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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남부럽잖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의 물욕(物慾)은 한도 끝도 없기에 손에 움켜쥘수록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여기 움켜쥔 손을 활짝 편 채 자연의 숨결을 보듬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 생활하는 이가 있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에서 30평 흙집을 짓고 차밭을 일구며 생활하는 신재남 씨다. 차밭이라야 비료는커녕 김도 제대로 매지 않는 600평이 전부다.

섬진강 변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이즈음, 녹차 중 최상급으로 꼽는다는 우전차(雨前茶 : 곡우 전후에 따는 잎으로 만든 차)를 출하하려는 손길이 여기저기 분주하다. 하지만 그는 아침상을 물린 후, 여유롭게 차를 음미(吟味)하고는 차밭이 아닌 지붕 위로 오른다. 마무리 공사만을 남겨 둔 30평 황토집 지붕에 너와를 얹기 위해서다. 몇 푼 때문에 인위적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속내를 엿보게 한다. 철따라 나는 산채(山菜) 상차림에 매실과 녹차, 쑥차 그리고 약간의 노동을 즐길 수 있는데 여기서 더 바란다면 욕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했다. 쉬는 주말이 돌아오는 금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서울을 벗어나곤 했다. 덕분에 우리나라 구석구석 꽤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잘 알려진 관광지 위주의 여행이었지만, 점차 관광에서 벗어나 짧으나마 여행지의 실제 모습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진하게 남곤 했다.

우연한 계기로 담배를 끊고, 차(茶)를 접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육식보다는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고, 커피나 콜라보다는 차를 주로 마시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에서 사는 것밖에 모르던 사람이 여행을 통해 조금씩 바뀌더니, 이제는 생각까지도 ‘서울을 벗어나 살 수 있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구나 한번은 꿈꿔 봄직한 먼 미래(적어도 나이가 쉰은 넘어 은퇴한 뒤)의 여유로운 전원생활이었지, 아직 열심히 일할 나이인 삼십 대엔 가당찮은 생각이었다. 그후, 많은 것을 가졌다 놓쳐도 보고,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몇 년을 보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는가?’
불행히도 이유는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명상을 하고 단전호흡도 하며 이 화두(話頭)에 매달렸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한 권의 책을 접했는데, 바로 ≪조화로운 삶 Living the Good life≫이었다. 처음엔 미국인 부부가 썼다는 이 책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날 밤을 그만 꼬박 새워 버렸다. 이 책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방향 제시가 있었다.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정신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쳐댔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골에 가서 어떻게 먹고살지?’ 라는 기초적인 의문은 물론이고, ‘어디서 살까, 살 집은, 병이 나면 어떻게 하지, 만약에 실패하면?’ 등등.

그때 아내와 어머니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직 젊으니 인생에 한두 해 실패한다고 해도 그리 큰일은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자.’ 그때부터 살 곳을 찾는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마음에 두었던 곳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부근, 강원도 태백 또는 삼척 부근, 제주도 한라산 기슭, 지리산 부근(전라남도 구례, 광양, 경상남도 산청, 함양 그리고 하동) 이렇게 네 군데였다.

가족들과 토론을 한 결과는 이랬다. 가능한 한 도시화가 덜 된 곳, 겨울에 춥지 않은 곳, 이왕이면 산, 강, 바다가 모두 있는 곳 등.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하동’이다.

사실 앞의 것들은 모두 가족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오직 한 가지 ‘차에 대한 깊은 호감과 애정’이 이곳 하동을 선택하게 했다. 우리나라에 차를 만드는 곳이 어디 하동뿐이겠는가마는 특별히 마음에 감동으로 남은 것은 하동에서 만든 차였고, 그 인연을 못 잊어 하동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 연고도 없는 하동에서 어떻게 땅을 사고 정착할 집을 구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몇 차례의 여행으로 알게 된 여관 아주머니와 식당 주인아저씨 등에게 부탁해 ‘알아보마’ 라는 막연한 대답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미덥지 않아 직접 하동에 내려와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 나섰다.

서울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낯선 하동 읍내를 한 시간쯤 뒤져 어렵게 찾은 두 곳 가운데 한 곳은 폐업, 다른 한 곳은 출장 중……. 이래서야 처음에 품은 생각은 고사하고 살 곳 마련도 힘들겠다는 생각에, 고심해서 찾은 곳은 하동군청 민원실이었다.

매우 의아해 하는 그 분들에게 한참 사정 얘기를 하고, 겨우 화개면의 공인중개사무소를 소개받아 찾아 갔다. 사실 서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와 산다고 하면 환영 받을 줄 알았는데 실제는 매우 달랐다. 기특하다는 칭찬은 고사하고, 열심히 설득시켜야만 아주 조금씩 이해를 했다.

땅을 보러 다니면서도 어느 날은 같은 이야기(하동에 왜 내려오는지, 어떻게 살 건지 등)를 서너 차례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는 알아듣도록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만나는 공인중개사마다 보여주는 땅들은 모두 전원주택지뿐이었다. 평당 40만 원에서부터 싼 땅은 평당 15만 원 정도 하는……. 이래서야 어디 농사짓고 살 수 있겠나 싶어 정말 암담했다. ‘아무래도 하동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알아 볼 수밖에 없음이 실망스러웠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 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몇 차례 차를 주문한 적이 있던 다원이었다. 일면식도 없이 단지 몇 차례 주문한 적 밖에 없는 사람을 어찌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던지. 차를 대접받으며 그간의 사정 얘기를 했더니, 그 분들 경험담이며 여러 가지 충고로, 외지에 내려와 더해 가기만 하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라앉히게 되었다. 그분들도 도시에서 살다 시골 내려와 터를 잡은, 어찌 보면 선배였던 거다.

이야기 도중 얼마 전에 차밭이 두 군데 매물로 나왔는데, 팔리지 않았을지 모르니 한번 알아보자고 차밭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 중 한 곳이 아직 팔리지 않았으니 저녁에라도 차밭 주인을 만나 보자고 해서, 아주 다행히 좋은 인연으로 비옥한 땅을 구하게 됐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준 정 선생님 내외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한다.

빈집 찾아 서울에서 7번 왕복
농민이 아닌 사람이 농지를 취득하려면 ‘농지취득자격증명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해당 읍면의 농지위원 2명(보통 한 동리에 한 명)이 농사를 지을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고, 1년에 30일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강제 매수를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해야 농지취득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이른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엔 농지는 약 303평(1000㎡) 이상을 취득해야 등기를 이전할 수 있었다. 또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는 도시인이 농지 303평(1000㎡) 이상, 임야 606평(2000㎡) 이상을 취득할 때는 일정한 서류를 갖추어 해당 시·군·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신고구역에서는 농지 1,515평(5000㎡), 임야 3030평(10,000㎡) 이상을 취득할 경우 해당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 다행히 구한 땅이 위의 조건과는 무관하여 무사히 등기를 마쳤다.

이제 살 집이 문젠데……. 처음 계획으론, 시골엔 빈집이 많을 테니 그것을 구해 조금 허름하더라도 고쳐서, 낯선 곳에 적응하며 집을 지을 동안 살아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시골엔 빈집이 없었다. 사람만 살지 않는다 뿐이지 창고 등 갖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외지인에게 선선히 들어가 살라고 빌려 주는 집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은 마을 입구의 한 집에 전세로 거처를 마련했다. 빈집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처음엔 집을 살까도 생각했지만(전세 가격이면 구입 가능), 수리비용에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매각이 가능할지 의문이어서 구입을 포기했다. 농지전용을 받는 데도 집을 갖지 않는 편이 훨씬 유리하단 걸 알게 되었고, 시골살이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것을 처분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좋은 삶’에 대한 단상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지향점을 ‘조화로운 삶’이라 하기엔 너무나 거창해 그냥 ‘좋은 삶’이라 이름 붙여 보지만 낯간지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가족이 살아가려는 ‘좋은 삶’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본다.
첫째, 깨끗한 공기, 맑은 물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
둘째, 육체를 건강하게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먹고 마시고
셋째, 소중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넷째, 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육체적 노동의 신성함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와 만족을 느끼고
다섯째, 단순하지만 풍요롭고 여유로운 ‘나만의 인생’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려오기 전을 돌이켜보면 대다수의 도시 생활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괴로움[苦]이요, 아픔[痛]이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오직 그뿐인 줄 알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어 ‘연봉 얼마짜리’ 인생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그 자괴감이란…….

아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부터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적 모순 속의 도시생활에서 아내 역시 ‘여성의 사회참여’ 내지는 ‘자아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직장에 다녀야 했다.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움[美]으로만 보려는 사회의 편견 속에, 아내는 더욱 예뻐지기 위해 무리하게 피부과 치료를 받던 중 부작용을 심하게 앓아야 했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의 허약을 불러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우울해 하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떻게든 결단은 필요했다.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당위는 인정했지만 그 ‘다름’이 주는 생경함과 낯설음은 우리 가족을 몇 년이고 주저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낯선 두려움보다는 주류(主流)의 세상에서 낙오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서 남보다 조금 더 갖고 물질적 여유가 생긴 뒤에, 여생은 시골에 내려와 무위도식하는 그러한 삶은 사는 자리만 바뀔 뿐 또 다른 형태의 도시 생활로,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으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좋은 삶’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좋은 먹을거리를 통한 육체의 건강’이다. 이만큼 떨어져 하동에 내려와 살며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후, 아직 도시에 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육체가 얼마나 망가져 가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하동에 온 후, 거의 1년여는 앓고 살았다. 시골생활을 시작하면 바로 ‘짜잔-’ 하고 건강 체질로 바뀔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도시 독(毒)을 해독하느라 그랬는지 건강이 좋아지기는커녕 사소한 감기조차도 몇 달씩 앓으며 고생해야 했다. 아내는 온 몸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돋아나 괴로워했다. 어머니는 비만으로 인한 관절통과 노령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이 고루 괴롭혔다.

우리 가족에게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삼시 세끼 빠뜨릴 수 없는 음식으로 고치겠노라 결심했고, 그때마다 바로 나타나지 않는 효과에 조바심을 누르고, 서로를 격려하며 오늘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벌써 상당 부분 좋아지기도 했다.

아직 치료 중이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부분도 있으나 우리 스스로 완벽하게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은 점점 강해지기만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특별한 사고가 아닌 한 인간이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

도시의 인간관계는 경쟁과 경계 나누기, 철저한 무관심과 자기 방어 본능이 강하다. 그러기에 내 아이는 남의 아이와 달라야 하고, 우리 집은 남의 집보다 커야 하고, 우리 자가용은 옆집보다 좋아야 한다. 옆집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도 알지 못하고, 옆집 아이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을 당해도 내 아이가 무사하면 곧 잊는다.

사람과 동물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중요한 하나는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 생각한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조금 불편한 사람을 도울 줄 알며, 호의 베풂을 고맙게 받을 줄 아는 사람 사이의 관계. ‘좋은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 가족의 주요한 부분 중 하나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더! 바로 ‘육체적 노동’이다. 언제부터인가 땀 흘리는 일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천시되어 왔다. 많은 사람이 농촌에 사는 것을 기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육체적 노동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의 처지와 한계에 맞는 적당한 육체노동은 운동 후에 느끼는 쾌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우려 반 비웃음 반이었다. 망치질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집을 짓는다니 개가 웃을 노릇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빈집을 사서 살며 천천히 한 3∼4년 두고 지어 볼까, 하고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일 년여를 살며 육체노동에 몸이 조금씩 단련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정신도 어려움을 극복하며 느끼는 쾌감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전 처음 해보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정말이지 죽을 만큼 힘들다. 농사도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그렇게 힘들기에 보람은 더 크다. ‘정말 하동에 잘 내려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온몸에 땀을 흠뻑 적시도록 일하고 황토집 짓는 현장을 떠나 집으로 내려가면서 섬진강 너머 저편 백운산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볼 때다. 그 마지막 햇살이 구름과 어우러져 말로 형용 못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갈 때, 육체의 고단함은 벅차오르는 정신의 희열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되어 버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같지만 다른 새로운 오늘을 살 수 있음에 가슴 설렌다. 田

■ 글 신재남 <로아차 대표, www.loacha.com>
■ 사진 윤홍로 기자

∵ 하동에 내려오기 전 질문들과 대답
Q. 생활비는 어떻게
가장 고민했던 부분임에 비하면 답은 의외로 쉬웠다. 도시에서 생활비를 100으로 본다면, 시골에서는 50 이하로 줄일 수도 있으리라 봤고 실제도 그렇다. 물론 쓰기 나름이지만. 그리고 추구하는 삶이 가능한 선에서 자급자족했기에 의외로 생활비에 대한 부담이 적게 들 것으로 생각한다(도시 생활비의 1/5 이하로도 가능). 적게 쓰면 그만큼 적게 벌어도 되겠지.

Q. 노후 대책은 어떻게
이 부분은 오히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걱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시골에서는 70∼80대 어르신들이 정정하게 직접 밭을 돌본다. 오히려 시골서 사는 게 확실한 노후 대책이라 할 수 있겠다.

Q. 의료비는, 목돈이 들어갈 경우엔
다행히 20대 때 보장성 건강보험을 여러 개 들어 놓아, 70세까지는 암 등 큰 질병에 어느 정도 안심이다. 그리고 목돈이 들어갈 경우는? 글쎄. 별로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도시에서 목돈 들어가는 일 중 제일 큰 일이 집장만 하는 건데, 이곳에선 별로 그렇지가 않다.

Q. 자녀들 교육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 공교육비가 아주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처럼 서로 비교를 해가며 사교육비 지출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주변 산청이나 함양에는 대안학교들도 있다.

Q. 처음 해 보는 농사는 어떻게
처음엔 ‘이 씨를 뿌리면 진짜 싹이 날까?’ 하는 어이없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콩 심은 덴 콩 나고 팥 심은 덴 팥이 나고 자랐다. 하하―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된다. 시골에선 모든 분이 선생님이다.

Q. 살 집은 어떻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식주(衣食住)다. 이 부분만큼은 남의 손을 빌지 않고, 되도록이면 스스로 해보자는 것이 가족의 공통된 희망인 까닭에,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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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 가자, 흙내음 나는 전원으로..움켜쥔 손 활짝 펴면 인생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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