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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카페촌에서 만난 사람

직접 자재 구해 손수 지은 60평 식당과 30평 주택


도로에서 3백여미터 안쪽으로 다소 외진 곳에 땅을 구입하다보니 남의 땅을 경유해서 우리 땅에 닿는 상황이었다. 관할 관청에 어떻게 하면 길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공인된 도로로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관청에선 남의 땅을 도로로 허가를 내서 사용을 하려면 그 땅 소유주의 인감이 첨부된 도로사용 승낙서가 필요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 땅을 사들이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고 했다.


지난 97년 나는 삶의 터전이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 곳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원래 고향은 강원도 평창이고, 성장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농협중앙회에서 7년간 근무했다. 그러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대학가에서 음식점을 시작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지금의 양평 문호리로 오게 되었다.
처음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안전한 직장생활을 버리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과연 바른 판단이냐’며 만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한 번 기울어진 마음이 다시 돌려지기는 힘든 일이었다.

나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유감없이 나의 사고력과 집중력, 독창성을 밑천 삼아 대학가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업은 독특한 마케팅 전략으로 무장한 음식점 운영.

이러한 나의 전략은 잘 맞아 떨어져 많은 단골고객을 확보, 일로번창 하였고 어느 정도 자본도 축적하게 되었다. 직장생활 때보다도 생활이 훨씬 향상되었고, 내 자신 스스로도 성취감에 마음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한이 없었다. 어느정도 안정을 이루자 이번에는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삶의 질을 보다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고, 그 방편의 일환으로 나는 우선 서울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다.

서울과의 접근성이 용이하고, 최소한의 자연환경이 보존된 지역을 물색하기 위해 서울 주변 여러 곳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이 쪽으로 왔을 때 경제적 기반과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가 연구했고, 그 결과 다시 음식점이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이런 몇가지 기준을 세우고 경기 일원을 답사했으나 많은 지역이 이미 심각한 난개발로 마음에 그리던 전원생활과 동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나니 광주, 여주 양평 세 곳으로 압축됐고, 최종적으로 나는 양수리 카페촌을 선택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자본에 걸맞는 땅을 고르다 보니 도로에서 좀 떨어져 강이 보이지 않는 지금의 땅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근린생활시설의 전용이 가능한 준농림지 5백평, 하천에 인접한 구거 4백평 등 모두 9백평을 샀다. 이중 준농림지 5백평은 근린생활시설로 허가 받고, 나머지 구거 4백평은 농사용 땅으로 사용해 음식점에서 소비되는 각종 채소류를 재배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로에서 3백여미터 안쪽으로 다소 외진 곳에 땅을 구입하다보니 남의 땅을 경유해서 우리 땅에 닿는 상황이었다. 관할 관청에 어떻게 하면 길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공인된 도로로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관청에선 남의 땅을 도로로 허가 내어 사용을 하려면 그 땅 소유주의 인감이 첨부된 도로사용 승낙서가 필요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 땅을 사들이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나는 부동산중개소에 통보해 본 땅의 계약을 할 때 매도인과 중개인에게 도로사용승낙서를 반드시 계약서에 첨부하지 않으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랬더니 그 즉시, 매도인과 중개인은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마음에서 도로사용승낙서를 해왔고 나는 허가 사항에 장애를 말끔히 정리한 다음 허가 관청에서 현황도로 확보 및 근린생활 전용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 후에 건축신고를 하면서 근린생활부지 내에 생활주택도 함께 지을 수 있는지를 문의한 결과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고 60평의 근린생활시설과, 30평의 주택을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집을 짓기 위해서 시작이 반이라고 일을 벌려놓고 나니 건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써는 열심히 책도 보고 나이든 노인들에게 자문도 구했다. 초가나 이와 유사한 토속 건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하며 공부를 했다.

사람들을 고용해 직접 집을 짓다보니 건축기간이 길어져 업자들이 짓는 기간에 비해 두배 이상 걸렸다. 반면 건축비는 상당히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다음은 어떤 음식으로 손님들의 구미를 당기느냐하는 문제였다. 나는 지금의 초가집 순두부를 상호로 먼저 결정했다. 그리고 음식은 어린시절 시골에서 어머니가 흔히 만들어 주던 순두부, 손두부, 메밀묵, 메밀국수, 보리밥을 주종으로 결정해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시골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음식 만드는 법을 전수 받았다.

전국 각지의 유명한 토속전문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상에 올리는 반찬의 종류와 음식 맛을 비교 분석하여 우리집에 맞는 고유의 음식 맛을 만들어 갔다. 지금은 순두부, 손두부, 두부전골, 메밀냉면, 메밀묵 등은 강원도에서 직접 구입한 두부콩과 메밀을 가지고 맷돌에 갈아서 옛날 시골집에서 먹던 생생한 음식 맛을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집은 음식점 위치로는 다소 불리한 위치인 게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시골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손님상에 올리는 음식도 정갈하고 맛이 있어야만 한다는 기본에 충실한 결과, 지금은 많은 단골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다.

내가 이 곳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때는 아이들을 볼 때다. 나는 애들이 순수하고 자연의 순리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동심의 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이 곳은 봄이면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고 시냇물이 있고 다람쥐, 물고기, 개구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귀하게는 처마 밑에 산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를 시키고, 그 새끼가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고 짹짹거리는 모습도 보았다.

돈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을 나와 우리 가족들은 일상인양 경험하고 있다. 이 것이 탈서울을 결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田


글 김동철/사진 류재청



김동철씨는 95년 지금의 문호리 땅을 매입하고, 2년 정도 토목과 건축공사 기간을
거쳐 97년 ‘초가집 순두부’를 오픈 했다. 건물 규모는 식당이 60평, 주택이 30평.
황토와 외부 하단 마감재로 쓰인 호박돌, 볏짚, 서까래 구조체로 쓰인 각종 목재 등
모든 것을 강원도에서 직접 구해 사용했다. 건축도 인부들을 고용해 직접 지었다.
고향이 강원도였기 때문에 자재의 대부분을 이 곳으로부터 들여 왔고,
아는 곳을 통해 들여오다 보니 자재도 거의 원가에 들여와 저렴한 가격에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평당 건축비는 1백20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초가집 순두부 0338-774-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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