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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사람이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의 산물이다. 집이 자연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이번에는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집은 그렇게 발전하면서 기능에 따라 분화한다. 남은 곡식을 저장하려고 창고를 짓고,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측간을 만든다. 또한 수확이 많은 집과 수확이 적은 집은 다른 규모의 창고가 필요하다.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방이 늘어난다. 사회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의 집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집보다 커진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집을 찾아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사람들은 남하고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려 한다.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든지, 고급차를 탄다든지,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집과 가구, 의복 등이 사치가 가장 쉽게 퍼지는 곳이라고 한다. 현재도 돈이 있는 부유층은 좋은 차를 타고 고급 외제 옷을 입는다. 당연히 집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집에 나타난 권위 의식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넓고 큰 집에서 살고 있다. 자기과시를 위해 눈치껏 법을 어겨 가며 크고 화려한 집을 지었다. 역사 이래로 이러한 의지가 늘 있었기에, 집에 대한 규제 역시 오랜 옛날부터 계속돼 왔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를 보면 품계에 따라 집의 크기와 치장을 제한했다고 한다. 조선조에도 이러한 제도는 존속했다. 위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했고 사당을 제외한 곳에서 색을 칠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규제가 없을 경우 서로 경쟁을 하여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기 때문이다. 요즘도 주변에서 이러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회마을에서도 가문별로 집을 크게 지어 위세를 나타내려고 했다. 또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재령 이씨, 평산 신씨, 안동 권씨의 세 집안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세 집안이 은근히 경쟁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마을에 지어진 옛집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원기둥을 사용했고, 평산 신씨 본가인 만괴헌은 기단을 높이고 안채를 높게 지어 권위를 한껏 드러내었다. 또한 안동 권씨 집안은 최근까지도 집의 규모를 계속해서 늘리면서 은근히 세를 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권위 의식은 집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한옥에서 위세를 보이려고 한 예를 보면 첫 번째는 기단을 높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형기둥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안채나 사랑채를 높게 짓는 것이고, 네 번째는 초공을 사용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집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다. 이 모두 조선조에서 법으로 금했던 것들이다.
지금도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법을 무시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건재한 것을 특권층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눈치껏 법을 어기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예전에도 다름이 없었다.
앞선 예들 중에서 우선 기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집을 수평으로 늘리는 것 못지않게 수직으로 높이는 것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높이를 올리는 것은 대단한 위압감을 준다. 수평적인 거리보다 수직적인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에게 수직적인 인식 체계가 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기의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높아도 떨어져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은 위험하다. 또한 위에 서 있는 사람이나 동물은 밑에서는 살피기 어려우므로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수직적인 위계에서 어느 곳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공격적이기도 하고 수세적이기도 하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에게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갓집의 기단 높이는, 대청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를 마당에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보다 높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한다. 아랫사람을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기단을 높이고 안채의 대청을 한껏 높여 놓은 것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다. 기능만을 놓고 보면 기단은 그리 높지 않아도 된다. 높으면 높을수록 오히려 드나들기 불편할 뿐이다. 그러나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단을 높게 하는 것은 그 만큼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겹처마 집과 원형기둥을 설치한 집이 너무 많아 조선조의 당연한 양식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나 이 역시 금지했던 사항이다. 처마의 깊이와 집의 높이는 깊은 관계가 있다. 처마가 깊지 않으면 집을 높게 지을 수 없다. 처마는 햇빛을 조절하고 비가 들이치는 것을 방지한다. 처마가 얕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높게 지으면 여름에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고 비가 들이쳐 불편하다. 집을 높게 지으려면 처마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부연(附椽)을 설치하지 않고 서까래로만 처마를 길게 빼면 서까래가 커진다. 이런 경우에는 비경제적이고 투박하게 보이므로 부연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 반대로 부연을 설치하면서 처마를 길게 빼면 집이 낮아지고 지붕이 너무 커져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높고 큰 집은 당연히 부연을 설치해야 한다.
예전 안동 화회마을의 북촌댁을 찾았을 때 북촌댁 종손이 “북촌댁이 하회에서 가장 크고 높은 대청을 갖고 있다.” 라고 자랑했다. 그만큼 집을 높여 짓는 것은 위세를 자랑하기에 더 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러니 위세를 보이려고 겹처마를 두르고 집을 높게 짓는 것이다.
집에 초공을 돌리는 예는 조선조 초기에는 대군의 집 등 왕의 친인척 집에서만 사용했던 것 같다. 조선조 말인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일반 사가에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1904년에 지어진 윤보선 생가를 보면 초공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조 초기 국가의 통제하에 있던 장인들이 후기에 들어서면서 직업적인 직능인으로 탈바꿈한다. 정부의 행정력이 약해지자 지방 세도가들이 집을 지을 때 서울의 목수를 데려다 쓰면서 집을 화려하게 짓기 시작한 것이다.
권위를 표현하는 마지막 방법은 집을 크게 짓는 것이다. 신라시대나 조선시대의 가옥 규제를 보면 모두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방의 크기를 품계에 따라 정했고, 조선시대에는 전체 집의 칸수를 제한했다. 사회의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시대에는 어쩌면 당연한 규제였을 것이다.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집을 소유하는 것은 위계에 대한 도전이므로 당연히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왕이 대군이나 공주를 사가로 내보내면서 지은 집도 법규를 어긴 경우가 있다고 하니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은 최소한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궁궐을 호사스럽게 짓는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처럼 당대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집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짓는 것도 이러한 권위 의식을 드러냄이다.
집에 나타난 사회적 지위
사회적 지위와 집의 관계를 살펴보자. 집을 보면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읽을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집인 운현궁과 지방 명문거족의 집인 하회 마을의 양진당을 비교해 보자. 두 집을 보면 운현궁이 전체의 집 규모도 크지만 특히 사랑채가 양진당보다 훨씬 크다. 두 집의 사랑채를 비교해 보면 단순히 가문의 위세를 나타내지 않는다. 양진당의 대청에는 많은 소반(小盤)이 걸려 있다. 그때는 상을 차릴 때 개인별로 소반에 냈기에 그 숫자를 보면 찾아오는 손님의 규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양진당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다. 즉 집안에 모이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강릉의 만석지기 집안인 선교장의 사랑채도 운현궁과 비교할 때 크지 않은 편이다. 부속 채가 많아 집 전체로는 크지만, 정작 주인이 사는 공간은 다른 집하고 별 차이가 없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의미다.
운현궁의 경우 사랑채만 보아도 앞의 두 집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렇게 커진 것은 단순히 집주인의 위상 때문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은 임금을 대신해 섭정(攝政)까지 했다. 그러므로 집에는 항상 손님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 보니 그들을 맞기 위해 집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옛말에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 라고 한다. 그만큼 권력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부에서 물러나 낙향한 촌로에게는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세태가 집의 규모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찾아오는 이가 많으니 집의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 田

■ 글·최성호<산솔·도시 건축연구소 대표, 전주대 건축학과 겸임교수>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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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사회 환경과 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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