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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를 일으키며 초가들이 줄지어 늘어선 고샅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겨울답지 않게 제법 부드럽다. 담 안팎 감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까치밥이 바르르 떨 뿐이다. 금전산과 오봉산, 백이산에 둘러싸인 읍성邑城안에 숨죽인 듯 납작 엎드린 초가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도시의 아파트와는 판이하다. 서문 곁 고샅 안쪽에 자리한 초가의 사립문을 여니 주름살 깊게 패인 노옹老翁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약초 망태기를 짜며 어느새 봄날을 준비한다. 부엌과 큰방, 작은방 말 그대로 초라한 초가삼간草家三間이다. 순천 낙안읍성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에 온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전국에 읍성이 몇 군데 있지만 이곳 처럼 조선시대의 읍성과 관청 그리고 서민 문화를 잘 표현한 집과 생활 문화를 비교적 잘 간직한 곳은 드물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동내리 서내리를 아우르는 낙안읍성(사적 제302호)은 우리나라의 자연 촌락을 고스란히 보존한 곳으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서를 둔 고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관아와 민가를 함께 수용한 성이다. 즉 행정과 주거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춘 성이다. 우리나라 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쌓았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축조가 활발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초기 179개 읍성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부府 · 목牧 · 도호부都護府 · 군郡 · 현縣등 행정구역이 330여 개였으니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은 것이다. 읍성은 주로 해안선과 국경선에 쌓았는데 갈대밭으로 유명한 순천만에서 약 8㎞ 떨어진 낙안읍성도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흙으로 쌓았고, 조선 초기 돌로 다시 쌓았다.




성안에 깊은 우물을 파지 마라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잡았음인지 성곽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진산鎭山인 금전산을 배경으로 동쪽은 좌청룡左靑龍인 오봉산, 서쪽은 우백호右白虎인 백이산 그리고 남쪽은 안산案山인 옥산이 먼발치에서 읍성을 에워싸고 있다. 동쪽과 서쪽은 금천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농토가 넓게 펼쳐진 벌판이다.
풍수상 행주형行舟形으로 향교 뒷산은 배의 닻, 동내리와 남내리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돛, 성곽을 따라 늘어선 노거수老巨樹들은 키와 노에 해당한다. 예부터 '성안에 우물을 깊이 파면 고을이 쇠한다'하여 이를 금했는데, 배가 밑이 뚫려 물이 차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기陽氣에 속하는 행주형은 지세地勢가 배에 인물과 재화를 가득 싣고 막 출발하려는 형국으로, 고을에 인재와 재물이 넘쳐나 흥한다고 한다.
기록에는 1397년(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했고, 1424년(세종 6년) 10월 성터를 오늘과 같은 규모로 넓혔고, 1626년(인조 4년)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오늘날과 같은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고을에는 임경업 장군이 도술을 부려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성은 1∼2m 크기 장방형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하부가 4.2∼5.9m에 상부가 3.4∼5.1m, 높이는 3∼5m, 길이는 1410m이다.




허허벌판에 쌓은 석성

왜구 침입을 막고자 군사적으로 쌓은 성이라면 산이 적합할 듯한데 왜, 허허벌판에 쌓은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평야지대에 성을 쌓은 목적이 나온다.
"須當此時수당차시, 堅築城子견축성자, 有事則固門防禦유사칙고문방어, 無事則盡趨田野무사칙진추전야, 爲治之要務也위치지요무야."— 세종 13년(1431) 11월 8일 모름지기 마땅히 이 때를 당하여 성을 견고하게 쌓아 사변이 있으면 문을 굳게 닫고 방어하며, 사변이 없으면 모두 전야田野에 나가게 하는 것이 정치하는 요긴한 일입니다.
"但城基雖廣而險단성기수광이험, 內無泉水내무천수, 且乏糧儲차핍량저, 必不能固守필불능고수."— 세종 16년(1434) 3월 17일
성의 기지가 비록 넓고 험하고 높더라도, 그 안에 샘이 없고 저축한 군량이 결핍해지면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대저 성보城堡의 군사 기지로 높은 산은 부적당합니다.

이 모두 최윤덕이 판부사와 우의정일 때 세종대왕에게 올린 글〔上言〕이다. 백성이 성안에 장기간 머무르려면 물이 풍부하고 농토가 기름지며 집과 관사를 지을 만한 넓은 지형이 필요하고, 성이 험한 산중에 있으면 마땅히 지켜내기는 쉬우나 물과 군량미 부족으로 오랜기간 버티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읍성을 군사적 목적으로 평지에 쌓았음인데, 임진왜란 때 유성룡은 그 부적합함을 이렇게 지적했다.

"我國人知倭語者聞之아국인지왜어자문지, 則倭奴以爲칙왜노이위 : ' 爾國之人愚矣이국지인우의. 築城於卑處축성어비처, 敵人登高俯射적인등고부사, 莫能當之막능당지. 我輩之久留於爾國아배지구류어이국, 以此故也이차고야. 若於高處築之약어고처축지, 則誰敢犯之칙수감범지.'云矣운의."— 선조 27년(1594) 4월 17일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어倭語를 아는 자가 들으니, '왜구가 그대 나라 사람은 어리석다. 성을 낮은 곳에 쌓으면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쏘는 것을 당해내겠는가. 우리들이 그대 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라고 하였답니다.



괘씸죄에 걸려 군에서 면으로 강등

낙안은 예전에 군郡이었는데 현재 행정구역명은 낙안면이다. 낙안읍성 지킴이 송갑득 씨는 그 까닭을 2001년 '문화 환경 가꾸기'전문가 워크숍에서 이렇게 밝혔다.
"낙안은 조선시대 11개 면을 관할하던 곳으로 당시 전라도 지방에서는 큰 군에 속했다. 전라도 관찰사가 행하기 어려운 송사訟事는 낙안군수에게 도맡겨 처리할 정도로 막강한 군이었다. 그런데 구한말 조정이 일본의 간접 지배를 받으면서 낙안읍 유림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사사건건 반대하자, 소위 요즘말로 괘씸죄에 걸려 낙안군을 셋으로 분할하여 인접한 보성군과 고흥군에 나누어주는 바람에 낙안면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서 갖은 수탈을 일삼는 일본 지주들을 상대로 일어났던 농민들에 의한 소작쟁의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개발은커녕 가장 낙후된 고장으로 남게 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던 1970년대 전국을 휩쓴 새마을운동도 이 고을을 빗겨갔으니 이를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까. 중요 민속 가옥 9동과 객사 그리고 서민촌락으로 고유의 토속적 민속과 자연 경관을 잘 보존했으니 말이다.
낙안읍성에는 북쪽을 제외한 동쪽과 서쪽과 남쪽에 성문을 두고, 관아와 객사 등 공공 건물을 북쪽에 배치했다. 성안 큰 길은 공공 건물 앞을 지나 낙풍루인 동문과 낙추문인 서문을 잇는다. 현재 성안에는 66가구가 거주하는데 주로 서문보다 동문을 이용하고 쌍청루인 남문은 농사지으러 갈 때 이용한다. 예전에는 순천과 흥양 · 보성 방면은 동문으로, 화순과 동복 · 광주 · 나주 방면은 서문으로 그리고 북쪽 오금재를 넘어 구례와 남원 · 전주 ·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성안에는 관아와 객사 등 공공 건물을 제외하면 서민 가옥인 초가가 대부분이다. 초가들은 좁은 돌담 골목길(고샅)을 구획 삼아 남서 방향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집마다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래기 묶음이 정감을 느끼게 한다. 흙과 돌, 나무, 짚으로 지은 一자형 3칸 집으로 전통 건축술과 남부지방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부엌과 큰방, 작은방 그리고 큰방과 작은방 앞 툇마루로 이어지는 3칸 전툇집이 주류를 이룬다. 초가들은 대부분 자연석 한 벌 기단에 윗면이 편편한 호박돌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얹었다. 돌담과 어우러진 3칸 초가들은 초라하기보다 옛 정취를 자아낸다.







가는 길과 주변 여행지
호남고속도로 주암 나들목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송광사를 지나 3.6㎞ 가면 곡천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왼쪽 외서 · 벌교 방향으로 12.8㎞ 가면 나오는 장산 삼거리에서 좌회전(58번 도로)하여 6.1㎞ 가서 고개를 넘으면 낙안읍성이 정면으로 보인다. 낙안읍성 주위에는 고인돌 공원, 송광사, 선암사, 순천만이 있다.







- 글 · 사진 윤홍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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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살아 숨쉬는 전통 마을 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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