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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 구례 운조루(雲鳥樓)
- 구례에서 섬진강 줄기를 거슬러 하동으로 가는 길은 ‘울긋불긋 꽃 대궐’ 그 자체다. 도로 양 언저리에 만개한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데, 간간이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상춘객(賞春客)을 향해 꽃 세례를 퍼붓는다.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빚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기름진 땅을 지닌 곳으로, 조선 중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구례가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이 두루 알려지자, 재산이 넉넉한 세력가들이 명당자리를 찾아들었다.글·사진 윤홍로 기자도움말 류응교류맹효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미가 운조루. 솟을대문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줄행랑'과 앞산의 산세가 불의 형상이라 화기를 꺾기 위해 조성한 연당이 있다. 구례읍에서 하동 쪽 5킬로미터쯤에서 다시 북쪽 농로로 1.5킬로미터 들어서면 나오는 지리산 봉우리 밑에 자리 잡은 토지면 오미리가 그러하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천상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금환락지 : 金環落地) 이어서 여기에 집을 지으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 예부터 명당으로 손꼽힌다. 이 마을에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민가로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건물이 자리한다. 1776년(영조 52년)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운조루(雲鳥樓)다. 부지 1400평에 지은 건물의 건평이 100평(건립 당시 99칸, 현존 73칸)이 넘어 민가로는 대규모다. 조선시대 대군들도 60칸을 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건물 배치는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으로, 주인이 거처하던 운조루 말고도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과 사당, 별당 등이 딸려 있다. 운조루의 풍수지리는 한양의 축소판류이주는 처음 이사 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서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본 이름은 중국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는 게 정설이다.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운조루가 자리한 마을 앞쪽 섬진강 건너편에는 안산 격인 오봉산이 있고, 더 멀리 남쪽으로는 주작 격인 계족산이 있다. 또 동쪽에는 왕시루봉이, 서쪽에는 천왕봉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로 불린다. 이러한 산세와 함께 운조루는 내수구(앞도랑)와 의수구(섬진강)가 제대로 갖추어진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다. 연당(蓮塘)은 남쪽의 오봉산 삼태봉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려고 조성했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뒤주(목독)와 낮은 굴뚝에서는 남을 배려하고 음덕(陰德)을 베푼 류이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좌측이 큰 사랑채이고 우측이 작은 사랑채다. 솟을대문에 달린 홍살과 호랑이 뼈. / 솟을대문 앞으로 흐르는 내수구로 서울의 청계천에 해당한다. 류이주의 8대손 류맹효(전 교장회장) 씨는 “이곳을 당시 한양의 도성에 비유하면 내수구는 청계천, 의수구는 한강, 오봉산은 남산에 해당”하고 “연당은 광화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해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연당의 석가산(石假山)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금환락지형 답게 어느 한쪽 터진 곳 없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의 풍수》를 보면 일제시대 사람들이 촌에서 도시로 빠져나갔는데 이 마을만은 도리어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풍수설을 좇아 들어온 것인데, 특히 운조루 앞 대나무 숲 사이에 숨겨진 집 한 채(곡전재)가 눈길을 끈다. 일제시대 이주해 온 박 부잣집으로 통하는데, 아예 담을 환형(環型)으로 쌓아 금환락지를 표상했을 정도다. 뒤에서 운조루의 목독을 통해 설명하겠지만 이 집은 유난히 담이 높다. 운조루는 이렇듯 명당 터를 고르고 골라 선택한 땅에 앉혀져 있다. 그런데 막상 명당 터를 골랐지만, 땅이 온통 돌무더기라 공사 거리가 많아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류이주는 운조루의 건축 도면(가옥도)을 작성하여 아들 류덕호에게 그대로 축조할 것을 지시했는데, 터를 닦고 건물을 앉히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돌무더기와 관련해 운조루를 짓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일이 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 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만 한 돌 거북이 출토됐는데, 당시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류이주는 이를 보고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을 당했다. 운조루 안채는 2층 구조로, 바깥출입을 못했던 아녀자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 큰 사랑채에 딸린 삼면으로 트인 누마루가 바로 운조루이다. 음덕(陰德)을 행한 운조루의 철학운조루로 들어서려면 앞 도랑을 건너 좌우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솟을대문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홍살’이 달려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에 걸린 호랑이 뼈에 잠시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류이주가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세재에 이르러 호랑이를 만났다고 한다.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 홍살문에 걸어 두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한다는 것이다. 이 일로 류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솟을대문 앞에는 말을 묶어 두는 하마석(下馬石)도 있다. 솟을대문 못지않게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문간 행랑채도 특이하다. 바깥사랑과 안 사랑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병렬로 마주 보면서 동서로 길게 배치된 ‘줄행랑’으로, 담 역할도 한다. 운조루의 행랑채는 강릉 선교장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의 답로(踏路) 옆 개나리 밑에는 낮게 깔린 굴뚝이 있다. 여기서 류이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해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것이다. 혹, 저들끼리 표나지 않게 음식을 해먹으려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문에 놓인 통나무 원목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목독(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감)을 보면 그 생각이 그릇됐음을 알 수 있다. 목독의 하단에는 가로 5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정도의 여닫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쌀을 얻어 가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배려한 마음 씀씀이를 엿보게 한다. 이처럼 운조루의 굴뚝과 목독을 통해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훈과 더불어 음덕(陰德)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최성호 교수(본지 한옥 이야기 필자)는 운조루의 목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배려로 명문가들은 마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집의 담이 높을 필요가 없으며, 담을 낮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다. 집의 담이 높다는 것이 오히려 마을 주변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관리하는 데 불편할 수 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박 부자의 집 담과 운조루의 담을 비교하면 최 교수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안채 대청마루. 운조루에는 당시 생활용품 등의 귀중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솟을대문에서 중문으로 향하는 길(답로)과 다시 안채로 향하는 길이 경사면을 이룬다.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한눈에사랑채는 세 채가 있는데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큰 사랑채는 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미터의 축대 위에 있다. 중문 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정면 5칸, 측면 1∼2칸의 ‘ㄴ’자형 평면 형태다. 큰 사랑채 옆에 딸린 누마루가 바로 운조루로, 삼면을 개방한 누마루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했다. 난간동자를 계자각으로 하고, 그 위에 원형의 두겁대(頭甲)를 설치해 짜임새가 돋보인다. 한편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 사랑채, 아래 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 사랑채와 아래 사랑채의 누마루는 남아 있지 않다. 마루방에는 1776년(조선 영조 52년)에 건립됐음을 확인하는 “龍龍崇禎紀元後三丙申秋九月己巳十六日甲戌辰時入樑鼎鼎”이라 적힌 상량문이 있다. 넓은 대청은 사랑방과 누마루에 출입하는 전실(前室)의 역할을 하며 여름철 거처하기에 이상적으로 보인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높이 약 60센티미터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안채가 자리한다. 전면 마루 끝에 선 기둥은 조선시대에 금했다는 둥근 모양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나 있다. 안채 양쪽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유맹효 씨의 부인 이만임 씨의 설명을 통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동경에서 7년 6개월 유학하고 온 남편과 혼례를 치렀는데 시집온 지 3년 동안 바깥출입을 못했다. 당시 여자들은 2층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쪽문으로 담 밖을 내다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 후 교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외지로 옮겨 다녔다.” 운조루를 유심히 살펴보면 행랑채보다는 바깥사랑채가, 또 바깥사랑채보다는 안채가 높이 앉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답로가 15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는데, 이 경사로는 물건을 옮기기에 편하도록 기능적으로 배려한 것이다. 현재 이 집은 전체적으로 ‘一’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 채가 팔작지붕, 모임지붕, 박공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운조루의 안채 부엌 옆에 딸린 뜰의 낮은 담과 대숲과 둥근 담장에 가려진 박 부잣집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운조루는 명당 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점 외에도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 된 30칸 이상의 고가는 19채 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운조루는 건물 재료에 단단함이나 문의 크기, 운조루에서 살았던 류 씨 집안의 생활용품 등 자료가 그대로 보존돼 있어 역사적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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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 구례 운조루(雲鳥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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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 건축주가 직접 쓴 건축일기 4 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민들레울’은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도와 식문화를 위한 공간인 본관은 팔작집 형태이고, 서예나 전통문화강좌 등 전통문화의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다린 초당’은 고가(古家)에서 헌 목재를 구해 임의로 지은 초가이다. 그리고 객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기와집은 구들을 들인 맞배집 양식이다. 한정식집으로 재 구성되어 일부 실내 인테리어 등에 현대적인 소재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민들레울’의 기본 골격과 형태에 있어서는 전통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다.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사고로 오늘날 한옥은 그 설자리를 잃었고, 5천년 우리전통문화도 함께 사라져 가고 있다. 집은 인간에게 단순히 생활을 위한 공간만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요, 삶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한옥은 우리조상의 삶의 지혜가 묻어있는 문화유산이며, 때문에 이러한 한옥을 보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순오씨는 사라져 가는 한옥을 안타까워하며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철거 위기의 한옥을 옮겨 자신의 생활터전 ‘민들레울’을 꾸몄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는데, 그의 한옥 이야기를 실었다. 펑펑 눈이 내린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소리에 방문을 활짝 여니 누리가 온통 눈부신 빛으로 아우성이다. 군불지핀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용마루와 기와골, 처마와 그 너머 나무위로 다복다복 쌓이는 눈을 바라보니 마음에는 어느새 평화가 내려앉는다. 흙내음, 숨소리, 바람소리 이곳에 둥지를 틀고 집을 지은 이후 모처럼 느끼는 아늑함이다. 한옥목수도 아니요 그렇다고 건축가도 아니며 한옥에 대한 식견도 거의 없던 내게 한옥이 그 어떤 건축물모다도 아름답고 위대하게 다가온 것은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다. 한옥은 환경과 생명, 주변과 자연적 본능에 충실하다. 옮겨다닐 수 있는 한옥 집을 옮길 수 있음은 한옥이 가지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장점이다. ‘집을 옮긴다. 사람만 이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아예 통째로 옮긴다는 것’, 현대 건축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치목하여 기둥과 도리, 보 등이 서로 맞물리므로 못을 사용치 않고도 수백 아니 수천 년을 견딜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그대로 해체해 다른 곳으로 옮겨 지을 수 있는 것이 한옥이다. 전통양식을 살리려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한옥을 옮겨 지은 ‘민들레울’은 가능한 옛 방식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부 실내 인테리어 등에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기본 골격과 형태에 있어서는 전통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우선 옛 기와와 집의 기본 골격이 되는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등을 그대로 살렸고 지붕은 서까래 위에 산자를 엮어 흙을 올렸으며, 담벼락도 흙벽돌과 옛날 적벽돌을 구해 마감했다. 그리고, 이실집인 ‘민들레울’은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도와 식문화를 위한 공간인 본관은 팔작집 형태이고, 서예나 전통문화강좌 등 전통문화의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다린초당’은 고가(古家)에서 헌 목재를 구해 임의로 지은 초가이다. 그리고 객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기와집은 구들을 들인 맞배집 양식이다. 그러나 주건물인 본관은 한정식집을 구상했기에 이에 맞도록 실내구조를 많이 변경하였다. 우선 대청을 기존의 네 칸에서 여덟 칸으로 늘리면서 고주를 하나 없앴고 대들보를 하나 더 들였다. 그리고 출입구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다기 전시실을 만들었으며, 벽면을 전면창으로 처리한 전통차실을 하나 더 마련했다. 그런데 다른 곳은 모두 띠살문이나 완자창 등 우리 전통 문을 달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실내에서도 바깥 풍광을 음미할 수 있도록 현대적 소재인 유리를 도입, 전면창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지만 전통한옥에 현대소재를 도입한 것이 그리 탐탁치는 않다. 사람을 위한 집, ‘한옥’ 집은 사람의 기를 만나 생명을 얻게 되고 사람은 다시 집의 기를 통해 건강한 생명력을 얻게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집,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집, 얘기 거리가 있고 사람을 보듬고 쓰다듬어줄 수 있는 집은 한옥이다. 한옥이 현대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사라진 원인을 생각건대 이는 집이 갖는 여성성을 중요시하지 않음에 있다. 이는 ‘한옥의 현대화’, ‘오늘날의 한옥’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사고는 친환경적이고 생명을 중시하는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인 자연과의 교감에 둔감하게 만들었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민들레울’은 단순히 영업집으로 쓰여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그 자리를 마련하고자 구성했다. 우선 건물로서의 ‘민들레울’은 전통에 바탕을 두고 옛것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건물로서의 가옥에서 나아가 집이 갖는 문화성을 고려하였다. 즉, 생활문화공간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정월대보름 놀이, 단오제, 다린 초당에서 매주 강습되는 서예교실, 필요에 따라 열리는 전통문화 강좌 등이 그것이다. 전통생활문화의 열린 마당! 이는 전통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정착되어지길 바라는 취지에서다. 초가와 돌담이 문화와 예술이 됨을, 마루와 마당이 훌륭한 무대와 한바탕 어울림의 장이 됨을 굴뚝과 창살이 삶에 녹아 든 영혼의 표현임을 내 삶의 둘레에 스르르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田 ■ 글 정순오 / 사진 김성용 ■ 건축정보 위치: 경기 포천군 소홀읍 직동리 부지면적: 4백평(준농림 전, 답) 건물형태: 한옥(본채-팔작집, 별채-초가, 사랑채-맞배집) 건축면적: 본채 45평, 별채(초가) 19평, 사랑채 4평 공사기간: 6개월 실내구조: 본채(대청, 부엌, 방 2), 별채(방1, 홀1), 사랑채, 측간 골조(보, 도리, 서까래 등): 소나무 육송(천연동 한옥에서 옮김) 벽체구조: 본채, 사랑채-흙벽돌, 별채-황토(맞벽치기) 외벽마감: 황토미장 내벽마감: 한지 바닥재: 비닐장판 지붕마감: 전통기와(천연동 한옥에서 옮겨 얹음) 난방형태: 석유 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 ‘민들레울’ 031-544-0082 ■ 미니사전 고주(高柱): 높은기둥. 용-마루: 지붕 위의 마루. 옥척(屋脊). 치목(治木):목재를 다듬고 손질하는 것. 치목-하다 (자) 산ː자(子): 지붕 서까래 위나 고물 위에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뭇개비 또는 수수깡을 가로 펴서 엮은 것. ∼를 엮다. 팔작-집 (八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 합각-집(合閣-). 다린: 차(茶)의 벗(友) 초당(草堂): 집의 원채에서 따로 떨어진 정원에 억새·짚 등으로 지붕을 인 작은 집채. 맞배-집: 맞배(박공)지붕으로 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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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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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Ⅶ] 집 짓기의 첫 단추 잘 끼우기 목재건조
- 전통 한옥에서 나무를 구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좋은 재목을 값싸게 구입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터. 집을 짓기 위한 준비로 작업장을 먼저 지으면서 전국의 목재소를 통해서 견적을 문의했다. 물론 설계도에 의해서 정확한 나무의 수량이 뽑아지고 난 다음에 진행했다. 혹자는 한옥은 설계도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종이로 된 설계도가 없을 뿐이지 대목수(혹은 도편수라고 부름)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 그려져 있다.목재소에서는 견적서를 '귀가래'라고 부른다. 견적서를 팩스로 강릉, 인천, 군산, 부산 그리고 원근 각처의 유명한 목재소에 문의했다. 육송으로 구입하면 좋지만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사이(재)당 2,000원이면 아주 싸게 구입하고 게다가 운임비, 제재비까지 합하면 내가 뽑은 재목 값은 3,000만 원이 넘어간다. 바로 여기서 전통 한옥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국산으로 써야 진정한 생태주택이지만 30평 한옥의 재목 값만 이렇다면 갑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수입목들이 값싸게 들어오고 있어 요새 웬만한 절이나 제각祭閣 그리고 민가들은 그것을 이용한다.수입 목재는 북미, 남미, 뉴질랜드,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들어오는데, 나무의 종류가 하도 많아 나도 잘 모른다. 다만 현장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종은 스프러스(Spruce, 전나무), 햄록(Hemlock, 북미산 미송), 더글라스-퍼(Douglas-Fir, 북미산 홍송) 등이 있다. 여기서 가장 고급재인 더글라스-퍼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사이당 1,700원(제재비, 운반비 포함)으로 최종 결정됐다. 2003년 10월 가격이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3,000원 정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마루를 까는데 사용되는 귀틀은 미송(햄록)으로 사이당 650원에 결정됐다. 국내 육송으로 하면 3,000만 원이 넘는데 수입목으로 해서 거의 그 절반 가격에 재목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생태주택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수입목을 사용했다고 비난 받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전통 한옥 짓기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이렇게 감히 밝힌다.1만 8000재의 홍송이 도착하다2003년 10월 7일 주문한 나무가 다음날 아침 8시에 도착했다. 25톤 트레일러로 덕유산자락의 현장에 도착한 목재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붉은 색 기운이 감도는 홍송이 넓은 밭 여기저기에 쌓였다. 읍내에서 이곳까지 80리(약 32㎞) 거리라서 지게차 1시간 임대료가 15만 원이었다. 가까우면 5만 원이면 가능한 것을…….산 속에다 집을 지으면 이래저래 부대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계기였다. 사람은 도저히 하역할 수 없는 거대한 목재들이기에 장비를 부르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나무는 뙤약볕에서 건조시키면 갈라지거나 틀어지기 때문에 하역하자마자 건조를 위해서 차광막을 덮어 놓았다. 물론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넓은 천막도 준비해 놓았다. 목재를 내리는 데 불과 한 시간도 안 걸렸다. 무려 1만 8000재(사이)나 되는 양을.목재상에서 선적할 때는 부산에 직접 내려가서 하나하나 확인한 것은 물론이다.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내 집을 지을 나무가 내일이면 도착한다는 것이 그렇게 설레는 일인지도 처음 느꼈다. 미리 지게차를 맞추어 놓았으니 이제 본격적인 집 짓기가 시작된 것이다.집 짓기, 겨울에 시작하라목재를 그늘에 재어 놓고 가을의 건조한 바람에 말리기 시작했으니 언제부터 치목할까 그 시점을 놓고 고민했다. 집을 짜기(치목해 놓은 부재들을 맞추어 집을 세우는 작업) 위해서는 치목 작업부터 약 두 달을 잡아야 한다.왜 하필이면 집을 추운 겨울부터 짓기 시작하려고 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우기, 겨울에는 건기에 속한다. 따스한 봄에 집 짓기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집을 세우는 과정에서 장마라는 복병을 만난다. 벽돌 조적이나 콘크리트 건물은 큰 문제가 없지만 나무 집은 치명적인 장애를 입는다. 나무에 시퍼렇게 곰팡이(청태)가 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썩는 것이다. 한 번 끼기 시작한 청태는 집이 다 지어진 후에도 깨끗하게 벗겨낼 수 없어서 난감한 일이 일어난다. 단 한 번 내 집을 짓는데 이런 장애를 만나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은 뻔하다.또 가을에 나무를 구입해서 건조하기 시작하면 곧 추운 겨울을 만나지만 건기에 작업할 수 있어 나무를 깨끗하게 치목할 수 있다. 물론 대형 작업장 건물이 있으면 문제 되지 않지만 자신의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계절을 잘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추운 겨울에 일하는 것이 생리적으로 무척 힘들 수 있지만 두꺼운 옷을 입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추위는 어느새 멀리 달아난다. 하루해가 짧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이 짧은 것 같지만 여름에 비해서 노동력은 오히려 효율적이다.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자주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스스로 지으려는 이들은 나무를 미리 구입해서 잘 건조해 놓았다가 겨울에 시작해 봄에 집을 세우고 장마가 오기전에 지붕을 덮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집의 경우는 12월에 치목을 시작해서 다음해 4월에 상량을 하고 5월에 기와를 이었더니 바로 비가 오기 시작하는 6월이 되었다.거듭 강조해도 입 아프지 않은, 목재 건조나무 건조 장소가 야외라면 건조기를 택해서 태양을 가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 내 경우는 나무를 전부 각재로 제재해 왔기에 태양에 노출된다면 그대로 틀어진다. 나무가 틀어지면 치수대로 켜온 나무를 못 쓰게 되고 쓸 수 있다 해도 틀어진 부분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부재를 작게 쓸 수밖에 없다.또 비를 맞지 않게 해야 한다. 비닐로 덮어 두면 너무 얇아서 바람에 자주 날아가고 찢어지니 시중에서 파는 파란 덮개비닐을 이용하면 좋다. 가격은 사방 10m 규격에 7만 원 정도 드는데 집을 짓다 보면 이렇게 꼭 필요한 자재들 값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그렇다고 이런 비용을 아끼려다 보면 집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랴!밑에 쌓인 목재를 다시 위로 순환시켜 골고루 마르게 도와주기 위해서 세 번 정도 나무를 전부 다시 쌓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나무 사이사이에 작은 각목을 집어넣는 것도 나무가 썩지 않고 통풍에 의해 잘 건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건조 장소로 시골의 큰 창고를 빌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집 짓는 이들은 대개 현장에서 목재를 보관하고 건조하기 원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주변에 한옥을 짓는 경우를 보면 이 건조 과정을 무시한 결과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집을 짓기 전 최소한 3년 전부터 목재를 준비해서 건조시켰다고 한다. 돈도 돈이지만 미리 건조된 재목으로 집을 짓겠다는 철저한 준비 과정인 것이다.그런데도 대부분의 건축주는 한옥을 짓겠다는 열망 속에서 건조 과정을 등한시한다. 건축업자는 건축주가 제시한 기한 내에 지어야 하기 때문에 건조과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우리 같은 목수도 주어진 목재를 치목해서 집을 세워주면 할 일이 끝난다.우리 집 목재는 6개월 정도의 건조기를 거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잘 했던 것 같다. 5월에 기와를 이고 나니까 바로 장마가 시작되자 잠시 청태가 생기더니 가을이 되니 이내 멈추었기 때문이다. 만일 건조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집도 페인트로 도색해야 했을 것이다. 흔히 간과하기 쉬운 목재 건조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나무는 약 50년 이상 건조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한옥을 제대로 지으려는 이들은 고재(해체된 한옥의 목재)를 구입해서 짓는 경우도 있다.《 아름지기의 한옥 이야기》라는 책에서 소개한 서울 안국동의 아름지기사옥도 그런 예인데 한옥으로 집 짓기를 원하는 이는 한 번 찾아가서 눈으로 보거나 아니면 책이라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저자는 한옥에 대해서 넓은 식견과 예리한 감각으로 집을 지었다.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나무를 다듬는 이야기에 들어가겠다.<다음 호에 계속.> - 글 황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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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Ⅶ] 집 짓기의 첫 단추 잘 끼우기 목재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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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2)
- 온돌, 방의 구분을 없애다 한옥에서는 안채나 사랑채처럼 남녀 구별에 따라 집을 나누는 경우가 있어도, 기능에 따라 방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크게 나누면 한옥에서 기능별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방, 부엌, 창고 외에는 없다. 그러나 서양의 집을 보면 침실, 응접실, 거실, 가족실, 서재, 주방, 식당, 창고 등 기능에 따라 수없이 많은 방으로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사용하는 사람(남녀 및 주인과 자식 등)에 따라서 건물 단위로 구분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은 잠을 자는 곳(와실臥室)과 거실(당堂)로 명칭이 나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용도에 따른 것이지만, 그렇게 구분하도록 거든 것은 가구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네 한옥은 이렇다 할 가구가 없기 때문에 가구에 따라 방을 구분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침대가 있기 때문에 침실이라는 방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옥의 방은 이불을 펴면 침실이요, 이불을 개어 다락에 넣으면 거실이고 응접실이다. 또한 밥상을 펴면 식당이고 밥상을 접으면 다시 거실이 된다. 이렇듯 한옥에서 방은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한옥의 방은 서양에서 분화된 각 방의 기능을 한곳에서 모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옥에서 방의 이름은 안방, 사랑방처럼 사용자에 따라 부르거나 건넌방, 문간방처럼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에 따른 이름밖에 없다. 즉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와 그에 따른 가구의 변화가 서양하고 전혀 다른 가변성이 풍부한 주거를 만들어 냈다. 지금과 같은 한옥의 구조가 조선조 초기 이전에도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가구의 특성 때문에 온돌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기 전의 방은 최소한 중국하고 비슷하게 용도에 따라 구분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입식 생활을 하는 경우 기능에 따라 사용하는 가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려시대 상류층의 집은 최소한 거실, 침실, 식당 그리고 응접실 정도는 구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집 구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해 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온돌로 달라진 집의 구조 이제 온돌이 들어오면서 집 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아보자. 우선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 때문에 바뀌는 것은 기단이다. 온돌을 깔자면 자연히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초기의 구들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 기단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온돌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온돌이 발전하면서 부넘기 등의 구조가 추가되고, 온돌을 설치하기 위해 바닥이 점점 높아져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높이가 됐다고 한다. 그러던 온돌이 현대에 와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예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고래를 통해 열기를 공급하느라 기단이 높았지만, 지금은 외부에 보일러라는 열원을 두고 온수로 난방하는 방식으로 변하면서 예전과 같이 기단이 높을 필요가 없다. 충남 홍성의 조응식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8호) 외에도 모든 한옥을 보면 온돌을 들인 본채와 들이지 않은 광은 기단의 높이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점을 보더라도 기단의 높이는 온돌의 설치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온돌 때문에 가장 많이 달라진 곳은 아마도 부엌일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예처럼 예전의 부엌은 반빗간 형식으로 집하고 별도로 구성했다. 이것은 부엌에서 이용하는 열기가 난방하고 관계 없기 때문이다. 한옥에서도 여름에는 부엌 뒷마당에 별도의 화덕을 설치해 음식을 만들었다. 이처럼 난방열과 취사열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달라진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안에 부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난방과 취사가 분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집은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을 집 안으로 들여왔다. 조선조에 부엌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에 바로 연결된 것은, 취사와 난방을 같이 하여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결과다. 우리나라의 날씨를 보면 사실 난방이 필요 없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중부 이북 지방을 보면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난방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취사열을 난방에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부엌은 고구려에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빗간 형식으로 유지돼 왔을 것이다. 한옥에 대한 오해 온돌에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하다 보니 방과 부엌의 높낮이가 크게 달라졌다. 이 때문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방으로 옮기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한옥의 부엌은 여성들을 가사에 묶어 두는 주범(主犯)이었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한옥의 부엌 때문에 불편을 겪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의 사회구조가 해체(解體)되고 노비 등이 하던 가사노동을 안주인인 여성들이 직접 하게 된 이후다. 결과적으로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집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조선조에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대갓집이다. 그러한 사회구조에서 안주인이 가사노동을 적극적으로 했을 까닭이 없다. 윤증 고택 맏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결혼 초기에 지금도 살아 계신 종부(宗婦)하고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종부께서는 “왜 아랫것들을 불러 시키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종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전에 하인을 부리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집안 노동의 대부분을 하인이나 노비가 전담했기 때문에 예전의 한옥은 사는 데 조금 불편해도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20세기 초입을 전후해 노비가 방면되고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경제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집은 이전과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구할 수 없게 됐다. 경제력에서 사람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안주인들이 직접 가사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의 사회상을 보고 예전의 집을 깎아내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요즘 짓고 있는 집은 사회구조에 맞추어 개선된 집이다. 지금의 집을 보면 과거하고 아주 딴판이다. 예전하고 다른 점은 여성의 가사 활동에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에 대한 연구 중 상당한 부분이 가사 노동의 최소화에 관한 거란 사실만 보더라도 여성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집에 대한 의사 결정권이 대부분 안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현재의 집은 안주인의 영역이다. 아랫목과 윗목으로 구분한 상석 온돌이 우리 정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정서적인 문제는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가미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판단이 많음을 전제로 한다. 지금의 온돌은 온수를 순환시켜 간접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 전체가 골고루 따듯하다. 그러나 예전의 온돌은 직접 불을 때어 난방을 했기에 불에 가까운 곳이 상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전통의 온돌에는 요즘은 희미해진 개념인 윗목과 아랫목이 있었다. 윗목과 아랫목의 온도 차이는 방 안에서도 상석과 하석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추운 겨울 윗사람이 방 안에 같이 있을 경우 우리는 당연히 따뜻한 아랫목을 윗사람에게 양보한다. 가뜩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적 개념이 강했던 조선조에서 방의 형편에 따라 상석과 하석을 구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도 상석과 하석의 개념이 있었으나, 우리하고 달리 상하의 구분이 가구의 배치나 입구의 방향에 따라 결정됐다. 우리나라처럼 난방의 문제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 중심 사고를 형성한 온돌 온돌은 가족 간의 유대를 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함께 덮고 옹기종기 모여서 하는 대화는 가족애를 키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적으로 대화의 거리는 그 사회 구성원 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연인 사이의 거리는 스킨십(Skinship)이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의 온돌은 이러한 사회적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히는 데 기여한다. 따뜻한 아랫목에 몰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통해 가족 간의 이해를 높여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정서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좌식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우리의 사고를 보수 성향으로 흐르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를 통해 나타나는 문예 우위의 성향은 성리학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온돌에서 연유한 정적인 문화에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을 벗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움직임에 적극적일 수 없다. 행동하기보다는 사고하는 습관을 더욱 길러 주는 것이 바로 온돌이 아닐까. 田 글 최성호 한옥 이야기는 이번 5월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글과 사진을 제공해 주신 최성호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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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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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이야기] 식생활 변화의 원인은 달라진 집 구조(2)
- 집에서 이뤄지는 생활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은 의식생활 그리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통틀어 ‘가사’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 활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많이 달라진다. 반대로 집의 구조에 따라 가사 활동이 변하기도 한다. 조선조나 근대까지는 가사 활동의 대부분이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70년대 이후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구조의 변화로 가사 활동이 예전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생활 방식이 서구화된 것에 있다. 집은 생활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생활의 변화는 집 구조를 바뀌게 한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식을 모두 집에서 해야 한다면 집의 규모는 매우 커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의식을 집 밖에서 한다면 집의 규모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할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어느 요리책을 보면 과거하고 다른 모습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해온 여성이 직장을 가진 다른 여성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깨우친 음식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장보는 것을 2주마다 하라고 권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 사온 음식을 냉동고에 보관하도록 권하고 있다. 세 번째는 시간 절약의 방편으로 식기세척기로 설거지를 대신 하라고 권한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 때도 가공 포장된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공식품을 사서 요리에 이용한다는 것은 ‘게으른 주부’의 상징이었다. 많은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제는 식생활도 주부의 수고를 덜어 주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현재의 생활은 불과 20년 전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조선조의 생활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서구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식문화를 받아들였다. 그 뒤로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도 예전하고 많이 바뀌었다. 부엌이 사라지고 주방이 들어오다 식생활의 변화는 식단이 우리식에서 서양식으로 바뀐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여러 변화 가운데서 특히 식사의 양이 예전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조 말에 찍은 식탁의 사진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사량이 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많이 먹던 것이 최근 30년 동안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식사량이 줄어든 원인은 음식을 섭취하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활동량이 급격히 감소한 것에 원인이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음식량과 식단의 변화는 식습관이 달라지는 데 그치지 않고, 식기 및 조리 기구의 발달로 이어져 예전의 부엌 체계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됐다. 조리 기구의 변화는 우선 가구의 모양이 달라지게 하고, 결국은 집의 구조도 바뀌게 한다. 예를 들면 냉장고도 예전에는 차게 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이제는 음식을 보관하는 저장고의 기능까지 겸하게 됐다. 냉장고의 용량이 점점 커지고 나아가서는 냉동고까지 필수품이 됐다. 그러니 부엌의 면적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90년대에는 김치냉장고까지 등장했으니 10년 전에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필자의 집은 새로운 가전제품으로 주방이 더욱 좁아졌다. 다음으로 식사량의 차이가 가져온 변화를 살펴보자. 식사량이 감소하고 그릇을 만드는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그릇의 크기와 무게가 많이 줄어들었다. 조선조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식기는 도자기의 한 종류인 사기그릇이 주종을 이루었다. 식사의 양이 많아 식기의 크기와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그 때문에 과거의 부엌 가구인 찬탁(饌卓)과 찬장을 보면 통나무로 든든하게 짰다. 현재의 부엌 가구들하곤 전혀 다른 모습일 뿐만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면적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식사의 양이 줄어드는 요사이는 모든 그릇이 점점 작아지는 추세에다 식기를 만드는 소재도 다양해져 그 무게가 많이 줄었다. 또한 식생활의 서구화 때문에 예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접시를 쓰고 있으며, 조리 기구의 발달로 각종 분쇄기, 믹서 등과 같은 도구들이 추가돼 예전과는 다른 수납공간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집은 과거의 한옥과는 달리 여러 가지 형태의 식기와 주방 기구를 효율적으로 수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한식, 중국식, 양식 등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바뀌고 있다. 게다가 부엌의 실내화 및 입식 부엌의 도입으로 ‘부엌’이 사라지고 ‘주방’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부엌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다. 아파트 때문에 쫓겨나는 발효 음식 이번에는 집 구조가 바뀌면서 식생활이 달라진 예를 살펴보자.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우리의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여러 가구가 한곳에 모여 사는 공동주택의 성격 때문에 냄새나는 음식을 멀리하게 됐고, 만들고 관리하는 데 넓은 마당이 필요한 장류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공동생활에서 소음만큼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냄새다. 그런 이유로 청국장처럼 냄새나는 음식을 아파트에서 해먹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됐다. 우리에게 많은 발효 음식은 냄새뿐만 아니라 관리를 하기 위해 통풍과 햇빛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는 그런 조건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발효 음식을 직접 담가 먹는 것이 어렵게 됐다. 아파트가 우리의 대표적 주거로 자리 잡으면서 발효 음식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각 가정마다 담가서 먹던 장이 사라져 가고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사다 먹고 있다. 집마다 고유의 맛을 간직하고 있던 된장이, 사 먹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단순해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장을 담가 먹을 수 없게 되면서 장을 담글 때 필요한 그릇과 도구도 덩달아 사라지게 됐다. 이제 아파트에서는 장독이 사라졌으며 가마솥도 볼 수 없게 됐다. 여성의 경제활동으로 달라진 주방 사회가 변하면서 주방 구조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알아보자. 70년대에는 30평대의 아파트도 부엌 옆에 ‘식모’가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식모방은 급속한 경제 발전에 힘입은 인건비의 상승으로 ‘식모’를 고용할 수 없게 되면서 사라졌다. ‘식모’는 그 후 ‘가정부’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바뀌었다. 식모하고 달리 가정부는 출퇴근을 한다. 현재는 대형 평형의 아파트에도 가정부가 기거하는 방이 없다. 이것은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식모’가 사라지면서 식사 방법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부엌에서 상차림을 하여 거실로 옮겨 식사를 했지만, 식사 준비가 주부의 몫으로 전담되면서 편의를 위해 서양식 개념의 식당을 도입했다. 과거에 식모 방으로 사용했던 면적만큼 식탁이 차지하게 됐다. 아파트 평면의 변화를 살펴보면 그 같은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70년대의 아파트를 보면 주방의 구조가 지금하고 사뭇 다르다. 당시의 주방은 지금보다 작아 식탁을 놓을 만한 넓이가 되지 못했고 옆에 ‘식모방’이 붙어 있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주방에 식당의 기능이 들어와 현재의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파트의 구조가 달라진 것은 삶의 변화를 좇아갔기 때문이다. 앞으로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요인 중의 하나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가사 활동의 양상은 지금보다도 더 많이 변할 것이다. 여성이 식생활을 전담할 수 없게 됨으로써 많은 부분을 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한 변화 중 하나가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김치를 사 먹는 가정은 늘어나 이미 식료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졌다. 이러한 현상은 김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치 이외에도 많은 밑반찬을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집에서는 부엌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독신자를 위한 원룸이나 오피스텔은, 부엌 설비를 최소화하고 다른 부분의 면적을 키우는 방식으로 내부를 설계한다. 그간 냉장고는 대형화 추세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형 냉장고가 독신자를 위한 필수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사회 구조가 변하면서 집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예다. 田 ■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 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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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이야기] 식생활 변화의 원인은 달라진 집 구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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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이야기] 기술발전과 집
- ‘자연 재료로 집을 지으면 절반은 이미 환경친화적인 집’이라는 말이 있다. 한옥이 자연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옥은 우리가 늘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져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우리나라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를 둘러보아도 전통 가옥이 있는 전원의 풍경은 그 지역하고 잘 어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신토불이 재료를 사용해 지역 환경에 맞는 건물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공업화 이전에 세운 대부분의 집은 이렇게 환경친화적 모습과 인간의 척도에 가까운 집으로 지어졌다. 결국 자연을 닮은 집이 지어지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의 능력 안에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상생(相生)한다는 정신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고 지은 집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떻게 집을 짓든 환경친화적인 집이 되는 것이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건물에 색을 칠할 수 있다. 같은 재료라도 어떠한 색으로 칠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런 특성은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지평(地平)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색상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됐다. 지금의 건축 환경은 과거하고 전혀 다르다. 옛날의 집은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에 색상에서도 지역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는 색상으로 지역성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보다는 건축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연 재료로 집을 지으면 절반은 이미 환경친화적인 집’이라는 말이 있다. 한옥이 자연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옥은 우리가 늘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져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우리나라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를 둘러보아도 전통 가옥이 있는 전원(田園)의 풍경은 그 지역하고 잘 어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재료를 사용해 지역 환경에 맞는 건물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공업화 이전에 세운 대부분의 집은 이렇게 환경친화적 모습과 인간의 척도(尺度)에 가까운 집으로 지어졌다. 결국 자연을 닮은 집이 지어지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의 능력 안에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상생(相生)한다는 정신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고 지은 집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떻게 집을 짓든 환경친화적인 집이 되는 것이다. 건축에서 기술의 발전이란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을 뜻한다. 현대건축의 다양함은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다양함을 만끽하게 됐고, 집에도 숱한 변화가 있었다. 기술의 발전 때문에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대량생산에 의한 대단위 주거 단지의 개발, 집 형태의 다양화, 보온재 및 냉난방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실내 환경의 변화 등 건축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분야 별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단순히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재료를 만들려면 먼저 관련된 분야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새로운 재료가 개발됐다는 것은 주변의 상황이 이미 성숙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건축에서 어떠한 현상이 부각됐을 때는 그에 연관된 분야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다. 하지만 그 같은 유기적 관계를 모두 언급하는 것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상황을 단순화시켜 재료와 구조 역학(構造力學), 공법 및 도구, 설비 기술, 기술과 의식 변화 등의 분야로 나누어 그 변화가 집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변화했는지 살펴보자. 집은 재료와 구조에 따라 변한다 기술의 발전 중에서 집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새로운 재료의 개발과 구조(역학)의 발전이다. 현대 건축에서 중요한 발명을 세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철근콘크리트와 철골구조, 엘리베이터다. 이 세 가지 발명은 현대 건축의 흐름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았다. 건축의 3대 발명품 철근콘크리트와 철골 구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고층건물이나 기둥 간격이 넓은 건물을 짓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1880년 독일의 지멘스사가 발명한 전동식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현재의 고층 빌딩은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나라 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파트는 철근콘크리트와 철골 구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주거 양식이다.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은 집의 내부 구조도 변화시켰다. 집에서 방의 크기는 기둥 사이의 거리에 따라 결정되고, 그 거리에 따라 기둥, 보 등의 크기가 달라진다. 기둥 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의 크기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커지기 때문에, 기둥 사이의 거리를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목재는 철근콘크리트보다 힘에 견디는 능력이 약하므로 기둥 사이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매우 굵은 목재가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를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한꺼번에 해소해 주었다. 목재보다 하중에 견디는 힘이 강하므로 보의 크기가 작아도 기둥 사이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전 같으면 궁궐이나 절 같은 특별한 건물에서나 가능했던 넓은 집을 일반인들도 쉽게 지을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단순히 재료의 개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료와 함께 재료의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역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은 구조역학이 발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콘크리트(압축력에 강함)와 철(인장력에 강함)의 장점(콘크리트와 철근의 열팽창계수는 거의 같음)을 살려서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를 발명했다. 철근콘크리트가 개발된 뒤에는 구조역학의 도움을 받아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켰다. 30년 전만 해도 철근콘크리트의 기둥 사이 거리는 6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최근에는 콘크리트 및 철근의 강도를 늘려서 기둥 사이 거리를 12미터 이상으로 늘렸고, 특수 공법을 활용하면 그 이상의 거리도 가능하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사람의 사고를 확장시켜 새로운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여 대규모의 건물이 속속 들어서게 됐다. 콘크리트가 만들어 낸 회색 도시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의 발전은 기술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예전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미감도 만들어 냈다. 우리는 ‘회색 도시’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듣는다. 이러한 신조어(新造語)가 나온 것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켜 집을 지음으로써 도시 전체가 회색빛을 띠게 됐기 때문이다. ‘회색 도시’는 콘크리트의 발명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단어다.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에 대한 경이감은 그 색상에도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근대 건축가들은 구조재로 개발한 콘크리트의 구조적 특성뿐만 아니라 감각적 특성까지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콘크리트가 외부로 노출되도록 설계한 건물이 많이 나타났다. 건축가들의 실험적인 시도로 도시의 색깔이 변해 회색빛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회색 이미지는 도시가 안고 있는 모순과 중첩돼 ‘회색 도시’라는 신조어로 정착됐다. 부정적으로 비치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콘크리트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형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소성(可塑性)과 특유의 냉랭하고 우울한(Melancholy) 분위기 때문에 지금도 콘크리트에 매료된 건축가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의 개념을 바꾼 유리 기술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집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유리 제조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서 창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전에는 창이 일정 크기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유리 제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창의 크기를 무한으로 확장시켜 놓았다. 나아가 유리만으로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기술력을 확보했다. 유리의 발전은 채광 문제에서 과거하고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예전의 집은 채광 면적의 한계 때문에 어두웠다. 그러나 유리 제조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어두운 집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과거에 창을 크게 내지 못한 것은 단지 유리 제조 기술상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유리는 열전도율(熱傳導率)이 매우 높은 반면 창문의 기밀성이 낮아, 창의 면적을 넓게 할수록 추위에 견디기 힘들다. 이러한 문제도 단열 성능이 높은 복층유리의 개발과 창틀의 단열성과 기밀성을 높여서 대부분 해결했다. 이렇게 발전한 유리는 실내를 밝게 하고 조망권 확보를 위해 창문을 점점 크게 하는 방향으로 집을 변화시켰다. 창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외관(外觀)의 변화를 뜻하며, 결국은 집 전체의 이미지를 바꾼다. 현재 개념의 창으로는 과거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례를 찾기 힘들다. 이처럼 달라지는 재료는 집의 개념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색상의 혁명 구조적인 재료의 개발과 성격을 달리하지만 도료(途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료의 발달은 색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집에 갖가지 색을 입혔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절, 관아 등 공적인 건물과 사가(私家)의 사당에서만 단청(丹靑)이 가능하도록 제한했다. 단청을 입히지 못하게 규제한 것은 근검 생활을 장려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재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화백자에서 청색을 내는 데 사용하는 코발트(Cobalt)는 수입해 썼는데 가격이 금보다 비쌌다고 한다. 그리고 단청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하지 못했다. 어쨌든 예전에는 집에 색을 칠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이 가운데 경제적인 문제는 기술 개발로 쉽게 해결됐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건물에 색을 칠할 수 있다. 같은 재료라도 어떠한 색으로 칠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런 특성은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지평(地平)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색상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됐다. 지금의 건축 환경은 과거하고 전혀 다르다. 옛날의 집은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에 색상에서도 지역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는 색상으로 지역성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보다는 건축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조망권을 가져다 준 펌프와 엘리베이터 설비 기술의 발전이 집에 미친 영향 가운데서 한 가지만 살펴보자.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주인은 대부분 2층에 거주하고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높은 곳에서 살았다. 아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급수 설비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펌프(Pump)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래층에서 물을 날라다 썼다. 목욕을 할 때도 물을 욕조에 부어 사용하고, 끝난 뒤에는 일일이 날라다 버렸다. 따라서 오르내리기 힘든 높은 곳에 산다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도로하고 바로 접하지 않으면서도 생활의 불편이 덜한 2층에서 거주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펌프와 엘리베이터가 발명됨으로써 그때까지의 불편은 사라졌고, 전망 확보와 프라이버시(Privacy) 보호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제 부자들은 보다 높은 곳에 살게 된 것이다. 요즈음 서울에 많이 지어지는 고층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그러한 예이다. 田 ■ 글·최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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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안영환의 한옥 예찬 _ “한옥은 명품입니다”
- 4년 전 내로라하는 20명의 독일 건축가들이 락고재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각국을 돌며 세계의 건축을 탐색하는 이들이었다. 별채에서 한창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빙둘러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요?"그 푸른 눈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한국인의 DNA에 한옥을 편하게 여기는 특유의 정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게 아닌 듯했다. 그 후로 한옥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 안영환글 박지혜 기자 사진 백희정 기자 취재협조 ㈜락고재 054-857-3410 www.rkj.co.kr 안동 하회마을에는 민박 대신 호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한옥 숙박업소가 있다. 바로 락고재갪古齋. 그만큼 콘텐츠와 서비스에 자신 있다는 뜻이다. 락고재가 국외에까지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서울 북촌 한옥마을 락고재를 개방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한옥을 구경하는 일은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한옥에서 자보고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고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20만~30만 원 호텔에 버금가는 숙박료를 지불하고 한옥에서 휴식한다. 뒤안길에 쓸쓸하던 한옥이 고급 호텔 못지않은 대접을 받게 됐다.한옥을 브랜드화하고 가치를 격상시키는 데 락고재는 톡톡히 제 몫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끈 장본인은 안영환(54세) 락고재 대표다. 건축 기술 전수를 통해 한옥을 계승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안 대표처럼 한옥을 상업화함으로써 한옥의 가치를 국내외에 퍼뜨리는 이가 있다. 그는 한옥과 대중이 서로 만날 수 있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한옥에 대한 관심은 20년 전 서울 마포 구옥 철거 현장에서 시작됐어요. 보통 집도 아닌 마포 황부자가 살던 집이었어요. 그 집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기존 마감 위에 겹겹이 외피를 감싸고 있었는데 철거하다 보니 한옥 뼈대가 드러났어요. 그 선線에 반한거지요."안 대표는 그렇게 한옥을 그의 사업 영역 안으로 가져왔다. 1994년 고택체험여행 상품을 개발했고 2003년 한옥 숙박업을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한옥을 지어 한정식당을 열었다. 지난해 목재가공유통업을 시작해 한옥 건축 분야에까지 발을 넓히고, 올해 3월에는 안동 한옥학교를 열었다. 끊임없이 한옥에 노크하다안 대표는 그의 한옥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서울 락고재를 계획할 당시 한옥의 현대화에 대해 고민했어요. 예전 진단학회 근거지였던 130년 된 한옥을 리모델링하면서 한옥의 단점인 욕실 사용의 불편함을 해결했어요. 바로 한옥 방 수납공간인 반침을 개조해 현대식 욕실을 넣은 거지요."그리고 두 번째 시도는 서울 명동 콘크리트 건물 위에 한옥을 올린 것. 한정식당 진사댁은 도심에서 그것도 비좁은 골목 안에 한옥이 들어섰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물이 됐다. 3층 콘크리트 건물을 3층만 헐고 2층 위에 30평 한옥을 개축한 것인데 한옥을 올린 후 무려 매출이 3배나 뛰었다고 한다. 예약도 3층 한옥부터 마감된단다.한옥 식당은 음식 값을 아래층보다 더 비싸게 받는데도 이처럼 더 선호되는 것은 맛도 맛이지만 사람들이 한옥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고 안 대표는 말한다. 그리고 하회마을 락고재다. 경북 안동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주거문화와 마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민속문화재 122호로 지정됐고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귀중한 민속자료다. 마을에 속한 것을 마음대로 고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그런데 안동 락고재가 리모델링이 아닌 신축한 한옥이라니 놀랍다. 다르게 표현하면, 조선시대 한옥을 제대로 재현했다는 소리다.2년 전문을 연안동 락고재는 건축허가에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문화재청심의 통과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가옥 형태를 따른다는 조건으로 심의를 거쳤고 그 대신 편리한 현대 주거양식에 맞춰 내부 길이를 칸당 30㎝ 늘이고 서울 락고재처럼 욕실을 방 안에 드리되 욕조를 설치한 보다 넓은 욕실로 만들었다. 애초 초가를 계획한 건 아니었다. 하회마을 가옥 배치 상 마을 입구에 초가가 늘어서 있는 전통을 따라야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사람들은 한옥을 짓는다 하면 기와집을 지으려 하지 초가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해마다 지붕을 교체하는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는데 요즘은 이엉 엮는 일도 어려워졌다. 기술자가 귀할 뿐 아니라 현재 보편화된 개량종 벼는 길이가 짧아 지붕 재료로 쓸 수 없다는 것. 재래종도 기계로 베면 길이가 짧아지므로 낫으로 베야 한다.안대표가 문화재마을에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던데는 내력이 있었다."하회마을은 600여 년 전 류운룡·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한 풍산류씨 씨족마을인데 그 전에 우리 선조인 광주 안씨가 이곳에 일가를 이뤘다고 해요. 그리고 우연히 문서를 살피다 고조할아버지께서 조선 선조 때 재상 류성룡을 향사한 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원장을 지낸 사실을 알게 됐어요. 문화재청 심사위원들이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 어렵사리 건축 허가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거예요."류성룡의 12대 손이자 탤런트 류시원의 아버지 류선우 씨와 친분을 쌓은 안 대표는 류 씨의 하회마을 집 담연재를 고택체험여행의 중심으로 삼기도 했다.그의 한옥사업 네번째시도는 전통누각의 현대화다. "한옥은 처마가 길게 뻗어 나와 200평 대지에 건폐율 20%만 넘어가면 답답해 보여 실내가 좁아지게 된다"는 안 대표는 개방감 넘치는 한옥 공간을 고민하다 누각을 떠올렸다. 기둥을 복층으로 세우고 1, 2층에 유리 접이문을 달아 누각의 느낌을 살리면서 현대 공간의 편리함을 접목했다. 한옥 보급 확대를 위한 안동 한옥학교"지난 18년 동안은 한옥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인 것 같아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라는 안 대표는 지난해 목재가공유통 사업을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한옥 건축에 뛰어들었다. 현재 12명이 교육 받고 있는 락고재 부설 안동한옥학교는 한옥의 저변 확대라는 대의적 명분도 있고 한옥 건축현장 인력 공급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른 한옥학교에 비해 교육기간이 6개월로 긴 편인데 과정을 수료하면 3개월 인턴 과정을 제공한다."한옥 한 채 지으려면 평당 1,000만 원 내외 부릅니다. 일반 주택의 두 배 혹은 그 이상이지요. 한옥이 널리 보급되기 위해선 건축비를 내려야 하는데 기계 가공과 모듈화도 한 방법이겠으나 인건비가 비싸다는 점도 무시 못해요. 그래서 인력 양성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교육생들은 수료 후 인턴십의 특전을 얻게 돼 한옥 현장에 투입됩니다. 인턴 목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좋고 공급자와 건축주는 인건비를 낮출 수 있어 서로 윈-윈 할 수 있습니다."문화재 관리국 수리 기능자(대목수) 제 3053호이자 건축목공기능사, 전통한옥시공기술자인 황칠봉 씨가 락고재의 한옥 교육 및 건축을 총괄한다. 일주일에 5일 진행되므로 1개월 50만 원의 교육비는 거의 숙식비로 들어가는 셈이다.안 대표의 한옥 사업은 그 끝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올해도 벌써 알려진 곳만 두 곳 착공 준비 중이다. 그 중 하나가 하회마을 외곽 상업지구에 조성할 한옥 호텔. 2700평 부지에ㅁ ㄷ 등 다양한 형태의 초가와 기와집을 조화롭게 건축할 예정으로 두바이 칠성급 호텔 못지않은 고급콘텐츠를 담을 예정이다. 타 문화권 고객을 배려해 거실만큼은 입식, 최첨단 시스템을 적용할 방침이다. * 풀어내기에 그리 만만치 않은 한옥이라는 한 가지 테마로 락고재라는 성을 이룬 그에게, 성공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 맨땅에 헤딩하라."일초의 주춤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말해 귀가 쫑긋 솟는 줄 알았다."노매드Nomad(유목민) 정신이 나를 긍정으로 이끄는 힘이에요. 이것저것 재지 않고 거칠 것 없이 일을 진행하다 보니 성공했다 소리 듣게 된 거지요."그의 호號는 몽중夢中이다. 도를 닦던 몽중이라는 호를 가진 선배가 "너야말로 드리머Dreamer"라며 물려준 이름. 호가 그를 대변하는 듯 그는 꿈을 말하는 데도 주저없다. 한옥콘도를 세우는 것이 앞으로 이룰 꿈이다."한옥이야말로 명품 관광산업입니다"라고 재차 강조한 몽중 안영환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전통은 지키는 것을 넘어 퍼뜨릴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함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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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안영환의 한옥 예찬 _ “한옥은 명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