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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뒤 추녀에서 떨어진 빗방울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고여있는 고궁에 나가 보았습니다. 강물처럼 흘러온 시간들의 기억과 흔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낡은 회색빛 지붕끝으로 파랗게 걸려있는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자지러질 듯 매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여름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의 몸 크기만큼 드리워진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호리호리한 나무는 애처로운 그림자를, 키 작은 나무는 나즈막한 그림자를, 우람한 나무는 몇사람이라도 품에 안을 듯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두 제 덩치만큼의 더도 덜도 하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겠다는 아이를 데리고 이따금 학교 운동장에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 빈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서 있습니다. 운동장을 씽씽 신나게 돌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자, 스쳐온 많은 여름날들이 생각납니다.

인사동 학고재를 지나 비원쪽으로 꺾어돌면 바로 풍문여고로 건너는 육교가 보이고 육교 바로 앞에 키가 큰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그 잎을 손수건 흔들 듯이 나부끼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이 거리 모퉁이에 자주빛 페인트 자국이 군데군데 벗겨진 목조건물이 있습니다.
다.브.로.화.실
거칠 것 없이 유쾌했던 빛나던 십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소녀, 나.의.벗.춘.희.와 갈래머리의 내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고 따갑던 여름날 다브로 화실의 삐걱거리던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갈 때, 누군가가 손으로 쭉 훑어다 뿌려놓은 플라타너스 잎사귀에서 나던 서늘하면서도 푸른 향기를 춘희와 나는 아직도 아름답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나는 생각합니다. 삶이 고단해질 때 힘이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신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지나온 날들 속에서 가슴 한켠에 보석처럼 곱게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비록 조각보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운동장 맞은편 언덕에는 울타리삼아 심어놓은 은사시나무가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없지만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미세한 바람에도 물결처럼 흔들리는 나무입니다. 그 많은 종류의 나무중에서도 바람이 거세질수록 더더욱 아름답게 깃발처럼 흔들리는 나무입니다.
은사시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오래전에 내 안에 심었던 나무 한 그루를 드려다 봅니
다. 이제는 파도같은 세월을 가로질러 이런저런 상처를 견디며 담담하게 자랐습니다. 나의 인생이 폭풍속에서도 의연하게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오늘도 은사시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바람.별.꽃.나무
아름다운 구수리에서 김해경


글·김해경
(글쓴이 김해경씨는 서울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 작년 충북 진천 백곡면 구수리란 산동네로 이사와 남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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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에 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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