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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가를 찾아서

조선 청백리의 종가 아산 맹씨행단(孟氏杏壇)

이 집은 구조적인 면에서 고려시대 사대부 살림집의 유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다른 가옥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종보 위에 안으로 휘어진 ‘人’자 모양의 솟을합장이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건축에 흔히 쓰여진 기법으로 당시의 건물에는 거의 모두 이러한 솟을합장이 있다. 그 후로는 이런 구조를 잘 쓰지 않아 이런 솟을합장이 있는 건물은 고식에 속한다. 맹씨행단 안채에서 보이는 이 공포구조는 익공의 초기형식으로서 출목형 익공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형식으로 우리나라 목구조 발전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원래 최영 장군의 집이었으나 손녀사위인 맹사성에게 넘겨주면서 맹씨의 종가가 되었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수문전제학 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로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조선조에도 벼슬을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여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공복으로써 청백하여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여기고 있다.

이 집의 이름이 맹씨행단인 것은 집안 뜰에 맹사성 선생이 심어놓은 듯한 커다란 2그루의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은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개 고려 말경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64년 보수공사를 할 때 대청 들보에서 먹으로 쓴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1482년(조선 성종13)에 안채를 크게 보수했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후인 1642년(인조20)에 또 한차례 크게 보수한 기록, 그리고 집을 고칠 때 참여했던 장인(匠人)들의 이름이 밝혀졌다. 이 집은 이때 크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고치기 전의 배치는 서북향이었으나 임진왜란 후 크게 보수한 뒤로 지금과 같은 북향이 되었다. 처음에 이 집을 지었을 때는 온돌이 아닌 맨바닥으로 만든 사대부 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 이 지방에는 아직 온돌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닥은 아마도 넓적한 바닥벽돌을 깔고 다른 한쪽에는 마루를 깔아두었을 것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방과 대청마루가 만들어지면서 크게 개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집의 뼈대까지 다 바꿀 수 없으므로 그전의 집구조를 바탕으로 구들과 마루를 들이는 형태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집 구조에서 고려시대 사대부 살림집의 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이 집은 건축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현재 맹씨행단에는 안채와 사당, 문간채, 살림채가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안채이고, 이 안채는 국가에서 사적 제109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원래 정면쪽으로 부엌 2칸이 달려 있어 이곳에서 후손이 살림을 하고 있었으나 1970년 수리하면서 부엌을 헐어냈고, 이때부터 안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되었다.

지금은 안채 앞쪽으로 한단 아래에 살림채를 새로지어 후손은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 일제 때 신문기사에서 안채에 부엌이 달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풍수를 보면 설화산(雪華山)을 주산으로 하고, 배방산(排芳山)을 조산으로 하는 주작과 현무가 축선을 형성하는 일직선 위에 마을이 배치되어 있다. 주산인 설화산은 봉우리가 다섯이 있다하여 오봉산(五峯山)이라고도 한다.

조산인 배방산은 마을 앞 내수(內水) 건너편에 단정한 산세로 앉아있다. 설화산의 지맥 중 하나는 북으로 흘러 좌부동에서 끝을 맺으면서 좌청룡을 이루고, 다른 하나는 동편의 마리골 쪽으로 흐르면서 우백호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마을의 좌향은 동북향이 되며 마을 정면으로 조산인 배방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마을의 어귀는 동북방이 되어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상이며, 좌우는 특별히 감싸주는 구릉이 없고 거의 마을과 비슷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남측의 망경산과 태화산 사이에서 발원한 금곡천은 중간에서 또 하나의 지류와 합쳐서 마을 앞을 곧바로 지나간다. 금곡천은 북으로 흘러가다가 근대골내와 만나 온양천을 이루고 이 온양천이 다시 곡교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금곡천이 온양천과 만나는 지둥내가 풍수적 형국으로 내수구가 되고 온양천과 만나 곡교천으로 합류하는 윗배턱거리가 외수구(外水口)가 된다. 따라서 마을은 주산과 조산이 있고 내외수구가 형성되어 그 사이에 점지함으로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풍수를 갖추는 형국이라 하겠다

. 맹씨행단은 마을 중간지점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이 배치된 대지도 전면이 낮고 후면이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형상이다. 마을의 뒤를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는 배산은 역시 설화산이며 그 줄기가 주변을 감돌아 내려오고 있다. 마을 안길은 조그만 개울을 끼고 나있는데 마을 중턱에서 개울 건너편에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근래에 지은 종손의 살림집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살림집을 보면서 우측에 석축이 있는데 석축 위에 고택의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 안채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때 만든 맹씨행단 안채이다.
정면4칸, 측면3칸의 ‘工’자형 평면으로 만들어진 안채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방을 배치하였는데 평면상으로 보면 대칭으로 되어 있다. 단면 구조로 보면 높은 기둥을 하나 세운 1고주 5량집에 지붕 모양은 맞배지붕이다. 대청 앞으로는 퇴칸을 두고 퇴칸을 제외한 대청 앞뒤는 모두 문을 달아 두었다.

대청의 양 측면에 각각 2개씩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것은 2칸으로 큰 방이고, 후면 1칸은 작은 방이다. 큰방의 경우 정면으로는 창호를 두지 않고 대청과 전퇴방향, 양측면으로 출입문과 봉창을 설치하였다. 다른 가옥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종보 위에 안으로 휘어진 ‘人’자 모양의 솟을합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솟을합장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건축에 흔히 쓰여진 기법으로 당시의 건물에는 거의 모두 이러한 솟을합장이 있다. 그 후로는 이런 구조를 잘 쓰지 않아 이런 솟을합장이 있는 건물은 고식에 속한다. 맹씨행단 안채에서 보이는 이 공포구조는 익공의 초기형식으로서 출목형 익공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형식이며 우리나라 목구조 발전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안채의 우측 뒤쪽에 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 주위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다시 행랑채와 살림집, 사당을 전부 둘러싸는 담이 바깥으로 한겹 더 둘러져 있는 2중 울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뜰에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수석으로 정원을 꾸미고 정원 가운데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연륜을 과시하고 있다.

이 집을 비롯한 마을 안의 몇몇 집들이 남향을 하지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은 마을에서 볼 때 설화산을 주산으로, 배방산을 조산으로 하는 풍수지리를 따랐기 때문이다. 집을 특별히 잘 꾸미려 하지 않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돌과 나무로 정원을 꾸민 것에서 집주인의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둘러진 주변 경관은 그 자체로 바깥뜰이고, 집 가까이 심어둔 나무와 돌은 안뜰이 된다.

이렇듯 자연과 친화하는 선조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청백리가 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맹사성은 집 뒤에 구괴정을 짓고 영의정 황희, 우의정 허조와 함께 이곳에서 교류하였는데 당시의 정자는 없어지고 근래에 새로 지은 정자만이 옛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田

■ 글·사진 이왕기(목원대학교 건축도시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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