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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바락바락 애를 쓰니까 노자 같은 이가 무위(無爲)를 가르쳤다. 그는 유위(有爲)의 병에 걸린 인간들에게 무위라는 약을 처방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위에 안주한다면 그것 또한 큰 병이 아닐 수 없다. 유위와 무위를 나눈 것부터가 사실 잘못된 것이다. 우리 인간의 관념과 사고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유위와 무위의 구별이 없다. 그저 그럴뿐이다.”
- 황명찬의 《무위(無爲)도 넘어서》 중에서

어린아이에게 하양 백지를 준다면 조만간에 본연의 색을 잃고 어떤 추상적인 선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 시간이 짧든 길든 간에 분명 그리될 것이다.

이는 아이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연륜이 쌓일수록 채워지는 선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바뀐다는 차이를 보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빈 것’을 보면 채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어린시절에야 큰 억압이 안 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것은 일종의 강박으로 작용해 수시로 스스로를 억압한다. 빈 것을 채우되 가능하면 ‘잘’ 채울 것.

그러나 백지는 ‘하양’으로 이미 차있는 것일 수 있다. 물을 비워낸 컵은 ‘빈 컵’이 아니라 공기로 가득 찬 컵일 수 있고, ‘아무 것도 없음’은 그 ‘아무 것도 없음’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는 거다.

동양화에서의 여백이 주는 그 풍부한 느낌 역시 이와 같은 이치다. 여백의 미. 도시인에게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려운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한 달 내내 마감과 사람들에 얽혀 너무 ‘꽉 찼다’고 생각할 즈음 사람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제법 규모있게 내린 눈이 세상살이로 과포화된 뇌를 식혀준다.

내면적인 혁명
“주위에서 전원생활을 한다니까 용기있다고 하데요.”
사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각박한 도시라지만 어느날 툴툴 털고 귀향할 수 없음은 그를 구체적으로 계획해 본 사람이 더욱 절실히 깨닫는 문제일 것이다.

전원생활이란 돈만 있으면 집을 구해서 들어가는 도시와 달리 터잡는 것부터 온 몸으로 부딪혀야 되는 수고로움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돌연 전원행을 택한 이들에게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명찬 선생은 그 용기를 좀 더 구체화시킨다. 일종의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계 유명 아이스크림회사 사장 아들이 상속권을 포기하고 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미국의 잘 나가는 법률가들이 직업을 포기하고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떤 계기로 충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반성이 따르면서 내면적인 혁명이 발생해야 합니다.”

그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다. 외국에서 수학하면서 오히려 동양에서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 생겼고, 동양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물질적인 것, 양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던 것에서 정신적이고, 질적인 것으로의 전환. 그것은 일종의 수련이 되어 그의 마음은 서서히 변화했다.

치유의 집
몇 년 전 병이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누구나 곧 낫게 된다는 ‘치유의 사원(Healing temple)’이야기를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집과 가족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관계자들이 ‘사랑, 평화, 자비, 조화’라는 공통의 염원으로 건설해 그러한 정신과 기운으로 몸의 병까지 치유된다는 그 곳처럼 집도 가족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이 전원으로 오면서 ‘집’ 자체에도 신경을 쓰게 된 동기다.

설계와 시공은 건축가 조병수에게 의뢰했다. 세월리에서 본 그의 주택이 좋았던 탓이다. 요구사항은 ‘편해서 들어가면 나오기 싫은 집’일 것. 편하고, 따뜻한 집,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집도 편안함으로 가족을 불러들이고, 가족 역시 그러한 기운 속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대해야 모두가 건강하다는 생각이다.

전원주택으로 흔히 볼 수 없는 박스 형태의 집이 지어졌다. 외부로는 절제와 정돈을, 내부로는 가변성과 시각적 자유를 준 디자인이다.

주변의 풍광은 창문을 투과하면서 크고 작은 그림이 되고, 창문들은 제 구실을 다해 모자람 없이 햇빛을 전달한다. 따뜻하고 편안한 내부는 최소의 가구만이 놓여져 그 주인의 성품을 대변한다.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
부부 모두 시골출신이라 전원생활에 거부감이 없었고, 워낙 호흡기가 민감해 서울서 살 적에도 공기 좋은 곳만 찾아다녔다.

현재 서울의 투기지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두루 살았지만, 집값이 오르기 직전 이사를 나오곤 해, 아들은 “돈 피해 다니시냐”며 놀린단다. 이런 사정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참 아깝고 답답하겠지만 정작 그들 부부는 태연하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 할 것도 남아있으니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태극권과 태극검으로 하루를 열고, 책을 읽거나 주변에 산책을 나가 사색에 잠기며, 아내와 함께 맛있는 식당으로 마실을 간다.

어찌보면 심심할 수 있는 일상.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면 도시인과는 다른 무엇으로 꽉 차있어 풍요로운 모습이다.

현재 이들 부부에게 소망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티벳으로의 여행이다. 그 중에서도 ‘카일라스 산’. 4대 종교의 성지라 알려진 성산이다. 사진과 지도를 펼치며 설명하는 황명찬 선생의 마음은 이미 티벳에 있다. 선생의 목소리를 따라 함께 티벳의 고원을 달린다. 田

■ 글·사진 이민선 기자

■ 프로필
황명찬. 1936년 생. 전 국토개발연구원 원장. 강원도 간성의 시골마을에서 출생해 그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1969년부터 약 4년 간 도미, 씨라큐스대학에서 사회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 대학원 원장, 충주캠퍼스 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환태평양지역 지역학회(PRESCO) 회장, 한국환경정책학회 회장,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고문, 한국 지역학회 고문, 한국 주택정책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2년 전부터 양평에 전원주택을 짓고 부인 이명숙 씨와 함께 야생화를 키우며 자연생활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지역개발론》, 《한국의 토지와 주택》 등의 전문 서적과 수필집 《한 손으로 치는 손뻑소리》, 수상집(隨想集) 《무위(無爲)도 넘어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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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정신적 중심성을 찾아서 前 국토개발연구원 원장 황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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