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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양양에 지은집

낙산사 일출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채를 닮은 벽돌집


낙산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양양의 언덕위에 성채를 닮은 웅장한 벽돌집이 하나 있다. 집주인 안석현씨는 이집을 꼬박 14개월이 걸려 완성했다. 애초 시공업자에게 공사를 맡겼으나 중도에 문제가 생겨 직영으로 처리했다. 내부는 목조로 마감했는데 목수를 구하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다는 낙산해변의 벽돌집을 소개한다.


북쪽의 통일전망대에서 거진과 속초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강릉-동해-삼척-울진-포항-울산으로 이어지는 긴 길이다. 동해안을 끼고 바다와 함께 달리는 이 도로는 급커브가 많아 험한데 그 경관이 아름다워 자칫 한눈을 팔게 되는 위험한 길이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이 길을 지난다면 쉼없이 따라오는 바다에 취하고 때론 산에 취하여 달릴 수 있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특히 이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약 65개의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는데 일출로 유명한 낙산해수욕장을 비롯해 하조대, 경포대해수욕장 또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 옥계, 망상, 맹방, 임원, 호산, 후진 등 유명한 해수욕장들이 많다. 게다가 모래시계란 TV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서 뜨기 시작한 정동진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안석현씨 댁은 이 해안도로가에 있다. 속초에서 강릉 쪽으로 가다보면 대포항을 지나 낙산해수욕장이 나온다.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낙산해수욕장을 빤히 내려다 보는 양양읍 포월리 언덕 위에 이 집이 있다. 성채를 닮은 듯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집은 벽돌의 모자이크 무늬가 선명해 도로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양양에서 사업을 하는 건축주 안석현 씨가 이곳 준농림 임야를 구입한 후 형질변경하여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부터다. 그후 꼬박 14개월이 걸려 올 6월 완공하여 입주를 했다.

집주인이 설계의뢰를 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공간을 넓고 시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층 70평, 2층 30평 등 총 1백평의 큰 집이 되었다. 실내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거실이며 넓게 처리했다. 거실 크기만 22.5평이다. 골조는 조적으로 하고 외벽도 벽돌로 마감했다. 단 실내 마감은 건강을 생각해 목조로 했다.

이집을 짓는데 순수한 건축비만 평당 4백50만원정도 들었으며 토목공사와 내부 인테리어까지 포함한다면 건축비는 거의 평당 6백만원정도 치였다. 시공을 건축업자에게 맡겼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겨 건축주가 직영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실내마감공사에서 많은 애를 먹었다. 목재로 마감을 하다보니 제대로 된 기술자를 구하기 힘들었다.

이 집은 동향으로 지어져 집에서 일출을 매일 볼 수 있다. 그것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낙산사의 일출을 집에서 볼 수 있도록 집의 위치를 높게했다. 거실은 바닷쪽으로 통창을 냈으며 2층 거실도 바다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田

■ 글·사진 / 김경래



여행정보·낙산사
의상대 일출 아름다운 관동의 명소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바닷가에 위치한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곳 해변의 굴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굴속에 들어가 예불을 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주었다. 그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 했다. 이후 낙산사는 몇차례의 중건을 거쳐 그 규모가 커졌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 범일대사가 중창했으나 몽고란으로 소실됐다. 조선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으며 예종 원년(1469년)에도 왕명으로 다시 중건했다. 이후 인조·정조 때 또다시 중건했다. 6.25를 맞으면서 소실되어 1953년에 재건했다. 낙산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의상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의상대사의 좌선처였던 곳에 1925년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했다. 육각정으로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위에 있어 전망이 좋아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장관이다.

홍련암
의상대사가 문무와 12년 입신도중 돌다리 위에 이상한 청초를 만나 쫓아가니 석굴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사는 이상히 여겨 석굴앞 해중 반석위에 나체로 정좌해 7일 7야를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니 깊은 바다속에 홍연이 솟아올라 그 홍연 속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심중소원을 간절히 기원하니 소원이 뜻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홍연암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홍련암은 목조와가로 지어졌는데 전고가 7m50㎝, 폭 8m, 세로 6m나 된다.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축조하였다고 전해지며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 홍예모양으로 쌓은 석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을 따라 각 고을의 원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쌓았다고 전한다.

동종
조선 예종이 그의 부왕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 꼬리를 튼 용 두마리가 뒤엉켜 종을 달아 매는 용뉴를 이루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동종의 하나다.

7층석탑
단층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6.2m의 이 탑은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이 있으나 상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장의 돌로 되어 있다. 탑신보다 넓고 거의 같은 두께의 탑신 괴임돌이 있는 것이 이 탑의 특이한 양식으로 고려시대 이래 특이한 양식의 석탑이다. 창건당시에는 3층이었는데 세조 13년에 현재의 7층으로 조성했다.

벚꽃무늬담장
원통보전의 둘레를 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 담장은 조선 세조가 낙산사를 중수할 때 처음으로 축조했다고 전한다. 현재 대부분 터만 남아 있고 근래들어 전체적으로 연결 보수했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상하 교차로 동일한 크기의 둥근 화강석을 반복해 박아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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