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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리·에·서·온·편·지

해뜨는 동쪽나루 정동진에서

사람 사는 일이 이런일 저런일 겪으면서 삶의 깊이를 다해가듯, 늙은 호박을 말리는 과정도 이와 비슷해서 울타리에 척 걸쳐놓은 호박고지가 낮에는 투명한 햇살에 마르고 밤에는 찬서리 맞으면서 얼었다 녹았다 하더니 호박 특유의 향과 단맛이 깊게 배었습니다.

제맛이 톡톡히 든 호박고지와 밤새 물에 불린 쥐눈이 콩을 곱게 빻은 쌀가루에 함께 넣어 얼기설기 넉넉하게 버무려서 시루에 찐 후 정다운 사람들에게 보낼 것을 알맞게 가늠해 놓고, 구수리 어른들과 나누어 먹는 것으로 해거리를 대신 하였습니다.

아이가 푸르른 나무처럼 늠름하게 자라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게될 때, 구수리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이 그리운 이름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길 바라며 용기 내어 시작한 이 곳 생활도 어느덧 햇수로 삼년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어설프게 시작한 시골생활이 한켜한켜 시루에 떡고물을 얹듯 하루하루 보태져 제법 이숙해져서 이제는 우리가족도 구수리사람이 다 된 듯합니다.

산과 들을 벗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아주 특별해서 어찌 보면 평범한 일상속에서도 순간마다 생명에의 외경심을 느끼게 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축복입니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집안일을 잠시 내려놓고 정동진에 다녀왔습니다.

지명(地名)이 말해주듯 서울을 기점으로 정 동쪽 방향으로 자를 대고 줄을 쭉 그으면 일직선상에서 마침표 찍듯 해안선에서 만나게 되는 바닷가 마을이 있습니다.

정.동.진.

언뜻 들으면 멋진 배우 이름 같기도 하고, 한창시절 덩치만 크고 순박했던 친구이름 같기도 한, 깨끗이 세수한 얼굴처럼 바닷바람에 씻긴 푸른 깃발이 높이 펄럭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쾌한 느낌이 드는 곳.

청량리에서 강릉을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한 야간열차가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해안선의 등줄기를 따라 파도소리를 들으며 거쳐가게 되는 길목인 이 곳은 바다를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철길이 해안선에 닿아 있어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칠 때면

손에 잡힐 듯 바다가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 말고는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 여느 바닷가 마을과 별로 색다를 것이 없는 어촌마을 입니다.

하루에 한두번 타고 내리는 손님이 있을 때만 완행열차가 잠시 설 뿐 무심코 지나쳤던 나루는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모험을 즐기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지명이 오르내리기를 몇몇해, 해를 거듭하면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행자 가슴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각인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음양의 이치는 예외가 없듯이 이 조용하던 마을도 세상바람을 비껴가지 못하고 한해가 다르게 아름다운 풍경에 상처를 내고 있지만 등푸른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는 여전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나마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이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일생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마을의 보석 같은 풍경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풍경 이상의 의미를 지니듯 이제 정동진은 고향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어떤 인연으로든지 이 곳을 거쳐가거나 사랑하게된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간직되어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정선의 두타산 기슭에서 지그시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동해를 향해 미끄러지듯 가파르게 나 있는 길을 따라 달려가 만난 바다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가늠치 못할 정도로 수평선은 아득했고 칼바람과 함께 솟구쳐 오른 파도는 첼로소리를 내며 옥색의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연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다녀가게 된다는 정동진에서 겨울비를 맞으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수평선을 바라보는 연인들을 미소로 바라보며 중국시인이 썼다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사랑을 얻는 것도 고통이요, 사랑을 잃는 것도 또한 고통이라는 한 수필가의 글에 인용된 이토록 매혹적인 싯귀는 그 함축적 의미와 함께, 젊은 시절 오월의 바다에 가서 모래 위에 이 시를 쓰고 돌아섰다는 수필가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가슴을 촉촉이 적시고 있습니다.

밤바다에 나가 보았습니다. 겨울비는 걷히고 파도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습니다. 어느새 하늘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세월을 가로질러 날아온 별빛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젖히고 북극성을 찾아보았습니다. 밤바다의 어부들에게 등대와 같은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별.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연스럽게 바닷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별.

밤하늘의 북극성이 스스로 빛날 때 바닷사람들에게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길 안내자가 되었듯이 자연 속에서는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스스로 그러하다는 自. 然. 이라는 한자 뜻 그대로 우리가 곧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산다면, 있는 곳이 어디든 북극성과 같이 빛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해 봅니다.

바닷바람에 후련하게 마음을 씻어볼 일입니다. 파도소리에도 파묻히지 않는 갈매기소리를 들으면서 삶의 고단함을 툭툭 털어 버리고 바다처럼 깊고 푸른 가슴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올 일 입니다.

찬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맞닿은 어깨가 의지가 되어 수평선을 바라보던 연인들처럼 동쪽나루 정동진 밤바다에서 우리가 이름 붙여준 북극성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그리운 이름으로 남기를 소망해봅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바람. 별. 꽃나무 아름다운 구수리에서 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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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리에서온편지] 해뜨는 동쪽나루 정동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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