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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전원생활

모악재와 유휴열 화백
개똥이와 쇠똥이의 생(生)과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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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모악을 보며 산을 배운다. 그리고 나는 그 산자락을 지날 때마다 행복해 하고 든든해 한다. 그 산자락 아래 누가 뭐라고 해도 꿈쩍도 않고 자기 길을 걸어 온 너부데데한 미륵을 닮은 한 인간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휴열 그는 이땅의 어디나 굴러 다니는 개똥이 들과 쇠똥이들을 그려왔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햇살이 고운날 개똥이 같고 쇠똥이 같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활기찬 우리학교 운동장을 보고있는 듯 하다. 오늘 아침의 구이 가는 길에 바라 본 모악은 영락없이 또 모악이다. 마른 지푸라기만 남은 논에 서리가 하얗게 슬었다. 나는 이 쓸쓸한 초겨울 빈 들의 서리가 좋다. 화가 유휴열 집 앞 멀리 바라보이는 구이 저수지에 김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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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전원속 자신의 집에서 전시회를 한다기에 천년의 고도 전주를 찾았다. 모악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 예술인마을 전원주택에서 열린 이번 전시회는 유휴열화백이 ‘모악재’라는 이름으로 여는 6번째 전시회다. 13년전, 모두들 도시로 향하던 그 시절에 그저 지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우연히 찾아들었다는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이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북에서 예술을 합네하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지금은 명실상부한 예술인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전시회가 열린 이 집은 유화백의 친구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지어준 것이다. 최근에 들어선 멋들어진 새 건물에 조금은 주눅드는 낡고 초라한 집이지만 그래도 담쟁이넝쿨이 무성히 자란 단아한 조적조건물은 세월의 운치를 담고 있다.

시인 김용택씨의 유휴열 그림전에 부치는 발문 ‘개똥이와 쇠똥이들의 생과 놀이’를 실었다.

구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봄이면 구이 가는 길은 더욱 아름답다. 길가에 피어 있는 하얀이팝 꽃이며, 우리네 삶의 버짐처럼 희게 피어나는 산벚꽃, 산비탈에 연분홍 복숭아꽃이며, 지붕위에 피어나는 살구꽃, 아슬아슬 바람에 피어나는 산 복숭아꽃들은 나를 어지럽게 흔든다.

평화동 형무소를 막 지나면 정리되지 않는 골짜기의 봄과 가을 아침 그리고 저녁 햇살이 나를 또 사로잡는다. 늦은 가을 미나리들은 빈 들에서 그 얼마나 쌔뜩하게 푸른가. 아, 그리고 눈쌓인 모악의 그 넉넉한 자태며, 비 개인 날의 그 아기자기한 골짜기들, 산이 시작되고, 들이 시작되는 모악, 수많은 전주의 화가들이 이 모악을 그렸지만 아직은 모악은 모악이다. 김제만경에 고봉으로 담긴 이 쌀밥 같은 산은 나를 늘 압도한다.

나는 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모악을 보며 산을 배운다. 그리고 나는 그 산자락을 지날 때마다 행복해 하고 든든해 한다. 그 산자락 아래 누가 뭐라고 해도 꿈쩍도 않고 자기 길을 걸어 온 너부데데한 미륵을 닮은 한 인간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퇴근을 하다 나는 그의 집에 들렸다. 그를 찾으니, 그는 없고 어떤 나이든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먼저 내가 유휴열의 친구이며 그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 분은 휴열이는 없단다. 아하, 그렇구나 이 분이 그의 어머님이시구나. 나는 얼른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새로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가 어디 갔냐고 물었다.

어머님은 “모르것소 내가 어디 가냐고 허먼, 개똥이도 만나고, 쇠똥이도 만난다고만 허고 휭 나가부요. 웬 놈의 개똥이와 쇠똥이가 그리 많은지 원. 나는 얼른 “어머님, 저는 쇠똥이입니다.” 그랬더니 어머님은 비그시 웃으셨다.

우린 맘이 얼른 통한 것이다. 통한다는 것은 서로 환한 것이니 좋은 일이다. 그 자리에서 단박에 쇠똥이 되어 버린 나는 그 어머님의 그 말씀이 너무나 즐거웠고 흥이 났다. 이 땅에 굴러다니는 개똥과 쇠똥, 쇠똥과 개똥이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그의 그림이 확 떠올랐다.

그렇다. 유휴열 그는 이 땅의 어디나 굴러다니는 개똥이들과 쇠똥이들을 그려왔던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햇살이 고운 날 개똥이 같고 쇠똥이 같은 아이들이 뛰어 노는 활기 찬 우리 학교 운동장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놈, 넘어지고 일어나는 놈, 싸우고 우는 놈, 나무를 올라가고, 미끄럼틀을 타고, 펄보에 매달리는 놈, 몸에 남아 있는 힘을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그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이 몸짓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운동장이 터지게 뛰 노는 이이들의 모습이나 화폭이 찢어져라 휘져어 놓은 유휴열의 그림을 닮았다.

그는 화폭이 좁은 것이다. 좁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놀이 판을 만드는 것이다. 풍물굿판의 자진모리 장단처럼, 중모리 장단처럼, 영산가락으로, 겅중겅중 둥게둥게 으쓱으쓱 보릿대 춤으로, 때로 길 굿을 치며 멀어지는 풍물굿같은 아득하고 아늑한 소리가 들리는 판을 짜는 것이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것 같은 그의 말과 몸짓들은 그런 힘을 억눌러 감툰 데에서 오는 역설처럼 보인다. 아마 그는 그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신들린 것 같은 힘을 그 자신도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그의 생각을 온 몸으로 폭발시키는 것 같은 신명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더운 여름날 콧김을 내뿜으며 강변을 내달리는 황소 같고, 벼락을 맞아 부서진 집 체 같은 바위들이 우루루 우당탕탕 청산을 굴러 내리는 것 같다.

그가 한번 질펀하게 쿡 찍는 붓 자국은 커다란 산이 되어 우뚝서고, 그가 붓을 따라 내달리는 자국은 거침없는 산맥이 된다. 숨이 찰 것 같은 절정에서 그가 뚝 멈추면 그것은 소나무가 되고, 그 붓을 가볍게 떼면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난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실로 다양하고 화려 뻑적지근하다. 장난 끼가 덕지덕지 묻어 나는 그림에서부터 저 긴 세월은 견디며 모질게 살아 온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그 감출 수 없는 힘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왔다. 그렇지 않고 그는 못 견딜 사람이다. 그의 그림 그리는 방법은 서양화법에 따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그림이 서양적(?)이지 못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우리 적(?)이다. 그의 (생, 놀이)연작들은 그래서 설득력과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끈질긴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민초들의 신명과 한, 그리고 그 역사성을 찾아 왔다. 그 것이 인간 생존의 원초적인(생, 놀이)라는 연작을 낳게 했을 것이다. 농경 사회의 일상은 일과 놀이이다. 일이 곧 놀이였으며 놀이가 곧 일이었다. 일과 놀이를 따로 구본하지 않았던 우리 문화는 찬란했다. 일과 놀이 속에서 꽃피었던 화려한 예술의 절정이 풍물놀이다.

유휴열의 (생, 놀이)는 화려하고 장중한, 때로 전투적인 풍물놀이의 율동과 몸짓들이 차고 넘친다. 지배 된 노동의 갈등이 자연과 자연, 사람과 사람사이의 통로를 막고 맺히게 한다면 놀이는 그 맺힌 것을 풀어낸다. 그러므로 놀이는 격정적이고 신명을 부른다.

삶의 끝없는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은 끝없는 해방을 꿈 꾼다. 이 해방놀이의 걷잡지 못하는 ‘무질서’는 자연의 질서에 다가가 섞이며 세상에 활력을 주고 새로운 생명 질서를 창조한다. 예술 작품은 그런 인간과 자연 질서가 상승 작용한 결과이다. 관념화된 질서란 그 얼마나 고루하며 관료적이고 보수적인가.

나는 그와 오래오래 정담을 나누며 살아오지 않았다. 나는 전주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땅에서 예술가로, 아니 진정한 인간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뼈저리게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니 진정한 인간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뼈저리게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짜들이 뭉쳐 떼거리를 만들고 그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껍데기들이 예술이라는 허울을 쓰고 세상을 활게 친다는 것을, 그는 이 전주가 얼마나 힘드는 곳인지, 아니 이 땅의 한 구석 어느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 뼈가 시렸을 것이다. 그가 온몸으로 뚫고 왔을 저 켜켜이 쌓인 미술계의 구가에 나도 진저리를 친다. 인간적인 양심과 예술에 대한 사회적인 확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신념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가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인간 정신과 예술 정신은 누가 파묻는다고 해서 파묻혀지는게 아니다.
진정은 차고 넘치는 법이며 구석에 있을수록 더욱 빛난다. 그 빛은 도저해서 언제든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는 알 것이다.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철저하게 멀리해야 예술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나는 그림들을 열심히 보아왔다. 한 장의 그림 앞에 서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림들을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림 앞에 서서 내가 긴장하고 섣달 큰 애기처럼 설레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과 세상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고뇌도 없는 붓질이 아니다. 그 철 없는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림은 기술이 아니며, 작가는 기능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똥폼은 아무리 화장을 잘해도 끝까지 똥폼인 것이다. 좋은 그림은 아무리 커도 작아 보이고, 아무리 작아도 커 보인다. 그러므로 한 폭의 그림은 또 다른 세계의 완성이다. 그냥 불감만 칠해 놓은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할말이 없고, 좋은 그림 앞에 서면 사람들은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더 좋은 그림 앞에 서면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화폭 속에 놓여 있는 한 그림은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어떤 부분을 떼어놓아도 독립된 한 세계를 이룬다. 한번 긋어내린 붓자국이 다른 붓자국들과 긴장을 이루며 동시에 어우러지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지 못한 그림은 죽은 그림이다. 나는 그림 속에 놓여 있는 사물들의 살아 있는 숨결과 그 긴장이 좋은 것이다.

유휴열의 그림들은 그 긴장의 강도를 점점 높여 온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좋은화가는 다시 그 긴장을 풀어헤치고 자유를 얻는다. 자유, 눈부신 자유를 얻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들이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경지이다. 나는 그의 끝없는 정신이 좋다. 그 끝없는 자기 행진은 그를 늘 거듭 죽게 하고 거듭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 그것이 인생과 예술가의 힘이 아니던가. 그 힘이 세상을 감동시킨다.

나는 그림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거나 비평하거나 비판하는 공부를 해 오지 않았으며 그럴 처지도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한 장의 그림 앞에 서서 감동의 밀도와 깊이를 느낀다. 감동이야말로, 삶의 핵심을 표현 할 때만 가능하다. 어느 시대 어느 때든 삶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 없는 자기 확인이다. 예술에서의 진실이야말로 무너지지 않는 힘이다.

오늘 아침의 구이 가는 길에 바라 본 모악은 영락없이 또 모악이다. 마른 지푸라기만 남은 논에 서리가 하얗게 슬었다. 나는 이 쓸쓸한 11월의 빈 들의 서리가 좋다. 화가 유휴열 집 앞 멀리 바라보이는 구이 저수지에 김이 난다. 나는 두어 번 만나 뵌 그의 어머니에게서 그의 인생역정과 그의 예술 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님이 너는 어디를 그렇게 돌아 댕기냐니까.

어머님에게 개똥이도 만나고 쇠똥이도 만난다는 대답을 하는 장면을 이따금 나는 떠올리며 혼자 웃는다. 무심한 두 모자의 그 정겨운 대화 장면에서 나는 유휴열의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그의 그 따뜻한 정이야말로 세상을 받치는 힘이다. 유휴열은 어머님을 여의고 가족이라는 따뜻한 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는 요즘 가족을 소재로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들고 있다. 유휴열은 다른 예술적인 모색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가 자기의 세계를 끊임없이 변모 시켜왔던 것처럼 새로운 세계에 이르길 기대한다. 얼굴에 너부데데한 미륵 같이 큼직한 사나이, (그에게서 나는 한 조선 사나이 냄새를 맞는다.

그에게서는, 세상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떠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산의 냄새가 난다.) 유휴열을 어디선가 만나 “어, 어디산데야?”하고 물으면 그는 눈곱만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사나이 가는 길을 왜 물어?”한다. 사나이 가는 길을 진짜 묻지 마라.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나니 ‘인생의 길에’ ‘예술의 길이’ 어디 끝이 있,다.던,가.田

■ 글 김용택 / 사진 김성용

‘모악재’와 유휴열 화백
모악재에서의 10년 … 그리고 창작

수려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휘감아 돌고, 커다란 저수지가 내려다 보여 마음이 포근한 곳,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고 백년도 넘게 자리를 지킨 나무가 있어 든든한 이곳에 둥지를 튼지도 어언 십 여 년이 지났다.

항상 마음을 푸근하게 담아주던 저수지가, 얼마 전부터 산업도로 공사로 가로막히고 하늘이 도로위에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과분할 만큼 아름다운 이곳.

6년 전 <모악재>라 이름 붙인 문화공간을 만들어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지극히 사랑으로 감싸주는 지인들이 허물없이 찾아주고, 명창들이 수리 공부를 하며 머물던 복 받은 이곳에 조소작품을 만들어 세워 보았다. 실로 세월은 왜 이렇게 빨리도 흐르는지... 지금 나이에 실험적이고 생소한 작품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더 지나면 용기도 의욕도 무디어질 것 같아서 발을 내딛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흐르는 시간만큼 농익는 날을 기대하며 평면작품과 입체작품으로 감히 오픈하우스를 한다. 자연과 더불어 한 점으로 살아가면서 ‘창작’이란, 일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무수히 곱씹어 본다.

가족이란 도데체 무엇인가?
이곳에 와서 떠나 보낸 사랑하는 나의 아이, 그리고 몇 달 전 명을 다하신 우리 어머님 등 개인적인 것은 물론 분단의 비운 속에서 다시 만나고 간절히 찾는 가족의 의미,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이 아닐까?

아직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작품 앞에 선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사랑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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