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주택&인테리어 검색결과
-
-
[SPECIAL EDITION 주택의 심장부 거실 설계 인테리어(1)] 가족 간 화목을 부르는 거실 - 햇빛잘드는전망좋은곳에배치
- "오늘은 동창 모임, 모두 부러워하는 우리 집 거실로 초대했어요. 고급 카페 부럽지 않은 세련된 감각의 넓고 럭셔리한 거실, 한눈에 느껴지는 고급 마감재와 아름다운 센스가 적절히 가미된 인테리어들……. 우리 집 거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흐뭇해지는 품격이 있습니다."모 건설업체가 넓고 고급스럽게 디자인한 거실을 부각시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 광고 문구다. 주거 내 다양한 공간들을 놓아둔 채 유독 거실에만 초점을 맞춘 까닭은 무엇일까. 가족 단위 전통 문화에서 비롯한 거실 위주의 주거 양식 때문이다. 가족 생활의 중심에 자리한 거실은 도시의 공동주택보다 자연 경관에 둘러싸인 전원주택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글 윤홍로 기자거실(Living Room)이란 말은 유럽 근대화 과정 즉,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코티지(Cottage) 개량 운동에서 생겨났다. 성城과 영주 저택은 상류층 주거고 코티지는 원룸형 오두막으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주거였다. 당시 비위생적이고 사생활도 없는 코티지에 취침기능을 분리시키고자 홀(Hall) 또는 홀-키친(Hall-Kitchen)적 성격이 짙은 방 하나를 넣었는데 바로 거실이다. 현대로 오면서 복층 주택에서 거실은 1층에 가족 단란 공간인 가족실과 손님 접객 공간인 응접실로 나뉘어진다.우리나라에선 1973년에서 1977년 사이에 마루 중심형 단독주택의 마루가 거실로 불렸다. 종전보다 마루가 한층 넓어지고 소파나 테이블 등 서구식 입식 가구가 놓이고 방열기 대신 방처럼 바닥을 난방한 게 특징이다. 그러나 당시 거실은 각 실을 연결하는 전통 가옥의 대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실을 마루와 마당의 기능이 복합된 내부화된 마당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전통 가옥의 대청이 현대 주택의 거실로"대청마루를 보면 대개의 경우, 그 공간을 형성함에 사면四面이 벽체가 아니라 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곳'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리빙룸은 … 하나의 완전한 방으로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이문보,《 住궀》8호,〈 住궀設計雜感〉1962 "사회 생활에 과중한 부담과 가족 구성 간에 아직도 잔존해 있는 봉건성 때문에 개방된 리빙룸 중심의 생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 대부분 가족이 외출하고 주부 혼자서 지키는 광대한 리빙룸, 저녁 12시에서 아침 6시까지 이용하는 넓은 침실, 20분 내외 위복胃腹을 채우기 위하여 식사하는 식탁이 널려 있는 식당 등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외래품인가?" —정인국,《 住궀》16호,〈 傳統的住궀걩〉1966 하나는 대청마루와 거실에 대한 차이를, 다른 하나는 봉건적 주거 사상으로 서구 생활 양식의 수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대청이 서구식 거실로 변화하기까지 그 과정은 녹녹하지 않았다.전통 가옥에서 공적 공간은 안방과 대청 및 사랑방과 누마루고 사적 공간은 부엌과 방이었다. 안방과 안채 대청에선 안손님을, 사랑방과 누마루에선 바깥손님을 접대했다. 겨울철엔 따듯한 구들방인 안방과 사랑방이, 여름철엔 시원한 대청과 누마루가 그 역할을 해냈다. 한편 안방은 안손님의 접객 공간 뿐만 아니라 주로 집안 식구만의 가족실이자 식당 그리고 안주인의 침실인 사적 공간이기도 했다.전통 가옥의 안방과 대청 또 사랑방과 누마루 역할을 이어 받은 게 현대 거실이다.개방감과 안정감을 동시에거실은 각 실과 균등을 고려하여 배치해야 한다. 현관이나 식당 · 부엌에 가까우면서 햇빛이 잘 드는 전망 좋은 곳이 좋다. 거실이 주거의 중심이라 하여 한 가운데 배치하면 자칫 다른 실로 통하는 동선과 겹쳐져 안정감을 잃기 쉽다. 반면 폐쇄적인 거실은 안정감을 주지만 복도가 생기고 개방적 거실에 비해 가족 간 유대가 약하다.따라서 거실 설계 시 개방감과 안정감을 함께 이끌어 내는 게 좋다. 또한 주택 전체의 규모와 가족 구성, 생활 방식, 가구의 종류 등을 고려해야 한다.거실의 크기와 형태는 사용 목적에 따라 다양하기에 딱히 적정 치수를 규정하기 곤란하다. 대개 주택 면적이 100.0㎡(30.2평) 내외라면 약 20㎡(6.0평), 200.0㎡(60.5평)라면 0.0㎡(9.1평) 정도로 계획한다. 그러나 크기가 같은 거실이라도 전혀 다른 크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례로 규모가 작은 거실을 개방하여 식당과 연결하면 훨씬 넓고 시원해진다. 거실의 전체적 형태는 정방형보다 장방형이 공간 활용이나 가구 배치에 용이하다.거실은 형태에 따라 독립형, 개방형, 복도형, DK 연계형으로 분류한다. 규모 면에서 보면 198.3㎡(60.0평) 이상인 주택은 독립형이 많고, 132.2(40.0평)∼198.3㎡ 주택은 독립형과 식당/주방 연계형이 혼재하고, 소형 주택은 식당/주방 연계형이 많이 나타난다.<>가족실(Family Room)손님용 응접실이 없는 경우, 손님이 오더라도 다른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는 곳이 가족실이다. 필요한 가구의 규모에 따라 가족실의 크기와 형태가 결정된다. 자녀가 어릴 경우 주부가 가사를 돌보면서 자녀와 함께 지내도록 부엌이나 부모방과 연결된 곳에 위치시키거나 식당을 넓혀서 사용하기도 한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경우 자녀의 거실로도 사용되고, 오락실 성격이 강한 경우 지하실에 두기도 한다.우리나라 전원주택의 공간 배치 특징은 1층 거실 외에 2층에 제2의 거실 또는 가족실 성격의 공간을 계획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보기 드문 형식인데 2층에 위치한 가족실은 서양 주택처럼 독립 공간이라기보다 2층의 각 방을 연결하는 매개적 성격이 강하다. 미국은 대개 가족실을 2층보다 1층에 독립된 실 개념으로 구성한다. 거실을 가족실과 손님 접객을 위한 응접실로 분리하여 계획하기 때문이다.
-
- 주택&인테리어
- 인테리어
-
[SPECIAL EDITION 주택의 심장부 거실 설계 인테리어(1)] 가족 간 화목을 부르는 거실 - 햇빛잘드는전망좋은곳에배치
-
-
고택을 찾아서-사계의 장원, 강릉 선교장
- 조선시대 후기 대표적 양반 집인 강릉시 운정동의 아흔아홉 칸짜리 선교장(船橋莊). 민가로는 가장 넓다는 이곳의 이야기 실타래를 풀려면 대관령과 경포호를 빼놓을 수 없다. 강한 높새바람을 등지고 대관령 고갯마루에 서면, 짙푸른 동해바다가 시야에 꽉 차게 펼쳐지고 발 아래로 강릉시가 굽어보인다. 예전 강릉으로 부임하던 벼슬아치 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울지 않은 이가 없었고, 또 넘어 와서는 웃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박한 인심을 지닌 살기 좋은 고장이기 때문이다. 강릉은 대관령에 기댄 채 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는 거울처럼 맑은 경포호를 안고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달밤에 술잔을 기울이면 달이 하늘뿐만 아니라 호수에도, 바다에도, 술잔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떠서 다섯 개가 된다는 경포호. 그 서쪽 죽헌동에는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이 있다. 선교장은 오죽헌과 경포대 사이, 강릉시내에서 경포호로 나가는 도로 왼편 나지막한 산에 평온하게 둘러싸여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치를 지닌 곳으로 활래정, 아랫사랑, 열화당, 서별당, 연지당, 안채, 동별당 등의 독립 가옥으로 잘 짜여져 있다. 재화가 늘고 자손이 번창하는 땅 경포호 둘레가 30리로 지금(4㎞)보다 훨씬 넓었을 때에는 선교장은 물론, 그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오죽헌 앞에까지 달했다. 지금은 강릉시 운정동에 속하나 배를 타고 서쪽의 초당 쪽으로 건너다녔던 때의 지명은 ‘배다리(船橋里)’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이 1700년대에 지어 살기 시작해 현재까지 9대째 종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내번은 충주에서 살다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 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저동으로 왔다. 그후 가산이 넉넉해지자, 좀더 넓은 터를 찾던 어느 날 족제비를 쫓아가다가 배다리에 이르러 명기(名基 : 살기 좋은 땅)를 발견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선교장의 자리는 시루봉에서 뻗은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 번식을 보이는 산형” 이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전주 이씨 일가는 강원도 영동 일대의 땅을 소유할 만큼 부를 이루었다. 좌향은 전망으로 적합하지 않은 경포호(현재는 뭍임)를 피해 배다리골 내부로 돌려 앉혔다. 반면 안채 전망은 골짜기 내부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확보했다. 한국 전통 주거문화를 한눈에 선교장 어귀 우측에 있는 인공 연못 한가운데에는 장방형으로 섬〔當洲〕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운치가 빼어나다. 그 건너편 선교장의 외별당인 활래정은 1816년 이 후가 지은 것으로, 연못 안쪽으로 나온 마루를 돌기둥이 받치는 누각 형식의 ‘ㄱ’자형 팔작지붕 겹처마 납도리 집이다. 주로 남자의 사교 공간이자 손님의 장기 숙소로 사용했다.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왔다. 그 뒤는 풍수상 좌청용에 해당하는 구릉으로 아름드리 나무숲이 배경을 이룬다. 활래정은 당초 연못 가운데 섬에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청룡의 부리를 눌러 가세가 예전보다 기울었다고 한다. 연못은 선교장 북쪽의 태장봉에서 쉼 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로 채워진다. 지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연(蓮)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여름철이면 선교장의 전체 분위기를 이끈다. 활래정에서 좀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정면 23칸, 측면 1칸으로 줄지어 선 박공지붕의 행랑채(?) 사이에 선교유거(船橋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과 안대문이 나온다. 솟을대문은 서쪽 사랑채의 접객용 공간으로, 내외벽이 있는 안대문은 동쪽 가족용 공간으로 통한다. 선교장의 거주자들은 대문채를 아랫사랑 또는 작은사랑이라고 부른다. 이유인즉, “선교장에는 행랑채가 없다. 양반 기술자들이 주로 머물렀고 하인들은 바깥에서 살았다. 어떻게 양반과 하인이 같은 높이의 마당에서 함께 머무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기록에는 선교장 앞의 30여 초가집에서 하인과 소작농이 머물렀다고 한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기단 위에 높직이 선 22평 규모 팔작집인 열화당이 자리한다. 차양을 드리운 계단을 오르면 처마 밑에 열화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친척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悅親戚之情話〕”라는 데서 따왔다.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손님을 맞거나 가족을 포함한 친척들이 사용한 남성만의 공간이다. 구조는 큰 대청과 온돌방 셋, 작은 대청으로 짜여져 있다. 동판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은 러시아 양식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줬다고 한다. 열화당이 남성 공간이라면, 옆의 서별당은 완충 공간이다. 본채인 서별당과 그 앞의 ‘ㄴ’자형 행랑채인 연지당(硏知堂)으로 짜여져 있는데, 예전에는 열화당 쪽의 서고 하나는 남성 공간으로, 여타는 여성 공간으로써 내외담으로 분리돼 있었다고 한다. 안쪽 깊숙이 자리한 서별당이 가족을 서로 연결시켜 줬다면, 연지당은 주로 여자 하인이 기거했다. 즉 연지당에서 서별당에 머무는 집안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랑채인 열화당을 찾는 손님들의 움직임을 엿보며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서별당 우측 중문으로 들어서면 깊숙한 곳에 안채와 가족만의 휴식처인 동별당이 자리한다.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은 안채는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으로 공간을 나누고 툇마루를 둘렀다. 방마다 예전의 세간을 잘 보관하고 있어 전통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안채보다 한 단 낮은 위치의 동별당은 안주인과 가족을 포함한 여자 친척이 사용하는 휴식처다. 안채의 ‘ㄱ’자 평면을 반복하여 동쪽에 두 개, 서쪽에 한 개의 온돌방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전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후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선교장은 행랑채와 바깥사랑채, 안채로 이어지는 집중형 배치가 분산형 배치를 하고 있다. 한 세대에 지은 건물이 아니라 주어진 대지 상황에 맞추어 대를 이어 각각의 건물을 앉혔기 때문이다. 혹자는 통일감이 없는 산만하기까지 한 공간 배치를 두고 인간미 넘치는 공간구조라고도 한다. 한편 전주 이씨 일가가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막대한 땅을 소유할 만큼 부를 이룬 것에 비하면, 선교장은 상류 귀족의 집으로는 검소한 편에 속한다. 정인국 교수는 《한국건축양식론》에서 선교장을 일러 “구조도 모든 장식이나 유회적 조작은 쓰지 않고 쉽게 납도리로 순박하게 다루고 있어 더욱 호감이 가며, 다른 주택에서 느끼는 허세와 유생적 고루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강릉의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주택과 세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 주거문화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田 글·사진 윤홍로 기자
-
- 주택&인테리어
- 전원&단독주택
-
고택을 찾아서-사계의 장원, 강릉 선교장
집짓기 정보 검색결과
-
-
[NEWS & ISSUE] 1세대 건축가 정인국 교수 특별전
- 한국 건축 발전 이끌어 1세대 건축가 정인국 교수 특별전 9월 22일부터 11월 20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고故 정인국 교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축 40년, 시대를 담다’ 특별전이 진행 중이다. 전시작품은 1950~70년대 정인국 교수가 한국의 지역성과 정통성을 담아낸 건축도면과 모형으로 재현한 작품으로 구성해, 한국 건축의 시대에 따른 변화와 흐름을 한눈에 둘러 볼 수 있다. 대표작은 1950년대 ‘세계주의’ 건축양식에서 영향받아 홍익대학교 본관(1957)에 격자무늬 구조물을 설치한 작품이다(사진 위). 국립중앙관상대(1959~60)도 세계주의 양식을 표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는 모더니즘 바탕에 지역적 특성을 나타냈다. 한국전력(1962~64), 서울시교육위원회(1967~68), 천도교 수운회관(1968~70), 법무부검찰청종합청사(1971)가 대표 건축물이다. 1970년대 작품에서는 한옥의 미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물이 주를 이룬다. 한옥의 기둥과 지붕 등을 변형해 현대건축에 적용한 것이다. 영남대학교박물관(1971),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1972)를 설계했다. 건축물 외에 조선시대 궁전건축부터 한국건축 양식론까지 연구 활동하면서 남긴 책도 전시돼 있다. 이번 전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
- 집짓기 정보
- 건축정보
-
[NEWS & ISSUE] 1세대 건축가 정인국 교수 특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