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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정사(南澗精舍 : 대전시 유형문화재 4호)는 우암 송시열(1607-1689년) 선생이 말년(숙종 9년 : 1683년)에 학문을 닦고 연구할 목적으로 세운 별당이다. 정사는 원래 불자의 수행지를 뜻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공부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동국 18현-조선시대에 유학의 대가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18분-의 한 분으로 조선 주자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노론의 영수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89년 기사환국-숙종 15년(1689)에 소의 장 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때 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로 유배를 간 후, 그해 유월 다시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남간정사는 원래 송시열 선생의 개인 정사로 지어졌지만, 후대에 그를 배향하기 위해 남간정사를 세우면서 일종의 서원 성격을 띠었다. 생활하고자 지은 한옥도 아닌 남간정사를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원림(園林)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변이 우암사적공원으로 조성되고 집이 많이 들어섰기에 한적한 원림의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일제시대 도청 소재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적하고 수려한 공간을 자랑했다. 주변 환경이 제대로 보전됐더라면, 담양의 소쇄원 못지 않은 원림으로 각광받을 만한 곳이다.


남간정사는 연못을 조원(造園)의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곳은 많이 있지만, 남간정사만큼 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과 돌과 그리고 폭포와 수목까지 잘 어우러진 곳은 찾기 힘들다. 원림 전체가 잘 어우러진 곳이 소쇄원이라면, 연못이라는 주제로 잘 어우러진 곳이 남간정사이다.


연못으로는 두 줄기의 물이 들어온다. 하나는 계곡에서 물길의 일부를 틀어 끌어들이고, 하나는 남간정사 뒤에 있는 샘물에서 누마루 하부를 통해 들어온다. 이렇듯 집이 물을 가로질러 세워진 남간정사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원래 수맥이 있는 곳에는 집을 짓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 이유는 기골이 장대한 송시열 선생이 수맥을 이길 만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다고 한다. 어쨌든 상식을 벗어난 배치로 집을 보는 흥취를 돋운다.



집은 주인의 입장에서 감상해야


남간정사에서 바라보는 집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전면 4칸, 측면 2칸의 가운데 2칸은 대청인 집의 수준은 높지 않다. 남간정사의 가치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나 집의 수준에 있지 않다. 남간정사의 풍광을 제대로 즐기려면 집 안에서 바라다보아야 한다. 이러한 개념이 잘 살아 있는 건물의 대표적인 예가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그곳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관은 자연을 정원으로 삼는 호연지기를 깊이 느끼게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주인의 입장에서 집을 짓는다. 집에서 바라보는 모든 경관은 주인이 즐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집은 주인의 관점에서 집을 짓기에,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개념에서 설계되는 서양의 집과는 다르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주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계획의 중요한 요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옥이나 정원을 찾아갈 때는, 먼저 주인의 입장에서 돌아보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집터를 잡을 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좌향이다. 집이 앉혀져서 어떠한 안대를 바라볼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곧 집주인이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집에 사는 주인이 좋은 기(氣)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관도 마찬가지다. 좋은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짓고, 주인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경관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 조경의 원칙이다. 그러한 원칙은 이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청에서 바라보면 기국정(杞菊亭) 옆에 있는 바위들과 폭포 그리고 방장산(方丈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경의 핵심 요소들을 한곳에서 모두 살피도록 계획한 것이다.
남간정사 대청에 앉아서 바라보는 경관은 편안하면서도 잔잔한 흥취를 돋운다. 대청에 앉아 좋은 술을 한 잔 걸치고 나면 절로 시 한 수를 읊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못과 연못 안에 있는 방장산, 그곳에 심어진 오래된 버드나무와 기암괴석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자그마한 폭포의 낙수 소리… 이러한 모든 정원의 요소들이 어울려 남간정사를 만들고 있다.


남간정사 좌측에는 누마루가 놓여 있다. 더 높은 곳에서 경관을 감상하라는 배려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기국정과 새로 지은 집들에 가려 제 맛을 느낄 수 없게 됐다. 기국정은 예전 소재동 고택 옆에 방죽을 쌓고 세웠던 별당이다. 일제시대 때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되자, 이곳에다 옮겨 온 것이다. 송씨 집안에서는 이 건물을 옮길 것을 주장하고 있다. 누마루에서 보는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기국정이 사라지면 원래의 맛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발과 고택 보존의 의미는…


남간정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벚꽃이 피는 봄이라고 한다. 하얀 벚꽃과 꽃 그늘이 진 연못 그리고 신록이 가득한 나무들이 어우러지는 남간정사의 풍광은 마치 선경에 온 듯할 것이다. 초여름에 찾은 남간정사도 아름다웠다. 푸르름이 깊어진 나무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남간정사의 모습은 수줍은 처녀를 보는 듯했다. 이처럼 남간정사는 사시사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남간정사를 찾을 때마다 역사의 보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의 남간정사 주변을 우암공원이라고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 오히려 더 어수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 남간정사 담 밖에 인공으로 조성한 하천도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흘렀던 하천이고, 연못 바로 앞쪽에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송씨 집안에서는 현재 외삼문 앞에 복개한 부분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 중이라고 한다. 현재 남간정사를 둘러싸고 있는 담도 원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담도 최근 다시 높게 쌓아서 남간정사에서 내다보는 시야를 가리고 있다.


또한 주변 개발로 높은 집들이 들어서 남간정사의 경관을 막고 있다. 이러한 집들이 없다면 앞은 시원하게 트여 멀리 계룡산까지 바라보여 마음까지도 맑게 했을 것이다. 최근 무분별한 개발이 남간정사를 만든 송시열 선생이 의도했던 경관들을 다 가리고 있다. 주변 경관이 자연스럽게 살아 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서 보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남간정사이다.田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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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원림(園林)의 백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남간정사(南澗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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