 후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제대 후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집을 남겨놓고 다시 돌아오는 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가꿔 놓은 집을 두고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억울했다. 이렇게 떠날 것을 .......

사랑스런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 역시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과묵함에 이사를 한다는 설렘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시골생활은 끝이 났다.

도시로 돌아온 후 나는 시골생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골 생활을 화제로 삼는 것도 꺼렸다. 한번 실패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나보다 더 힘들어했던 아내와 아들 때문이었다. 시골 생활은 아픔으로만 남아 있었다.

한 두해가 지나면서 다시 시골 생활이 그리워졌다. 밤이면 시골집을 뛰어다니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시 시골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감추려고 애썼는데.......

팔려고 내놓은 시골의 전원 주택은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 아내는 나의 이런 생활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모한 첫 번째의 시골행이 가져다 준 고통에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번에도 내 편이 돼 주었다. 대신 첫번째와는 달리 아내가 원할 때까지 온 가족이 이사를 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아이도 좀 더 커야 하고 시골 집 주변의 생활여건도 개선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분명히 했다.

다시 시골로 이사를 가려면 한 십여 년은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가족 모두가 다시 이사를 가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시골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기뻤다. 이제 주말이면 나는 다시 시골에 가 잔디를 깎고 페인트를 칠하고 마당을 쓴다.

이번에는 시골생활이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 가서 집짓고 2년을 살지 않았던가 말이 2년이지, 정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른다. 그때도 살았는데.......

시행 착오 경험도 있도 또 완전히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다소 여유도 있고. 다시 시골로 돌아 가겠단느 생각을 굳힌 후 난 전원 생활과 관련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잊기 전에 기록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자칫 허공으로 날아갈 뻔했던 2년을 되찾게 됐다는 기쁨도 그런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또 전원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어쩌면 다시 시작하려는 시골 생활에 새로운 기쁨이 되지 않을까

덮치기로 정말 새가 잡히네

아내와 아들 웅천이가 몸을 숨기고 거실 창을 통해 흰 눈이 하얗게 쌓인 집 앞 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덮치기에 새가 집힐 것인가를 반신반의하면서. 잠시후 ‘탁,소리와 함께 새들이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아내와 아들이 거실문을 박차고 신도 채 신지 않은 채 앞 논으로 튀어 나갔다.

덮치기에 잡혀 있는 새를 집어 든 아들의 두 손이 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개선 장군이 따로 없었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함께 덮치기로 새를 잡았다는 놀라움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아니 이런 덮치기로 새가 잡히다니. 그날 하루 우리는 열마리 가까운 새를 잡았다.

아내와 웅천이는 당초 덮치기로 새를 잡을 수 있다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둘의 놀라움과 기쁨은 더 컸을 것이다. 그날은 정말 엄청나게 눈이 내렸다. 30센티미터 가까운 폭설이었다.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많은 눈이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새를 잡아주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덮치기를 이용해 새를 잡는 것은 겨울철 가장 신나는 놀이였다. 덮치기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부러지지 않고 잘 휘는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를 활처럼 구부린 다음 칡을 이용해 그물망을 뜬다. 나중에 새를 덮치는 그물망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예쁘게 뜨는 방법이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나중에 새가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겨울이지만 집 뒷산에는 그물을 뜨기에 적합한 칡이 많았다.

다음은 볏짚을 이용해 매트를 만든다. 그물망이 덮쳤을 때 새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평평하게만 만들면 된다. 그런 다음 제법 굵은 나무로 튼튼한 활대를 만들고 이 활대에 탄력성이 있는 굵은 고무 밧줄을 묶는다. 고무 맛줄을 두 어 번 회전시킨 후 그물망을 끼우고 볏집을 연결하면 그물망은 펑펑 소리를 낼 정도로 볏집에 밀착이 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그물망에 벼이삭이나 수수 등을 매단 뒤 나무 걸쇠를 만들면 덮치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새가 벼이삭이나 수수를 부리로 쪼면 걸쇠가 풀리면서 그물망이 새를 덮치게 되는 것이다. 2십여 년만에 만들어 보는 데도 덮치기 만드는 방법은 모두 기억이 났다.

아내와 아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너무나 즐거운 하루였다. 아들 만한 나이였을 때 친구들과 새를 잡기 위해 들이고 산이고 뛰어 다니던 생각이 났다. 아들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하나 만든 표정이었다. 게다가 덮치기를 만들어 사실상 맨 손으로 새를 잡은 아빠에 대한 경외감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들은 지금도 겨울에 눈만 내리면 덮치기 얘기를 하곤 한다. 정말 신기하고 놀라왔다고, 또 아빠가 덮치기를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시골에 살면 아내와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빠, 그리고 큰소리칠 수 있는 아빠가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번개

휴, 정말 번개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밤하늘을 가장 높은 곳에서 서쪽 하늘까지 반으로 쩍 가르면서 내리치는 섬광.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울부짖는 천둥소리...

피할 곳 하나 없는 벌판에 하늘을 보고 알몸으로 누워 그 번개와 천둥을 온 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공포.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아 많이 경험했지만 번개와 천둥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는 정말 알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은 나보다도 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벗어나서 시내 여관으로 달려가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 난리에 차를 타고 간다고? 혹시 자동차에 번개라도 내리치면....... 어떡할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쩐담.......

그때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불빛이 거실의 유치창을 내려치고 곧이어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꽈 꽝........ 도대체 이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온 동네가 정전이 돼 암흑으로 변하고 말았다.

정말로 기절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집 앞 전신주의 변압기가 번개에 맞은 것이었다. 아니 번개가 집 앞에 떨어지다니, 다음에는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혹시 우리집에.....끔찍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날 밤과 새벽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한전에서 나와 전신주의 변압기를 수리하고 그 곳에 피뢰침을 달았다. 지금도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그날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런데도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아무도 없는 허허 벌판에 알몸으로 하늘을 보고 누워 온 몸으로 번개를 맞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삼겹살과 돌부리

시골 생활의 큰 호사 가운데 한가지는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숯에 석쇠를 올려놓고 구워 먹는 삼겹살의 맛은 압권이다. 일반 후라이팬에 구운 삽겹살은 기름이 지글지글해 다소 느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참숯에 석쇠 등을 올려놓고 기름이 모두 빠지게 구운 삼겹살은 정말 고소하다.

참숯에 굽는 삼겹살은 다소 두껍게 쓸어야 한다. 너무 얇게 쓸면 화력이 좋은 숯불에 모두 녹아버리거나 볼품없게 되기 쉽다. 숯불에 구워 먹는 삼겹살은 비갯살이 많은 것이 오히려 좋다. 그래야 더욱 쫄깃쫄깃하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동네사람들이 돈을 모아 돼지를 산 뒤 이를 잡아 집집마다 고기를 나눠 먹는 경우가 많다. 시골 사람들은 이를 돌부리라고 한다. 보통은 명절을 전후해서 많이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시골사람들의 경제적인 사정이 좋아진데다 농민들은 일반 정육점에서 사먹는 고기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서너 사람이 뜻을 모아 돼지를 잡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돌부리로 잡는 돼지고기는 정육점 고기보다도 최소한 두세배는 맛이 있다. 그냥도 맛있는 돌부리 고기를 숯불로 구워 먹는 맛이란 .......

돼지 돌부리를 하는 날은 마을의 잔칫날이다. 돼지를 잡는데 돈을 내지 않았더라도 모든 동네 사람들이 총출동한다. 돼지 내장을 갈라 끓는 물에 먼저 데쳐 먹고 간이나 돼지 머리는 가마솥에 삶아 소금이나 된장을 찍어 막걸리나 소주 안주로 삼는다. 돌부리 생각만 하면 이웃 집 형의 일화를 잊을 수 없다.

옆집 전원 주택에 전세를 살던 그 형은 서울 출신이었는데 그동안 시골 생활 경험이 없었다. 하루는 이 형과 돼지를 잡는 돌부리 현장에 갔는데 여기서 일이 생긴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동네 사람이 이 형에게 돼지 생간을 날 것으로 먹기를 권한 것이다.

사람 좋은 이 형은 평소 안면이 별로 없는 동네 사람이 권하자 이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돼지 생간을 받아 먹고 말았다.

옆집형은 한 번도 돼지 생간을 날 것으로 먹어 보지 못한 것은 물론 돼지고기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돼지 생간을 받아먹는 그 형의 표정은 정말로 쳐다 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씹지도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꿀꺽 돼지 생간을 삼켜 버렸다. 안쓰럽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중에 그 형은 집을 돌아가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고 했다.

시골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어디 이뿐이랴 정말 식당이나 실내에서 구운 기름이 줄줄 흐르는 삼겹살은 삼겹살도 아니다. 참숯에 구워 기름이 모두 빠진 노릇노릇한 삼겹살을 잔디밭에 돗자리에 깔고 먹는 그 맛, 아 정말 잊을 수 가 없다.

겨울 나기

겨울 나기 시골 생활에서 가장 힘든 계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겨울이다. 무엇보다도 시골의 겨울은 너무나 춥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겨울 바람은 정말이지 몸 깊숙이 추위를 느끼게 한다.

시골의 황량함도 도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푸른 잎이 모두 떨어진 들판은 보기만 해도 스산함이 느껴진다. 우리 가족도 마찬 가지였지만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시골 생활에서 가장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겨울 때문일 것이다.

벽난로에서 방금 꺼낸 군고구마를 먹으며 거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풍경, 겨울 추위는 이런 낭만을 날려 버리기 일쑤다. 벽난로가 있어도 연통이 짧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실내에 연기가 차는 경우가 많고 일일이 나무를 챙겨 불을 지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전기 난로가 있고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시골의 겨울은 언제나 춥기만 하다

다시 시골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지금도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은 겨울 추위다 그만큼 겨울은 시골에서 상대하기 힘든 상대인 것이다. 겨울이 임박한 12월이면 나무도 월동준비가 필요하다. 가능하면 좀 다른 나무를 심고자 했던 내 욕심으로 우리 시골집 정원에는 추위에 약한 나무가 많았다. 석류나무와 단감나무, 매실 등등...

첫 겨울에는 앞 논에 있던 짚을 얻어다가 나무의 겨울옷을 입혀 주었다. 아마 나무들이 몹시 추웠을 것이다 숭숭 짚 사이로 나무들은 속살을 그대로 내보였다 겨울의 칼바람은 그 속을 헤집고 다녔다.

사실 짚으로 나무를 싸 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나무가 곧고 가지가 없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꼼꼼히 나무를 싸 주기란 쉽지 않았다 보기도 솜씨 없는 엄마가 묶어준 여자아이의 뒷머리만큼이나 흉하다.....

시골 생활을 다시 결심한 올해는 나무들에게 짚으로 만든 새끼 옷을 입혀 줬다, 이제는 새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철물점에서 새끼 두루마리를 발견했을 때 너무나 기뻤다. 6천 원을 주고 산 새끼 한 두루마리는 십 여 그루 나무를 모두 매어 주고도 남았다. 새끼로 묶어 준 겨울 나무는 너무나 보기 좋았다.

스타킹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중학교 신입생 같았다. 또 바람이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겨울 바람이 차다고 해도 두터운 겨울옷을 챙겨 입은 나무들이 든든해 보였다.

이제 나무들은 이 겨울을 잘 이겨낼 것이다. 내년 봄이면 다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겠지 시골의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봄에 대한 이런 기대 때문이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무들은 푸른 옷으로 또 갈아입을 것이다. 시골의 봄이 더 좋은 것도 추운 겨울이 있어서 일게다.

진돗개

진돗개 나는 진돗개 매니아다.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의 진돗개 사이트를 검색한다. 특히 나는 백구가 좋다. 한 컴퓨터 광고에서 백구 진돗개가 등장한 후 백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백구가 주는 고귀한 느낌에 사람과의 친근감이 더해져 더욱 마음에 든다.

내가 처음 진돗개를 기른 것은 시골 생활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보안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산과 경계를 이룬 집의 특성상 산짐승을 위협하기 위한 개가 필요했다.

첫 강아지는 황구였다. 청주 시내에 있는 한 애견 가게에서 20만원인가를 주고 샀지만 나와 별로 인연이 없었나 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개여서 백구와 교환했다..

진돗개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정말 진돗개만큼 순종 시비가 뜨거운 동물도 없을 것이다. 한국 진돗개 협회와 한국 애견 협회 한국 애완동물 보호협회 거기다가 국견협회에 한국 진돗개 연구회까지, 협회와 동호회가 많아서 안될 것도 없지만, 문제는 각 협회별로 주장하는 진돗개 순종의 모습이 다르다는 데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진도산 진돗개에 대한 평가다. 일부 협회가 진도산 진돗개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반면 일부 협회는 잘 다듬어진 개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진돗개 연구회와 애완동물 보호협회의 회원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협회의 개보다는 진도산 진돗개를 좋아한다.

내가 진도산 진돗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육지와 비교적 왕래가 많지 않았던 그 옛날 진도가 가장 한국적인 개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결국 내가 좋아하는 개는 진도지역의 개가 아니라 한국 고유의 개인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범띠는 개를 잘 기르지 못한다고 한다. 개가 잘 죽는다고도 하고, 어렸을 적 범띠인 나의 어머니도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렇지만 범띠인 나는 진돗개가 너무나 좋다. 나는 처음 황구 진돗개를 기른 뒤 다음은 풍산개 그리고 다음은 황구와 백구를 한꺼번에 길렀다.

2년의 시골 생활을 끝내고 도시로 다시 돌아와 사는 지금은 처갓집에 백두라는 이름의 진돗개 백구 한 마리를 위탁해 기르고 있다. 그러나 1년에 서너 번 밖에 처갓집을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백두와 거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진돗개도 6개월 이상 묶어만 놓으면 이른바 똥개가 되는 법인데.....당분간 시골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형편 때문에 너무나 안따깝다.

내가 진돗개에 대해 관심을 가진 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동안 내가 알던 진돗개가 진도에 있는 진돗개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무섭기만 한 것으로 생각했던 진돗개, 머리가 크고 목이 굵은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진돗개, 당당한 어깨와 우람한 체격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돗개,,,,,,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진돗개는 진짜 진돗개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진돗개는 개의 종류상 사냥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구리 사냥개인 것이다. 날렵한 들짐승을 잡아야 하는 사냥개가 어떻게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고 우람한 체격일수 있단 말인가. 무거운 몸으론 5분만 달리면 너구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을 추단하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퇴근길에서 돌아 왔을 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던 진돗개, 나는 진돗개가 너무나 좋다..

경이로운 작업, 페인트칠

페인트칠 페인트칠이 정말 재미있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된 것도 시골 생활을 통해 얻은 큰 수확이다. 사실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 데 숙맥인 내가 페인트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집을 처음 지을 때는 전문 업자가 페인트칠을 했다. 그러나 내가 지은 목조 주택에는 페인트칠이 필요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내가 처음으로 페인트칠을 한 것은 나무로 만든 담이었다. 벌목업을 하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낙엽송을 한 트럭 사서 만든 말목 모양의 나무담은 그냥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비에 젖어 썩는 것을 막기에는 페인트칠이 필요했다.

휘발성이 좋은 시너를 희석하면 페인트칠을 하기에 편했다. 그러나 자칫 페인트의 색깔이 지나치게 얇아져 방수효과가 떨어지고 보기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페인트가 많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도 페인트를 희석시키지 않았다.

페인트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나무로 만든 데크 때문이다. 시골 생활을 처음 청산한 후 2년 동안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난 그때 그 집을 잊기 위해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2년 동안 페인트가 벗겨진 데크는 망가져 있었다.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스며들어간 빗물은 나무 마루를 안쪽에서부터 썩게 만들었다. 손으로 누르기만 해도 나무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페인트만 제대로 칠해 놓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목조 주택에는 목조용 페인트를 써야 한다. 스테인 계통의 페인트가 제 격이다. 일반 페인트 가게에서 목조 전용 페인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통해 전문업체를 찾아 페인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목조 전용 페인트는 일반 페인트보다 값이 다소 비쌌다. 나는 2년에 한 번씩 페인트칠을 했다.

전문 업자에게 맡긴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했다. 건설업과 인테리어 일을 했던 처남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비용도 전문업자에게 맡길 경우 3십평 기준으로 족히 2-3백은 충분히 넘는다.

그러나 처남들의 도움으로 페인트 값만으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요일을 이용해 시골집을 찾아 온 처남들과 하루 온 종일을 일을 한 뒤에야 페인트칠을 끝낼 수 있었다.

고개며 다리며 팔이며 정말 안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옷은 물론 얼굴과 안경알에도 페인트 자국이 뒤범벅이 돼 있었다. 얼굴에 묻은 페인트를 지우는 일은 고통스럽다. 특히 눈 윗 부분에 묻은 페인트를 지우기란......시너를 묻혀 지우기도 하고 집 식구의 매니큐어 지우는 약을 쓰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인트칠만큼 경이로운 작업도 없다. 보기 흉하고 남루했던 것도 페인트칠 한 두 번이면 정말 새것으로 변한다. 그러나 나뭇결까지 보이는 스테인류의 페인트가 아닌 일반 페인트는 조심해야 한다.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페인트 색에 가려 나무가 썩어 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쉽다.

페인트칠을 마친 뒤 담배 한 모금을 빠는 낭만 , 자기 집을 돌보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 좋은 여유이다.

벌에 쏘이다

벌에 쏘이다. 아내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 시골 출신이잖아.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그까짓 벌에 쏘였다고 엄살은.......” 그러나 나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땅이 흔들려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속도 메스꺼워 지는 것 같고 머리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정말 왜 이러지. 전에 벌에 쏘였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뒤 좌석에 나를 태우고 차로 2십여 분쯤 걸리는 시내 병원으로 운전을 하면서 아내는 계속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제는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열도 오르고 있었다. 몸에 마비 증세도 나타나고 있었다. 갑자기 알콜 농도 50%이상의 독주를 먹은 것 같은 뜨거움이 두 눈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나를 돌아보던 아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하고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중앙선을 넘어 달리는 가 하면 교차로에서도 서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침착하고 신중하던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자 더 큰 불안감이 몰려 왔다. 게다가 호흡까지 가빠졌다.

‘내가 정말 벌에 물려 죽는단 말인가......’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해독제 주사를 맞은 후 다행히 40도를 넘나들던 열이 내렸다. 의사는 장기에까지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부어 호흡 곤란 증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정말 40 가까이 살면서 링거를 맞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물린 벌은 침에 가장 독성이 강한 말벌이었다. 네 방을 쏘였는데도 일년 중 가장 독이 강한 때라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마철동안 풀을 까지 않았더니 집과 인접한 뒷산에는 잡초가 너무나 우거져 있었다. 게다가 풀과 작은 나무들이 뿌리 채 죽어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가능하면 나는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덕분에 뒷산에 심은 주목은 잡초에 포위돼 숨쉬기조차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일요일을 이용해 이 잡초를 제거하려다 벌에 쏘인 것이다. 아마도 말벌들은 자신들의 집을 낫으로 치고 들어오는 이방인의 침입에 온몸을 던져 저항한 것이리라.

설마 하고 아무런 대비 없이 풀베기 작업에 나선 나의 잘못도 컸다. 땅 속에 집을 만드는 말벌은 주로 여름을 전후해 나타나기 시작해 그 곳에 벌집이 있는 것을 모른 것도 한 원인이 됐다.

하기야 벌침은 일부러도 맞는다고도 하니 지금 생각하면 벌에 쏘인 것이 몸에 큰 보약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 그 일이 있은 후 이른봄이면 혹시 벌이 뒷산이나 집 벽체에 집을 짓지 않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연례행사가 됐다.

마을 소풍

마을 어귀의 확성기가 이른 새벽부터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에, 에, 반장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마을 야유회를 가는 날입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아침 8시까지 마을 앞 주차장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휴일이지만 출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난 아내의 눈에는 졸음기가 다 가시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야유회였다.

그러나 말이 야유회지 사실은 횟집으로 생선회를 먹으로 가는 것이었다. 횟집에서 보내온 소형 버스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태운 뒤 대청호 인근의 이름난 매운탕 마을인 ‘어부동’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송어와 향어 비빔회였다. 술 몇 순배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갔다. 바닥을 드러낸 소주병들이 곳곳에서 널부러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바로, 술을 먹기 위한 어른들의 소풍날인 것이다. 평소 술을 크게 즐기지 않는 나는 물론 아내도 부담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소풍 놀이는 그때부터였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동네 어른들이 마침내 노래방 반주기를 부른 것이었다.

“사장님, 여기 노래방 좀 틀어 줘!” 우리는 마을 15가구 주민 가운데 유일한 30대 부부였다. 마을 지도자 아저씨부부가 50대일 거고, 반장님 부부가 60대.......나보다 3살 먹은 형이 있지만 노총각이라서 야유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 흘러간 옛 노래 정말 원없이 들었다. 추억의 ‘갑돌이와 갑순이.에 맞춰 어깨춤도 추고 아버지 나이 또래의 마을 어른들과 어깨를 마주 잡고 ‘미아리 눈물 고개,....... 로 시작되는 노래도 목이 터지라 합창을 하고, 재롱 떠느라고 아내와 듀엣으로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란 노래도 부르고........반장님이 시켜서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뽀뽀도 했다. 제일 젊으니까 대표로 해야 한다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평소 점잖키로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 내가 아니었던가 아침부터 시작된 야유회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술로 일심이 된 것이다.

술자리는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가능하면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고자 했던 나로서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우리 부부는 바로 잠에 골아 떨어졌다. 술도 채고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순박한 마을 어른들이랑 보낸 하루가 싫지만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난 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반장아저씨와 마을 어른들이 우리 부부를 칭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세대 차가 많이 나서 재미없었을 텐데, 젊은 부부가 잘 어울려 주어서 고맙다”고........

한달 간의 호텔 생활

공사가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었다. 이사 날짜가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건축이 마무리되는 시기를 두번 세번 확인하고 그리고도 미덥지 못해 한 달이나 이사 시기를 여유있게 잡았는데...... 어찌할 것인가.

공사비를 선 지급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공사가 늦어지다니. 빠듯한 자금에 내 집 말고도 다른 집을 두 채 더 짓는다고 하더니 혹시 내가 지불한 공사비가 그 곳으로.......

당초 팔려고 하던 아파트도 매매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전세를 주지 않았던가. 초등학교 일 학년인 아들도 이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걱정 속에서도 이삿날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말았다.

이삿짐 센터 보관 창고에 세간살이를 맡긴 후 필요한 옷가지 등을 챙기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호텔에서 살았다. 값이 싼 여관에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상일 다 안다고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식구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나는 헛똑똑이였다. 건축과 관련해서 아무런 경험도 없고 막상 일을 시작해 놓고 보니 집짓는 일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라고, 아무리 변명을 하려 해도 내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저녁이면 세탁소에서 입을 옷을 챙기고 아침이면 아들을 차에 태워 학교로 등교시켰다. 그다음 아내를 집짓는 공사 현장에 데려다 주고 다시 차로 30분을 달려 출근해야 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쉴 곳도 없는 그 곳에서, 공사 인부들과 지내면서 내가 퇴근 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도 한 달 동안이나......

그때 팔지 못하고 전세를 주었던 아파트로 다시 돌아와 또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나도 정말 어지간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어제는 퇴근길에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던 아내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한 달간의 호텔 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지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또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집짓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경고로, 최악의 사태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어려웠던 그 시절, 나는, 아내와 아들이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가슴 속 깊이 새겼다.

나는 팔방미인 집수리공?

나도 내가 집수리와 집가꾸기에 이렇게 재주(?)가 많은 줄은 정말 몰랐다. 또 집을 수리하고 가꾸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김포공항의 그 우중충한 회색빛에 절망해 시골행을 감행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내가 시골살이를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도 많았다.

언젠가 말했지만 나는 정말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데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어렸을 적은 물론이고 결혼해서도 나는 전구하나도 제대로 갈아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하셨고 결혼후에는 아내가 대신했다. 어렸을 적 라디오도 내 손만 가면 고장이 나고 커서는 벽에 못하나만 박고 나도 잘못 휘둘러 손에 피멍이 맺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자격증만 없을 뿐 자칭 전문 집수리공(?)이다.

전등을 갈아 끼우는 일은 이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정원의 가로등도 통나무를 이용해 내가 직접 만들었고 데크앞 마당에 위치한 수돗가도 내손으로 설치했다. 지붕위의 실리콘 작업은 물론이고 페인트칠도 자신있다. 발목굵기만 한 낙엽송을 사들여 말목처럼 만든 집 주변 나무담도 내손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온돌마루의 기름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수도관도 교체해보고 정원과 현관입구에 돌다리도 깔았다. 나무만 구입했을 뿐 업자를 사지 않고 정원 공사를 벌여 조경을 위해 심은 나무 하나 하나 내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집 주변 광산에서 산 정원석도 동네 형들과 함께 경운기로 옮겨 마당 한켠에 세워 놓았다.

목재를 구하다가 진도개집도 두 채나 만들고 송판과 널판지를 이용해 문패도 만들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직접 이름을 써넣었다. 그러는사이 내 손 마디마디 굳은살이 보기 좋게 생겼다. 초등학교 시설 3년여간 배구 선수 생활을 해서 가뜩이나 투박했던 손이 그때 정말 볼만했었다.

정말 몰랐다. 내 손으로 내 집을 가꾸는 일이 이렇게 신나는 일인 줄은....... 목욕을 하듯 땀으로 흠뻑 젖은 작업복을 벗고 얼음물처럼 차가운 지하수로 샤워를 하면서 느끼는 상쾌함, 정말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어느덧 3월, 벌써부터 집을 가꾸며 땀으로 범벅이 될 모습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올 봄에는 집 입구에 이팝나무를 심고, 정원에는 쪽동백이나 떼죽나무를 심어야지.

잔디깍기도 새로 구입하고 집 뒤 작은 텃밭에는 비교적 재배가 쉬운 열무와 고추 그리고 옥수수를 심어야지. 또 4월쯤에는 처남들과 함께 집 안팎의 페인트칠을 해야지......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할까?

마을 공동 작업

어렸을 적 고향 시골에서는 마을 공동 작업이 참으로 많았다. 그때는 이를 부역이라고 불렀는데,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천이나 도로등을 정비하거나 하수도를 설치하곤 했다. 마음씨 좋은 둘째형이 “또 내가 나가야지”하며 작업복을 입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80년대 이후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줄면서 이 마을 공동 작업은 치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또 유급화되었다. 시골에 집을 짓고 2년간의 시골 생활을 하는 동안 빼놓을 수 없는 기억 가운데 하나가 이 마을 공동 작업이다. 우리 마을의 공동 작업은 주로 마을 진입로 가꾸기였다.

요즘 같은 이른봄에는 지난해 자랐던 잡초를 제거하고 명절을 전후해서는 출향인사들을 맞기 위해 대청소를 하곤 했다. 그때 심은 왕자두나무가 아마 올해는 과실을 맺을텐데......

마을 15가구가 나무 7-8그루씩 왕자두를 수확해 갖기로 했는데 지금도 유효할까? 도시로 이사를 나왔지만 맘씨좋은 동네 어른들이 나도 인정해 줄 것 같긴 한데.......

시골출신이지만 농사를 짓지 않아 낫질이 서툴렀던 나는 동네 아저씨들이 깍은 잡초를 치우는 일을 주로 했었다. 낡은 와이셔츠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땀을 흘린 뒤 동네 아저씨들이랑 마셨던 그 막걸리 맛, 술을 별로 즐기진 않지만 그 막걸리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2만원을 내놓으며 자기가 번 돈이라며 자랑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 날은 면사무소에서 돈이 조금 나와 마을 공동 작업에 나선 아줌마들과 함께 나눠 가졌단다.

다음달 면 소재지에 있는 닭집에서 토종닭을 사서 백숙을 끓여 먹었다. 남편 몸 보신시켜 주겠다는 아내의 배려 덕으로....... 도시로 이사를 한 후 내가 좋아하는 인순이형이 마을 반장이 되었다. 형이 부르면 올해는 나도 마을 공동 작업에 같이 나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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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웅천의 시골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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