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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들깨가 눈이 달렸다니


농사짓는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전 들깨 냄새가 참 좋습니다. 가을볕이 바작바작해질 무렵, 해 저문 들녘이 자꾸 휑하니 비워져 가면 여름내 푸른 잎을 달고 있던 들깨들이 여물어 갑니다. 가을 늦은 들판에서 깨 터는 모습은 우선 냄새로 다가옵니다.

그 향긋한 내음을 코로 들이키노라면 정말 전원의 풍요로움이 폐부 깊숙이 스며듭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부근에 깨밭이 있었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분이 텃밭에 심은 것인데, 참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자 그 밭 한 모퉁이에 세워졌던 외등이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전구가 나간 줄 알았는데, 일부러 켜지 않는다는군요. 이유를 물으니, 깨가 밝으면 여물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깨가 잘 여물도록 그즈음 일부러 외등을 꺼 놓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 무언가 자연에 변화와 부작용을 남기는 법이겠지만, 그 겨자씨만한 깨알들에게도 하늘이 정한 하루의 때와 일정한 휴식의 어둠이 예비되어 있다는 걸 알고 새삼 경외롭기만 했습니다.

양계장에서 달걀을 거두기 위해 밤낮으로 켜 놓은 전등 빛 때문에 양계장 닭들은 수명이 고작 5~6개월밖에 못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문명을 이루고, 때로는 그 문명이 인간다움이라는 미명 하에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지만, 막상 그 욕심을 버리고 나면 자연인일 뿐입니다. 양수리 부근에 연밭이 있는데, 거기서 연꽃을 따는 아가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참 그림 같은 풍경이더군요.

짙푸른 물 위로 배를 띄우고, 지붕처럼 자란 연대 사이로 배를 저어가며 연연한 꽃들을 따는 젊은 여인의 모습은 가히 선경 부근은 될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연을 듣고 나니, 그 꽃을 따다가 팔기 위함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 한가롭기만 하던 여름의 한경이 순식간에 짜증스러워지고, 월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던 여인들의 모습도 곤비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아마 그 여인들의 눈에 비친 연꽃은 한 장, 한 장의 지폐일 뿐일 겁니다. 산모롱이 한 자락에 자리잡은 들꽃 한 송이에도 자연이 있고,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건대 그것을 꺾어다 집 안을 밝히려는 인간에겐 이미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는 듯 싶습니다.

도심에 살 때는 들이나 산에 나갈 때마다 갔다온 증표 삼아 꺾어 오던 풀꽃들도 이젠 막상 그 품에 들어와 보니, 거기 놓여 있는 편이 더 좋게 보입니다. 돌 하나, 풀 하나 그대로 놓이고, 나도 그 틈에 그대로 놓이고 싶을 뿐입니다.

■ 물골안에서 이시백
글쓴이 이시백씨는 중학교 교사이며 소설가다.
서울서 생활하다 현재 남양주시 수동면 물골안이란 동네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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