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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곳에 이런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안동에 있는 ‘지례촌’이라는 곳도 그런 곳입니다. ‘안동’하면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지례촌은 안동댐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개인소유의 전통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안동 시내를 벗어나 임하댐을 오른쪽으로 끼고 한참 달리다 보면 댐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몇 개 지나치게 됩니다. 강 건너편으로 수려한 산의 능선이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고, 산 아래로 한옥 몇 채가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 수하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수하교를 건너면 곧 미끈한 아스팔트 길이 끝나면서 비포장길이 시작됩니다. 비포장이 면서도 유난히 도로폭이 좁고 길이 고르지 않아 지프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는 산길입니다. 산허리를 구비구비 틀며 오르고 내려 7~8㎞쯤 족히 달려야 산 반대자락에 있는 지례촌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험한 산중에 있는 지례촌에는 촌장님이신 초로의 시인께서 조용하면서도 기품있는 아내와 단둘이 오붓하게 살고 계십니다.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지례촌 아래의 동구밖까지 차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댐이 완공되고 마을에 물이 차면서 길이 없어지자 이곳의 유일한 통로는 산을 넘어 집의 반대쪽에 있는 수하교로, 이 다리를 거쳐야만 오고갈 수 있게 되었고, 댐 주변의 여러 마을이 물에 잠기고 노시인의 고가(古家)가 있는 마을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 다정다감하게 모여 군락을 이루던 한옥마을의 정겨운 풍경은 물밑으로 가라앉고 집집마다 내려온 이야기들 또한 집과 함께 물에 잠겼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났지만 시인은 마을이 있던 자리가 내려다보이는 물이 닿지 않는 산 중턱에 터를 다지고, 살던 집의 기와며 서까래, 마루, 구들장, 주춧돌까지 그대로 뜯어 옮겨 옛집의 모양과 위치를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원래대로 복원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집에 오는 손님들은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본채 옆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고 있는 서당 마당에 서 있으면 금방이라도 훈장님의 기침 소리와 제자들의 글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올 것 같은 애잔한 느낌이 듭니다. 손끝이 시린 늦가을 밤에 지례촌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총총하고 푸른 별들. 장작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에서 도르르 도르르 물 끓는 소리.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묻고 밤이 이슥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정다운 목소리들. 그리고 물안개와 함께 맞이하는 정갈한 아침. 꿈결같은 이야기들이 이곳에 가면 노시인의 시처럼 아름답게 흐릅니다. 가끔씩 지인들이 찾아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조용한 공간이 필요해 부탁하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문을 열고 창작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과 애정이 마음을 맑게 하는 곳. 지.례.촌. 하늘이 쨍하고 푸른 오늘 같은 날. 그곳의 향기가 그리워 내 마음은 어느새 안동으로 향하고 동양화 한 폭의 여백처럼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서 남겨둔 넉넉한 마음의 여백이 있는가 되묻습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주렁주렁 맺힌 감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감나무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윗마을에, 새로 집을 짓고 살게될 젊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가끔씩 알음알음으로 산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구수리 마을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 마을 풍경에 반하고 인연이 닿아 이곳에 집을 지으 려고 계획한 분도 있지만, 수몰지구가 될 진안의 한옥을 옮겨 복원시키려 한다는 말을 이들 부부에게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경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집을 앉히게 될 터는 오랫동안 묵어있어 잡초만 무성하더니, 올해는 동네 어른이 정성껏 가꾼 메밀꽃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얗게 피어나서 한동안 기쁨을 주었습니다.

금강산에 가서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는 적송 몇 그루가 장군봉 아래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무를 보고 오겠다고 산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엔 등불이 켜지는 것 같았습니다. ‘진안’ 하고 나는 입속으로 되뇌이고, 그들이 돌아간 후 지도를 더듬어보았습니다. 전라북도에 있더군요. 가까이 마이산도 있구요. 애정어린 마음 없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이런 일을 행복하게 계획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지요. 머지않아 윗말에도 어쩌면 물속에 푹 잠길뻔한 옛집이 복원되고 집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향기가 묻어 오겠지요.

날이 갈수록 편리해지고 간략해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편리함은 곧 행복이요, 불편함은 곧 불행인 듯 비껴가려고만 하는 시절입니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일상이 편리함에만 익숙해져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생활이 편리해지는 만큼 삶이 명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폐해져가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봅니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목적도 잃고 행진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봅니다.

아랫마을보다 산중턱에 높이 자리잡은 우리 마을은 가을도 겨울도 앞질러 한걸음 먼저 오는가봅니다. 찬물에 선뜻 손을 담그기가 망설여질 만큼 기온이 낮아졌습니다. ‘어서 겨울 준비를 해야지’하고 마음이 바빠집니다. 아궁이 방이 있어 산에 오를 때면 여름에 등산로를 내기 위해 낫으로 쳐두었던 마른 나뭇가지들을 눈여겨 두었다 조금씩 가져오고 있습니다. 처마 한켠에 고목이 된 밤나무와 대추나무, 낙엽송을 쪼개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가져온 나무들을 얹으면서,‘장작을 준비하는 것은 나 자신이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뒷날 이 집에서 살 누군가를 위해서다’라는 법정스님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나누려 아껴둔 마음과 삶의 여백을 가진이가 있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 분들께 갈채를 보냅니다.


바람. 별. 꽃. 나무. 아름다운 구수리에서 글·그림 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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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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