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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였으며 개인의 은밀한 소장품을 숨겨 놓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놀이 공간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다락이 있는 집에 살았던 이는 이곳에서 참으로 많은 추억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공간 효율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다락인 이유다.

이동일 <행인흙건축 대표 033-344-0983 www.hangin.co.kr>

 

 

 

불을 때는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조리했던 부엌은 방바닥보다 2자(약 60㎝) 정도 깊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장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 낮아진 만큼 위 공간을 사용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해서 자투리 공간이 생겼으니 이른바 다락이다. 한옥 하면 떠오르는 것이 구들방과 마루다. 더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 다락이다. 흔히 우리는 다락방이라 불렀다. 일상 공간이 아니지만 방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까닭은 그것이 생활의 한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한옥의 다락은 오래된 서책이나 문서 등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가까이는 아이들의 앨범이나 상장, 일기장 등 성장 과정 기록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때문에 이곳에서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거미줄 친 다락의 곰팡이 냄새를 맡아가며 아버지의 흔적을 새삼 발견하기도 했고, 부모는 성장해 출가한 자녀들의 기록들을 뜻하지 않게 만나기도 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징검다리 벽장은 계단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일상에서는 차례 상과 제기 등을 보관하거나 갑자기 손님들이 들이닥쳤을 때 옷가지 등을 한꺼번에 몰아넣는 창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아이들 숨바꼭질 놀이에서 더 없이 숨기 좋은 공간이기도 했다. 특히 사춘기를 맞이한 자녀들에게 다락은 자신만의 동굴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 어른들의 눈을 피해 숨고 싶을 때 다락은 잠시 머물 수 있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추진된 주택 개량과 1970~80년대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까지도 다락은 형태를 달리하며 이어져 왔다. 지금의 40∼50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다락방에 대한 추억은 아마도 이 시절의 기억일 것이다. 한국전쟁 후 베이비 붐 시대에 집은 작고 아이는 많았다. 기존의 다락을 방처럼 꾸며 공간을 늘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위로 올라간 아이들은 다락의 작은 창을 통해 빛을 보았고, 배 깔고 누워 동화책과 만화책들을 읽던 시간은 가난한 시절 유일한 낙갪이었다.
재래 부엌 형태의 난방과 취사가 사라지고 서구식 주방이 일반화되면서 다락은 자연스레 형성되는 공간이 아닌 인위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방과 부엌의 단 차이가 없어져 중간 계단 역할을 하는 벽장이 사라졌고 이를 대신해 다락을 출입할 수 있는 계단이 필요해졌다. 결국 간이 복층 형태로 건축비용이 많이 드는 또 하나의 공간 개념이 된 것이다. 한옥 오량천장에는 구조상 다락을 만들 수 없고 맞배 또는 팔작지붕의 합각 부분이 접하는 위치라야 가능하다. 천장과 벽 단열은 필수다. 역시 손이 많이 가고 비용도 늘어난다. 그래서 쓰지 않는 물건을 올려놓는 창고 역할이 전부라면 굳이 다락을 만들 이유가 없다.
다만 어릴 적 다락의 기억을 살리고 싶거나, 손자 손녀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면 그에 맞는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게 필요하다. 오래된 서책을 보관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열람하는 서재 기능으로서의 다락이라면 경사 천장 아랫면에 책장을 짜 넣고 주위에 앉은뱅이 책상 하나만 놓으면 족하다. 손자 손녀들을 위한 다락이라면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내는 것이 좋겠다. 2∼3개의 디딤판과 창을 열어 세상을 볼 수 있는 다락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몇 권의 동화책과 스케치 북, 연필을 올려놓은 작은 책상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각박한 세상살이, 자신만의 동굴이 필요한 현대인에게 잠시 숨어들 수 있는 다락은 그 존재만으로 삶의 위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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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의 재발견] 존재만으로 삶의 위안이 되기에 충분한 多樂을 주는 우리네 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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