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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인 주택 만들기

직장동료 다섯이 모여 만든 양평 국수리의 거북마을
묘지 위에 지은 네채의 스틸하우스

직장동료 다섯명이 모였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시작만 하면 그저 끝날 것이란 뱃장으로 집짓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손수 현장일까지 챙겨가며 고생한 결과 네채의 집이 탄생했다. 그리고 봄꽃들이 만발한 화창한 봄날을 택해 이사를 했다. 동호인 중 한명은 나중에 집을 짓기로 하고 우선 조립식주택을 지어 주말주택으로 이용하고 있다. 양평 국수리의 거북마을, 땅의 모양이 거북의 등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동호인 단지에 지은 네채의 스틸하우스를 소개한다.
■ 글 / 김경래 사진 / 김경래, 류재청

전원의 꿈을 품고
"같이 집짓고 같이 살면 어떻겠어?"

애초에는 세명이 모였다. 김현중, 박동준, 서창교 이들 세 명의 총각사원은 광고회사의 입사동기로 비슷한 생각,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의기투합을 했다. 시도때도 없이 만나 소주를 마시고 그럴때면 세상이 안주가 되기도 했고 더러는 회사가 안주가 되었다.
그렇게 소주와 안주만으로 시간을 죽이기에는 자신들의 젊음이 너무 뜨거웠고 게다가 그동안 닦은 큰 배움(大學)도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말대로 거추장스런 지식만 연소시키지 못하고 부담스레 짊어지고 있다는 그런 회의가 생기기 시작할 즈음 셋중 누군가가 목청을 가다듬어 제안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맹숭맹숭 만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사 때 자금이 필요할 지도 모르니 지금부터 월급에서 각자 얼마씩 털어 적금이라도 들어놓는게 좋겠어."
“좋아 좋아…" 셋은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극비의 자금모의를 했다.

그후 시간은 바람과 같이 흘렀다. 김현중은 영어교사, 박동준은 소아과 간호사, 서창교는 수학교사와 그럴듯한 연애를 하고 장가도 가고 그리고 자신의 염색체를 나눈 또다른 가족도 생겼다. 덩달아 적금 탈 때도 되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막상 거금을 모아놓고 나니 그들을 기다려주는 거사는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야 영웅이 나는 법인데 ‘문민정부'의 태평성대는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에게 거사의 명분을 좀처럼 제공하지 않았다. 명분없이 나서면 민심을 잃는 법.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서글픔을 한타래씩 풀어 한동안 소주만 마셨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하이.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모은 자금을 어디다 숨겨 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
“그럼 스위스 은행까지 갈 필요는 없을까?"
그때 김밥재벌의 꿈을 키우고 있던 박동준이 입을 열었다.
“땅덩어리가 좁은 대한민국에선 그래도 땅에 묻어두는 것이 최고란 생각이 드는데… 땅을 사두는 것이 어떻겠어?"
“좋아 좋아…"
내친 김에 박동준은 자신의 속내를 내보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땅을 같이 사서 그곳에 함께 집을 짓고 살면서 후사를 도모하는 것은 어떻겠어?"
셋은 모두 기막힌 생각이라며 손뼉을 쳤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하여 셋은 멀리 한강의 강바람이 씻겨가는 양평의 언덕배기를 찾게 되었다. 거북의 등모양을 한 땅. 일제시대에 이미 명당자리로 점지되어 임금이 난다는 소문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묘지로 도장이 찍혀 있는 땅에 이들은 집을 짓기로 마음먹고 그 언덕배기 위에서 셋은 다짐을 했다. 이곳에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이 백년이고 천년이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우리들의 도읍을 정하겠다고…

땅은 마련했는데
거북 등을 닮은 땅 1천98평을 평당 25만원에 구입

막상 전원주택을 짓기로 하고 땅을 결정했지만 구입하기에 셋에게는 너무 큰 땅이었다. 그래서 자신들과 생각을 같이할 수 있는 전원스런 동지를 찾아나섰다. 그것이 96년 7월의 일이었다.

직장 선배인 박정래 부장을 포섭대상으로 삼아 곰탕집으로 불러냈다. 멀리 긴 강이 흘러가는 양평의 넉넉한 마을 끝자락에 있는 언덕배기의 거북 등껍질을 닮은 명당지, 서울서 한시간정도 거리에 있고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있는 곳…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부장은 대답을 했다.
“그래 좋아. 같이 해보자."
“에이 어쩐지 너무 심심하네요. 형이 그렇게 빨리 결정해 버리니까… 근데 형 잘 결정했어요. 형도 가보면 깜빡할 거예요. 정말 좋은데라구요. 한 번 멋진 신세계를 열어보자구요."
동지가 한명 더 생기자 탄력이 붙었다.

곧바로 땅을 계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땅을 사겠다고 하니 땅주인이 한발 물러섰다. 애초 평당 19만원 얘기하였는데 21만원을 요구한 것이다. 동지들끼리 머리를 맞댄 후 그 가격이라도 사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주인은 또다시 25만원을 요구하여 결국 평당 25만원에 1천98평의 땅을 매입했다. 진입로가 없어 20평은 평당 35만원에 별도로 추가 매입했다. 여기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로 4백만원이 추가되어 부지매입에 총 2억8천5백50만원 들었다.

개인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사람이 더 필요했다. 백지장도 다섯명(?)이 들면 더 가벼워진다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또다시 포섭작전에 나섰다.

김현중 동지와 같은 팀에 있는 김창렬 차장이 물망에 올랐다. 안사람이 삼성강북병원 의사인 그가 국수의 땅을 다녀온 후 의기투합했다. 단 곧바로 집을 짓지는 못하고 좀 기다렸다 짓겠다는 조건이었다. 다섯명의 동지가 모이자 무서운 것이 없었다. 8월 2일 계약금, 9월 2일 중도금 그리고 10월 15일 잔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구당 5천7백1십만원이 들었다.

남들은 제비뽑기를 한다고도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집터를 정할 때 직장의 최고참인 박정래씨의 의견을 따랐다. 부지의 가운데로 길을 내고 우선 박정래씨 자신이 문간을 선택했다. 단지의 초입에 자신이 살면서 단지를 지키는 문지기가 될 것을 자청하였고 나머지 동지들의 집터도 정해주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현중이는 맨아래 그 옆은 시간을 두고 나중에 집을 지어야 할 창렬이, 단지의 가운데는 동준과 창교가 사는 것이 좋겠어."
“좋아 좋아 …"
그렇게 불만 하나 없이 각자의 집터는 정해졌다.

어떤 집을 지을까?
수많은 방황 끝에 내린 결론 스틸하우스

땅은 이제 내것이 되었다. 한고개를 넘으니 또 고개가 나왔다.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었다. 아는 것은 힘이다. 한수 배우기 위해 전원주택에 대해 한자락씩 한다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모두들 자신이 최고라며 자랑만 늘어졌다. 요구하는 비용도 천차만별이었다. 누가 천사고 누가 늑대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곳은 한눈을 팔다가는 아차하는 순간 잡혀가기 딱 좋은 정글속이었다.

각자 분야를 나누어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통나무주택, 2×4목조주택, 조적조, 스틸하우스 등 각자가 스터디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토의한 결과 스틸하우스가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 해를 넘기고 97년을 맞았다. 새해 2월 15일 스틸하우스 시공업체인 H주택을 만났다.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스틸하우스로 짓겠다는 결정은 굳혀졌다. 게다가 H주택은 토목 및 설계에 두루 능하며 경험도 가지고 있다 했다.
특히 H주택은 최초의 스틸전원주택단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저렴한 건축비로 정성을 다해 지어주겠다며 적극성을 보였다. 그렇게 집지을 사람을 찾아 다니던 중 자신들이 그토록 아껴 사두었던 땅, 거북의 등껍질이 벗겨지는 사고가 났다. 동네 사람이 표고버섯을 재배하겠다는 욕심으로 부지에 있던 참나무를 새주인들의 허락도 없이 몽땅 베어간 것이다. 속들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외지인의 죄값(?)을 치르는 셈치고 참았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빨리 집을 지어 입주하자는 다짐만 서로 확인했다. 곧바로 경계측량과 현황측량에 들어갔다. 시공업체 선정을 서둘렀다. H주택과 또다른 업체 등 두 개의 스틸하우스 시공업체가 최종심에 올랐다.

두업체를 놓고 구체적인 평가에 들어갔다. 평가항목은 인허가, 토목, 건축, 경비, 민원, 신뢰도, 일정준수, 설계 및 감리, A/S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 20점, 총 180점 만점으로 하여 점수를 매겼다. 그결과 H주택이 148점으로 점수가 높게 나왔다.

4월 16일 H주택과 전체 공사금액 5억원에 계약을 했다. 6월 1일 건축신고에 들어가 9일부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 26일 토목공사가 완료되었고 일부 스틸작업도 완료되는 등 공사는 잘 진행되어갔다.

그런데 IMF로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히면서 거북마을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공사가 지연되는 일이 생겼다. 자재 수급에도 문제가 생겨 도급공사계약도 변경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애초 생각했던 건축면적에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면적도 늘어났다.

애초 97년 11월 30일 입주계획이었던 일정도 98년 4월 25일로 약 6개월정도 연장해야 했다. H주택의 요구로 공사금액을 5억3천6백65만원으로 올려 계약을 변경했다. 해를 넘기면서 H주택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현장에도 문제가 생겼다. 결국 98년 3월 14일 H주택으로부터 공사포기 각서를 받았고 며칠후 H주택은 부도가 났다.

26일자로 도급계약의 해제를 통보한 후 직접 나서는 길밖에 없었다. 다행히 H주택의 이해수 현장소장이 집을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주겠다 하여 안심은 되었으나 모든 것을 직영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동호인 개인들의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들 열심히 다니고 있는 회사는 IMF로 인해 경량으로 구조를 조정한다며 난리법석이었다. 동료들이 하나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런 살기등등한 회사분위기 속에서도 박정래 부장은 국장이, 김현중, 서창교씨는 차장이 되는 등 거북터의 사람들은 명당의 지기때문인지 숙청의 피바람이 비켜갔고 오히려 승진들을 했다.

박정래 씨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살겠다는 생각으로 아예 국수리의 월세집을 얻어 거처를 옮겼고 박동준 씨는 순전히 자의로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꿈에도 그리던 김밥체인점 사장이 되었다. 게다가 다들 빠듯한 예산으로 집을 짓다보니 자금마련에 그야말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잖아도 신경 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현장까지 챙겨야 하니 머리숱은 점점 줄어들었다.

화창한 봄날 봄꽃의 빵빠레를 받으며 드디어 입주

그동안 최고로 잘 나가는 광고회사에서 폼나게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건축공사장의 현장소장이 되었다. IMF의 농간이었고 작게는 시공회사를 잘못 선정한 책임이 고스란히 거북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일일작업일지를 쓰고 작업공정들을 점검해야 했다.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피곤했다. 박정래씨 가족은 아예 국수리로 이사를 했다. 국수리 마을 사람들과도 꽤 친해져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큰 무리없이 단지의 모양이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완성된 집은 단지의 파수꾼 박정래 씨 집이었다. 근처에 처자식까지 데려와 살면서 시위를 하고 있으니 가장 빠를 수 밖에…

박정래씨는 5월 20일 집의 마루와 장판을 깔고 23일 드디어 입주를 했다. 초록 봄볕이 거북의 등껍질을 두툼하게 감싸던 화창한 봄날을 택해, 봄꽃들의 빵빠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북마을로, 꿈에도 그리던 전원주택으로 박정래씨 가족은 이사를 했다.

며칠후인 5월 30일 김현중씨 가족이 그리고 6월 2일 서창교 씨, 6월 5일 박동준씨 가족이 차례로 입주를 했다. 박정래씨 부부와 아들 딸, 김현중씨 부부와 노부모 그리고 아들 딸, 박동준씨 부부와 아들 딸, 서창교씨 부부와 아들 딸, 짜맞춘 듯한 가족 18명이 거북마을 주민이 되었다.

집들이에서부터 가족행사까지 서로 챙기고 그럴 때마다 집을 벗어나 마을로 나서는 크고 작은 웃음소리들. 단지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살아보니 더 좋았다. 집의 평면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다 수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늘 불만이지만 스틸하우스 자체는 만족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집평면의 구조조정을 단행할 생각이다. 벽난로도 만들고 공간도 좀 더 효율적으로 꾸밀 생각이다.

거북마을에서 크는 애들은 단지의 모든 집이 자기집인양 몰려 다니며 한바탕씩 소란을 피우고 그런 소란함 속에서 텃밭에서는 옥수수며 토마토가 애들과 같이 익어간다. 정원에는 붉은꽃, 노란꽃, 하얀꽃들이 올해는 많이 피었다.

올 여름엔 유난히 더웠다는데 이곳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매미소리도 유난히 맑았다.田.

■ 묘지에 전원주택 짓기
전원주택은 대지와 농지전용, 임야형질변경을 통해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잡종지나 특수지목 중 묘지, 유지 등의 경우에도 전원주택 건축이 가능하다.
묘지에 전원주택을 지으려면 우선 묘가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현장사진을 촬영해 두고 신문에 묘지 이장공고를 게재한 후 건축신청을 하면 된다. 이 경우 농지나 임야와는 달리 전용허가와 같은 절차와 개발부담금, 대체농지조성비 등이 없어 시간과 비용면에서 이득이다.
단 묘지의 경우 보통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 많으므로 주변보다 땅값이 비싸다.

■ 거북마을을 만든 사람들과 업체들

발의: 박동준(산들김밥 대표), 서창교(제일기획 차장), 김현중(제일기획 차장)
현재주인: 박정래(제일기획국장), 김창렬(제일기획 부장), 박동준, 서창교, 김현중
부지중개: 성기호(우신중개사무소 대표), 박화서(상록수공인중개사 대표)
건축: H주택(3월 17일 부도), 직영(이해수 소장)
설계: 다우SPC, 아키인
슁글: 창운산업
설비: 박래선
전기: 청한전기
도장: 강동상사
외장: 혜암건업
AL: 대명산업
조명: 우진조명
보일러: 한진
지하수: 이완배
토목: 국일중기
가구: 이해수
유리: 대성유리
온돌마루: 유송산업
시트: LG 아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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