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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사람이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의 산물이다. 집이 자연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이번에는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집은 그렇게 발전하면서 기능에 따라 분화한다. 남은 곡식을 저장하려고 창고를 짓고,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측간을 만든다. 또한 수확이 많은 집과 수확이 적은 집은 다른 규모의 창고가 필요하다.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방이 늘어난다. 사회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의 집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집보다 커진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집을 찾아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사회 환경 때문에 만들어지는 집은 우리가 먹고 자는 주거 이외의 모든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 시설, 궁궐, 관공서, 시장, 공연장, 전시장, 운동 경기장 등 가족이 생활하는 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지어진 집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면 거기에 맞는 집을 짓게 된다. 사회 환경의 변화를 관찰하면 이제까지 하고 다른 건물의 발생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개발업자(Developer)는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찾는 직업이다.

우리들이 사는 집도 사회 환경에 따라 변한다. 어떠한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 상업기반 사회와 농업기반 사회는 집 구조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다.

집의 구조가 다른 것은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농업 사회는 소나 말 같은 가축과 쟁기, 호미 등 농사에 필요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 가축과 도구를 관리하려면 마구간과 가축 사료를 저장하는 창고 그리고 농기구를 보관하고 벼리기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

자연히 농사를 짓는 집은 규모가 크고 대지 면적도 넓다. 상업 사회에서는 농업 사회처럼 가축이나 농기구가 필요하지 않다.

상업 사회에서는 책상과 서류를 보관할 서류함 그리고 물건을 팔기 위한 진열대와 쌓아 둘 창고가 필요하다. 생활하는 집에 붙어 있다면 가게와 사무실이 필요할 뿐이다. 이처럼 살아가는 직업의 차이는 집의 구조를 바꾼다.

또한 주변 환경의 안정성도 집의 구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치안이 안정된 곳의 집과 그렇지 않은 곳의 집은 다른 모습이다.

육칠십 년대 도시에 지은 집을 보면, 담에는 유리병 조각을 꽂아 놓거나 철조망을 설치했다. 그러나 시골에는 담이 없다. 이것은 바로 불안감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따라 변하는 집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사회가 불안하면 닫힌 집을 지어

일반적으로 기와집은 부잣집, 초가집은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생각한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부안의 김상만 가옥을 보면 기와집이 곧 부잣집이라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집 구조에 나타난 방어 현상
김상만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0호)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당대에 손꼽히는 거상의 집이지만 전통적인 초가집이다. 이렇게 지은 것은 시대상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김상만의 선친은 고창군 부안면 봉암 인근에서 살다가 도적을 피해 줄포리로 이사했다. 고창 집은 줄포 집과는 달리 기와집이었다. 당시는 도적이 날뛰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김상만의 선친은 줄포리로 이사 와서 집을 지을 때 부자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초가로 지었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집에 방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집의 구조 중에서 불안한 사회상을 잘 반영하는 것은 담과 폐쇄성이다. 담은 집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가장 중요한 구조다.

사회불안이 가중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높아지는 담이고, 그 다음은 집 구조가 폐쇄적으로 변한다. 담장과 집 형태를 보면 그 지역의 치안 상태를 알 수 있다.

태백산과 경상도 산간 지역의 집이 폐쇄적 구조인 ‘ㅁ’ 자 구조를 한 것은 이 지역이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불안한 사회구조에 놓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조선조 중기(1571년)까지만 해도 서울 근교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암의 고향인 해남에서도 노비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해남에서조차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면 경상도 지역의 산간은 산짐승의 피해가 심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혹자는 경상도 지역의 폐쇄적인 집 구조와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개방적인 집 구조를 성리학의 학문적 계열에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너무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이 황의 제자 계열의 집 구조가 폐쇄적이긴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많이 살았기에 나타난 현상이고, 근본적으로는 자연적인 요소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폐쇄적 구조의 사합원, 객가, 탑상주택
사회의 불안 때문에 집의 구조가 폐쇄된 예를 외국에서 찾아보자.

먼저 중국의 집을 살펴보면 매우 폐쇄적인 구조로 돼 있다. 필자도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집에 외부로 난 창문이 없고 담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집 구조는 상류층일수록 더욱 심하다.

사합원(四合院)이라는 중국의 상류주택을 보면 높은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조가 이렇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다. 한 나라 때 만들어진 토기를 보면, 이때 사합원의 원형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합원의 조성 배경을 리원허는 《중국 고전 건축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불안하고 동요된 상황에 처해 있었으므로 건물을 설계할 때 방위성을 한층 강조했다.

문과 창문 역시 주변의 담에 달아서 임의로 열 수 없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사회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불안한 사회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합원이 가족 단위로 위험에 대처하려고 한 경우라면, 집단으로 위협에 대처한 사례는 중국 남부 푸젠성[福建省]에 있는 객가(客家)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의 집단 주거지는 커다란 원형 성채인데, 그 안에 수백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이러한 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그 집단이 매우 특이한 조직이어서 자폐적 구조를 가졌거나 외부의 위험에 집단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다.


비슷한 예를 유럽에서 찾아보자. 11∼12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를 보면 탑상주택이 매우 많다.

탑상주택은 도시에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봉건귀족과 신흥 상공귀족 간의 극심한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공격과 방어를 위해 지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가문의 알력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을 다루었을 만큼 당시는 가문 사이의 충돌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다른 가문의 집을 감시하려고 남보다 더 높은 탑을 쌓다 보니 점점 규모가 커져 수십 미터 높이에 이르는 건물이 생겨난 것이다.

같은 책에 따르면 이러한 탑상주택은 이곳 외에도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와 코카서스(Kavkaz) 지방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을이 이민족의 이동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생존의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일제가 조작한 식민사관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침략으로 얼룩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이나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집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의 집은 전쟁이나 외부의 침입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집의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안정된 사회였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천여 차례의 침략에 허덕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허구란 것을 알 수 있다.

안정된 사회는 담이 낮아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담은 영역을 구분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담을 통해 사회현상을 상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담 높이를 보면 도시하고 지방이 다르다. 같은 지역에서도 높이가 다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담의 역할이 사회 환경에 따라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던 필자로서는 시골의 담이 왜 낮은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직 집에서 담이 차지하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의문은 양동마을의 관가정(觀稼亭)을 답사하고 완전히 해소됐다.

관가정의 담은 매우 낮다. 특히 앞쪽에 있는 담은 1980년대 보수하면서 관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이렇게 담이 없거나 낮은 이유는 그야말로 당호(집에 붙인 이름)인 관가처럼, 농사를 짓는 것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언덕 위에 위치한 관가정에서 보는 주변 경관은 이곳 경상북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시원한 맛이 있다. 이러한 경관을 즐기기 위해 담을 낮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지 않으면,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편하게 앉아서 경관을 즐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불안한 사회였다면 관가정은 높은 담 위에 올려져 있는 전망대 같은 모습으로 지었을 것이다. 또한 망루의 높이는 화살이나 총의 사거리를 반영해 꽤 높게 설치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번(蕃) 사이에 알력이 심했던 일본의 성은 높직하고 외부에서 알아보기 어렵게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가정뿐만 아니라 전국을 둘러보아도 그러한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처럼 방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치안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생활했던 외국인의 여행기에도 나타난다.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미국, 1855∼1916)이 쓴 여행기에는 “조선에서는 큰 도둑질이 드물다” 라고 하면서 “조선에 있는 동안 주머니칼 이외에는 물건을 도난당한 적이 없다……자신의 물건이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나 하찮은 것도 도난을 당한 적이 없다” 라고 했다.

또한 “극동에서는 살인이 매우 드물다……서양인에 비하여 극동인은 그다지 거칠지 않은 편이다” 라고 했다. 조선 땅에서 오래 살아보지 않은 외국인의 눈에조차 치안이 안전하다고 느낄 만큼 조선조는 매우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사회가 안정된 구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담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 담의 높이는 같은 지역이라도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안전이고, 두 번째는 권위의 표현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에는 충효당, 양진당, 북촌댁이 있는데 그 중 북촌댁의 담과 솟을대문이 가장 높게 느껴진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북촌댁이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려고 담을 높게 쌓은 것이다. 어쩌면 같은 문중에서 상대적으로 위세가 덜한 것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지방보다 도시의 담이 높다. 이것은 도시의 치안 상태가 지방보다 불안하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도 도시 지역의 담이 지방보다 높고 견고한 것을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시가 시끄럽고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나 보다.

지방의 담이 낮은 다른 이유는 ‘집단 감시체제’를 갖췄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이웃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낸다.

예전에는 더 그랬을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시골에서는 애들이 놀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 아이, 남의 아이라고 가릴 것 없이 같이 먹였다.

동네 강아지조차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짖지 않고 외지인이 들어올 때만 짖을 정도로 마을은 가족 공동체만큼이나 유대가 돈독했다.

다른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는 경우 서로가 감시할 수 있어 마음 놓고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을의 정신적 향도(嚮導:길잡이) 역할을 한 명문가가 마을 사람의 인심을 얻을 경우, 마을 사람들이 명문가를 지켜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함양의 정여창 고택 종부의 증언에 따르면, “조상이 주변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난리판(한국전쟁)에도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권위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노력은 구례의 운조루에서도 볼 수 있다. 운조루의 중문(中門)에는 큰 뒤주를 두어 가난한 사람이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가져가도록 했다. 이렇듯 배려했기에 명문가들은 마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담이 높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담을 낮추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다. 담이 높으면 마을 주변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관리하는 데 불편할 뿐이다.

조선 효종 때의 학자 이유태가 지은 《초려집》에 담의 높이에 대해 적은 대목이 있다. “담장의 높이는 방이나 툇마루에 앉아 말 등이 보이고 목노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을 만하면 된다” 라고 기술해 놓았다.

담의 높이는 주변을 살필 만한 정도가 적당함을 지적한 것이다. 담이 높으면 사랑채에 앉아서 밖을 내다 볼 수 없다. 따라서 담 너머를 내다보도록 사랑채를 높여 지은 경우도 있다.

영천 만취당의 새 사랑채는 담을 낮게 하지 않고 사랑채를 높여 밖을 내다보도록 했다. 田

■ 글·최성호<산솔·도시 건축연구소 대표, 전주대 건축학과 겸임교수)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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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사회 환경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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