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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서면, 33가구가 살고 있는 산골 송천리는 떡을 테마로 널리 알려져 떡 만들기 체험과 떡을 맛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꾸준하다. 쿵덕쿵덕 떡 메를 치고 밤을 새워 떡을 빚은 지 38년. 떡을 팔아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고 나니 그 새까맣던 머리카락은 백발이 성성해졌다. 명절은 멀리 있어도 그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떡을 빚는 송천 떡집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박지혜 기자 사진 백희정 기자 취재협조 송천떡마을 033-673-7020 songcheon.invil.org

 

 

 

"당거 주소 당거 주소/ 오야라 장창 당거 주소/ 웃가래서 힘써 주 먼/ 밑가래서 당거 줌세/ 어깨야 다리야 한심 써라/ 오늘 밤도 야심허다~"
까만 하늘 총총한 별들마저 숨죽이고 개들도 침묵하는 깊은 밤, 하늘 에서 먹물을 뿌린 듯 시커먼 마을 가운데 유독 한 집만이 불을 밝힌 채 다. 꿈결에 들은 이야기 털어내고 사부작사부작 반쯤 감긴 두 눈이 그 불빛을 향해 간다. 웅크린 어깨, 주머니에 지른 손에는 아직 어제의 떡 만들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단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시 떡 만들러 나간다.
"그래도 어떡혀. 먹고살라면 해야제."
꼭두새벽 3시. 송천 떡집에 15명의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잡고 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각자의 자리가 정해진 것도 누가 지시하는 것도 아닌 데 그 일사불란함이 물새 떼가 군무 추는 듯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 시각 이 곳에서 떡을 만들다 보니 한결같이 동작이 몸에 뱄다. 그래서 일하는 내내 따로 말이 필요 없다.
"새벽 3시면 어김없어. 1년에 딱 두 번, 그러니까 추석하고 설날. 그 날만 쉬어."
떡은 시간이 지나면 굳어버리고 상품 가치를 잃으니 만들어 바로 팔 거나 배송해야 한다. 그러니 새벽에 일할 수밖에 없다. 새벽 일이 고되 긴 해도 달리 생각하면 이곳 떡 맛이 좋아 매일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 다는 말이니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오전 6시 속초에서 출발하는 고속 버스 첫차에 떡을 실어 보내면 서울에서도 오전 중에 받을 수 있다.
본격적인 작업은 새벽 3시부터지만 당번은 자정부터 준비 작업을 해 둔다. 전날 물에 불려 놓은 쌀을 찌고 빻고 반죽해 덩어리 떡을 빚어 놓 으면 새벽에 떡판을 깔고 인절미, 바람떡, 팥소 찰떡, 약밥 등 그날 주 문한 여러 가지 떡 모양을 잡고 포장까지 작업을 이어간다. 이렇듯 일 을 하다 보면 밤을 새우기가 부지기수다.
아침 6시경 작업을 마치고도 몇몇은 쉬지 못한다. 떡 만들기 체험 손 님들이 오면 이를 지원하고 배송 시간 여유가 있는 다른 주문 떡을 만 들기도 한다. 짬짬이 집에 가서 눈을 붙이기는 하나 찰떡처럼 몸에 뭍 은 눅진한 피곤은 쉬이 가실 리 없다. 

 

 

 

새벽 밝히며 떡 만들기를 38년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푸른 동해까지 인도하는 44번 국도를 타고 한 계령의 위엄스러운 바위산과 장쾌한 계곡의 비경에 감탄하고 내리막을 달리다 구룡령으로 빠지는 길로 접어들면 바로 송천 떡마을이 보인다. 사방으로 산이 보위하고 계곡을 낀 구릉지로 아늑한 마을이다. 분위기 가 편안하고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때문인지 마을 안에 있으면 세상을 잊을 정도다. 과거 탁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주민의 30~40%가 탁씨 성 을 가졌다.
예전에는 옛 지명을 따서 소래 떡마을이라 했고 지금은 송천 떡마을 로 유명해졌다. 기계로 떡을 만들지 않고 38년 전 마을에서 떡을 만들 左떡 만드는 아주머니들. 왼쪽부터 김웅자(56세) 손원옥(69세) 박경자(60세) 김매자(62세) 박희순(65세) 신이순(67세) 김연화(65세) 씨. 다른 8명의 아주머니들은 기자가 아침 잠을 자는 사이 잠을 청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1 마을에서 유독 허름한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보수를 하지 않아 깨진 기와와 휘어진 주심도리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2 마을회관과 떡집(가운데). 농어촌 테마 마을 사업 지원을 받아 지은 현대식 방앗간이다. 어 팔기 시작한 그 때와 다르지 않게 일일이 손으로 빚는 것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떡메로 치고 손으로 떡을 빚는 떡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 고객도 꾸준하게 다녀간다.

 

 

 

 

마을은 어떻게 떡을 만들게 됐을까.
떡 사업은 마을 부녀회 주도로 시작했다. 송천 토박이 탁동리(68세) 씨는 젊은 시절 시내에 나가 화물운송 사업을 하 며 전국을 다니다 20년 전 아내 김매자(62세) 씨와 다시 고향으로 들어왔다.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김매자 씨가 떡마을 내력을 이야기한다.
"옛날부터 이곳은 농토가 적고 논농사도 조금씩 지어 농사만으로 먹고살기 힘들었어. 생계유지를 위해 집에서 먹고 남은 쌀과 곡물로 떡을 만들어 마을 밖으로 나가 팔았어. 낙산사나 오색약수 관광객들에게 팔았지."
1970년대 초 한계령에 도로가 뚫리면서 설악산과 동해 관광객들이 송천리 앞을 지나다니게 됐고 마을 아주머니들은 관광객들에게 떡을 팔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밤을 꼬박 새워 떡을 빚어 이른 아침 광주리에 이고 인근 오색약수와 낙 산사, 하조대로 행상을 나갔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게 했어. 잡상인이라고 관광지에 못 들어오게 하고 들키면 벌금을 물게 했어. 도망 다니면서 행 상하고 그러다 들켜 벌금 물기도 하고… 지금은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연로해서 일을 그만두신 분도 계시고 그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같은 큰 대회를 치르면서 국립공원 법이 강화되는 바람에 행상을 금지했을 때 이야기다. 그렇 게 떡 팔던 아주머니들은 2년간 장사를 거의 접었다가 마을 부녀회에서 나가서 팔지 말고 마을에서 팔아 보자는 의견을 모아 7~8명이 모여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마을 입구에서 팔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송천 떡을 한 번 먹어 본 사람들의 맛있다 는 입소문이 나면서 송천 떡마을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다.

 

 

 

설악의 자연과 어머니의 근기로 빚은 떡
송천 떡 맛을 본 사람들은 자꾸 이곳 떡만 찾게 된단다. 보기에는 같은 인절미고 바람떡인데 맛이 다르다는 얘기다. 왜 맛이 다른 걸까. 우선 재료에서 다르고 만드는 과정에서 차이가 난다. 송천이 위치한 자연 조 건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로 오색약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을 논 에 대고 농약을 쓰지 않는다. 떡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공기 좋고 물 맑은 이곳에서 직접 재배하고 얻은 것으로 사용한다. 단오 절식으로 가 장 고가인 취떡에 들어가는 수리취는 산꼭대기 양지 바른 곳에서 직접 채취해 오며 다양한 떡에 두루 들어가는 쑥은 오뉴월 송천 언덕에 지천 으로 나는 쑥을 캐다가 일 년 내내 쓴다. 떡 하나에 자연의 풍미를 그대 로 담았다고 하면 될까. 떡끼리 서로 붙지 않게 하기 위해 보통 기름이 나 물을 쓰는데 송천에서는 벌집에서 꿀을 내리고 난 다음 벌집 찌꺼기 인 밀랍에 들기름 섞은 것을 쓴다. 이것도 떡 맛을 좋게 하는 요소다.
송천 떡이 요즘 사람들 입에 익숙해진 떡 맛과 다른 이유가 또 있다. 보통 유통되는 떡은 공장에서 생산한 쌀가루로 만든다. 이 쌀가루를 보 다 싼 값에 공급하기 위해 수입쌀이나 오래된 쌀로 종종 쓰는데 이런 재료로 만든 떡은 질기거나 딱딱하고 식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송천 떡 은 그해 농사지은 쌀로 필요할 때마다 찧고 쪄서 만들고 있다. 입안에 들어가면 졸깃졸깃하면서 부드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빠지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마을을 경제적 으로 윤택하고 활력 넘치게 만든 '우먼 파워'들의 자부심과 열정이 떡 맛에 더해진다. 어머니들의 희생과 근기가 없었다면'송천 떡'브랜드 도 없었을 것이다. 송천 떡집 아주머니들은 대개 환갑을 넘겼고 최고령 이 69세다.
"떡 만들어 팔아 자식들 학교보내고 시집장가보내고, 다들 그렇지 뭐." 떡을 만들다 보니 젊음은 바람처럼 가버렸고 팔이 욱신거릴 때마다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하는 마음도 든다. 10년 후엔 누가 이곳에서 떡을 만들고 있을까. 대중교통도 음식점도 하나 없는 이곳은 여느 농촌 처럼 노년층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을이 영농조합법 인을 세워 떡 사업 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과 일거리를 만든 덕분에 젊 은이들이 하나둘 안착하고 귀농·귀촌 인구도 늘고 있다.
손원옥(69세) 할머니의 등은 앉으나 서나 떡 빚을 때처럼 구부정하 다. 할머니는 팥고물처럼 거멓게 물든 손으로 말랑말랑한 인절미에 고 물을 듬뿍 묻혀 기자의 입안에 쏙 넣어준다.
"옛날에는 떡 광주리 머리에 이고 망령고개를 넘어 20리를 걸어 나가 떡 팔러 다녔어.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이야기 있지? 그게 송천 마을 전설이라는 얘기도 있었어. 그 전에는 감나무가 아주 많아 감마을이라 했지. 그땐 더 힘들었어. 감을 따다 두 광주리씩 이고 나가 팔았는데 그게 어찌나 무거웠던지. 감에 비하면 떡은 훨씬 가벼워 좋았지. 그 많던 감나무도 어데 갔나 없어졌어. 오지도 그런 오지가 없 었어. 황톳길에, 오두막집에, 밥도 겨우 먹고 살 정도였는데… 그래서 옛날엔 감 팔아먹고 살고, 지금은 떡 팔아먹고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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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설악에서 근기로 빚다 송천 떡마을 아주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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