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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에 지은 집

대숲에 이는 바람 선선한 하늘하래 첫동네에 지은 통나무집


지리산의 짙푸른 녹음이 숨찰 정도로 빼곡한 청학동에 집을 지어 덕산료(德山寮)라 이름지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넓고 시원하게 살고 싶어 거실도 넓게 하였다. 하늘아래 첫동네의 유리알 같은 햇살과 대숲에서 이는 시원한 바람에 취해 여름을 나는 청학동의 집을 찾았다.


두류산은 높고 석양의 구름은 낮은데
일만골 일천바위는 회계산(중국 절강성에 있는 산)을 닮아있네
지팡이 짚고 청학동을 찾으려 하니
건너편 숲속에선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보일듯 말듯 삼산(중국 강소성에 있는 산) 밖에 아득하고
이끼낀 글자만 희미하게 남아있네
묻노니 청학동은 어디메뇨
꽃잎만 어지럽게 흘러 더욱 낙망하여라
고려때 청학동을 찾아나섰던 이인로는 결국 찾지 못하고 그가 쓴 책 파한집에 이런 시만 남겼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찾아 나섰다. 푸른 학이 산다하여 붙여진 이름 청학동도 이런 이상향 중 한곳이다. 해발 9백m의 지리산에 있는 산골마을인 청학동에는 지금도 상투튼 노인들과 댕기머리를 한 아이들을 볼 수 있다.

행정구역상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로 되어 있는 이곳 청학동에 양재석씨는 97년 통나무집을 지어 살고 있다. 민족의 영산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이 마을에 진주시내서 전기공사업을 하던 그가 집을 짓기로 마음먹은 것은 7~8년전 쯤이다.

이때 이미 그는 이곳 청학동에 집을 짓고 살기로 마음먹고 평당 7만원에 1천여평의 땅을 구해 놓았다. 청학동을 드는 마을 어귀의 언덕위였다.

사업을 하면서 매일 피곤해 있었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하여 통나무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지어진 통나무집들을 많이 보고 다녔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시베리아산으로 지은 통나무집이었다. 추운지방의 목재라서 그런지 다른 통나무보다 우선 단단해 보였다. 통나무의 색깔도 붉은기가 많이 돌아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시베리아산 통나무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전문시공업체인 코에코통나무주택에 공사를 의뢰했다. 96년 10월경이었다. 공사를 시작한지 5개월정도 걸려 창고 1동을 포함해 60평의 주택을 완성, 97년 2월 입주를 했다. 평당 건축비는 3백50만원정도 들었다.

설계는 직접하였는데 내부구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거실공간이다. 집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거실이 넓어야 답답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거실을 넓게 했다. 거실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방, 주방, 화장실 등의 공간들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 집을 짓는데 쓰인 통나무는 지름 18㎝ 굵기며 방은 모두 황토방으로 꾸몄다. 거실 바닥은 온돌마루로 했다. 지붕은 수공식 다이아몬드형 동판을 사용해 마감했다.

특히 조경에 신경을 썼는데 마당을 3계단의 단차를 두어 꾸몄으며 층마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각종 나무를 심었다. 이렇게 조경을 하는데 약 1억원의 비용이 들었다. 안주인 박숙현씨는 이 집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고 있다.

그녀는 이 집을 짓고나서 흔한 하자 하나 없었다고 자랑한다. 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냉난방비를 많이 절약할 수 있으며 습도조절도 잘 되고 통풍도 잘 된다. 음식냄새도 잘 빠지기 때문에 실내는 항상 청결하고 뽀송뽀송한 느낌을 준다.



양재석씨는 불교에 심취해 있다. 집의 현판을 덕산료(德山寮)로 하였는데 덕산은 그의 법명이다.
양재석 박숙현씨 부부는 아이들 학교때문에 진주시내에서 지금은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이곳에 와서 생활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1학년인 아이들이 대학진학만 하면 아예 이곳에 들어와 살 생각이다. 지리산 끝자락 청학동의 유리알 같은 햇살과 푸른 대숲에서 이는 바람에 이들 부부는 흠뻑 빠져 있다. 田

■ 글·사진 / 김경래

청학동 여행정보

상투 튼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하늘아래 첫동네

경남 하동군 묵계리의 청학동은 지리산 삼신봉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8백m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다. 왜병에 항거하던 사람들이 산깊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후 인구는 점점 늘어나 일제시대에는 1백여호에 이르게 되었다.

광복이후에는 동학의 아류인 강대성이란 사람이 '유불선합일사상'을 믿는 신도들을 데리고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6.25때는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전주민이 하산하고 마을 전체가 불타버리기도 하였고 이후 58년에 다시 20여가구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현재는 40여가구 2백여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갱정유도란 신흥종교를 믿고 있는데 집단생활을 하며 가옥은 전래의 초가집 형태를 띠고 있다. 의생활도 전통적인 한복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성인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다. 최근까지도 마을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마을 서당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이렇게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청학동이었지만 세상에 알려지면서 찾는 발길이 많아져 마을 어귀에는 민박집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마을길이 포장되어 있고 현대식 주택과 자가용까지 갖추어 놓고 살고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하동을 목적지로 하여 찾아가면된다. 서울서 간다면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하동으로 가는 버스가 있으며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서울역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하동까지 갈 수도 있다.

하동에서 청학동으로 가는 버스는 아침 8시 20분부터 저녁 7시 20분까지 하루 6회 운행한다. 진주에서도 청학동을 갈 수 있는데 진주에서는 버스가 아침 7시 10분부터 저녁 3시 50분까지 하루 3회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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