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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라고 하면, 언뜻 특별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중앙선과 영동선 그리고 경북선이 교차하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의 이치를 가르치고 발전시킨 유학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중심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이 공부하던 순흥 땅에 스승을 기리며,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웠던 곳이 현재 남아 있는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이곳에서 배출시킨 인재는 무려 4000여 명에 달한다. 명종 5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이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꾸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훗날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기초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 옆에는 영주 선비촌이 자리한다.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충절이 서려 있어, 서원에서 배출된 선현들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의 복원 및 생활상을 재현하여 후세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우고 전인교육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선비촌에는 영주시 소재 지정 또는 비지정 전통주택 12채를 재현해 놓았다.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 영주 소수서원까지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불과 두 시간 반이면 도달할 수 있다. 소백산 죽령터널을 지나 곳곳에 인삼밭이 널린 풍경을 보며 풍기나들목을 빠져나오면 20분 만에 소수서원에 도착할 수 있다.

서원의 고색 창연한 분위기는 입구에 가득한 소나무 군락지로 더욱 깊어진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소나무 품종인 적송이다. 껍질과 속이 붉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금강송이라고도 부른다. 유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하여 학자수(學者樹)라는 별칭이 붙은 소나무 숲과 함께 500년 넘는 은행나무, 서원의 전통 가옥과 정자 그리고 주변을 휘감아 흐르는 죽계천 등이 조화를 이루며 소수서원은 유교 문화의 깊은 맛을 더해 준다.



마침 취재진을 맞이하는 소수박물관의 학예연구원인 박석홍 씨의 안내로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그리고 목적지인 선비촌을 둘러보았다. 선비촌은 소수서원의 뒤쪽, 죽계천의 반대편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용인 민속촌을 연상시킬 만큼 각양각색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하나의 펜션 촌을 이룬다. 20만 평의 땅에 기와집이 7채, 초가집이 5채 그리고 강학시설 2동과 정자, 누각 등 다양한 민속시설과 저자거리로 조성해 놓았다.

숙박공간과 전시공간을 합쳐 40여 채의 전통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순흥 지역의 전통 한옥을 완전하게 재현시킨 아흔아홉 칸 양반 집이 완공 단계에 있다. 이 가운데 펜션 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17동에 이른다. 기와집 객실이 50개, 초가집 객실이 20개 등 모두 70개의 펜션 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실에는 저마다 별개의 세면실과 화장실을 설치하여 고객의 불편을 최대한 덜었다. 화재 예방 차원에서 취사는 별도로 허락되지 않지만 저자거리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양반 집에서 유교 문화 체험을


영주 선비촌은 2004년 9월 정식으로 개관했다. 준비하는 데만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전통 한옥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데에 8년이 걸렸다. 박석홍 학예연구원에 따르면, 영주 지역 유지들이 이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선비촌을 건설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구한말 의병과 왜병이 일대 접전을 벌이면서 수많은 전통 가옥이 소실됐는데, 그 전만 해도 200채에 가까운 한옥이 즐비했던 곳이다. 아흔아홉 칸의 기와집들이 줄지어 있어서 몇 십리를 가도 비를 맞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조선 세조 때에는 단종(端宗)의 복위를 시도했던 이곳 유생들의 반역 행위로, 순흥 지역 수백 명의 유생과 가족이 몰살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향(逆鄕)의 고을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 때 이미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태워지고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런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세와 영화가 넘쳤던 순흥 안씨의 땅으로, ‘참나무 숯불에 이밥을 해먹는 동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였다.



과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재현하여 말살된 순흥의 역사를 복원시키자는 후손들의 열망이 영주 선비촌을 만든 힘이 됐다고 한다. 여기에 향토사학자, 민속학자, 고건축전문가, 문화인류학자, 대목 등이 한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정부와 도청, 시청 등 관련 기관들이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세계에


영주 선비촌은 현재 국내보다는 외국에 더 많이 알려진 상태다. 한국 전통 문화를 체험하려는 주한 외국사절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얼마 전에는 스위스 바젤대학의 건축학과 학생 20여 명이 숙박하며 한국 전통 가옥을 배워 가기도 했다.

선비촌에는 영주와 풍기 지역의 전통 가옥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원형 가옥을 다치지 않고, 그 건축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경북 북부지역 유교 문화권의 건축과 생활 양식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어 전통 가옥을 연구하는 동아리 모임이나 전문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그 가운데서도 가족 단위의 고객이 가장 많다. 순흥의 역사와 전통 문화 그리고 소수서원이 보여 주는 유교 세계를 자녀들에게 체험시키려는 부모들의 방문이 두드러진다. 지난 겨울철에도 주말 예약이 넘쳤다. 숙박료가 2만∼4만 원으로 저렴하기에 이곳을 아는 가족들은 다시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그리고 인근의 영주 부석사 등을 방문할 수 있어서 자녀들을 위한 체험 학습장으로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다고 하겠다. 또한 청소년 수련장과 학술 세미나장 등도 갖춰져 학교 또는 기업 단위의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전통 문화를 테마로 하는 대규모 펜션 촌으로, 현재 영주 선비촌은 하나의 실험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펜션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가장 한국적인 숙박시설이 고객들에게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선호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자기들만의 휴식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20대 커플들에게는 다소 불편한 곳으로 보이겠지만, 색다른 체험과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고객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재 영주시로부터 위탁 경영을 맡은 (주)길원개발의 대표이며 영주 선비촌 촌장인 김준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를 체험하게 하는 학습장으로 준비된 곳입니다. 과거의 생활을 재현하다 보니 불편한 점도 있지만, 우리 조상이 터득한 생활의 지혜를 알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고객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을 늘려서 한국 최고의 전통 문화 체험장으로 가꿔갈 계획입니다. 특히 고객을 위해 피부에 와 닿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분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지만, 이곳 체험은 한옥 펜션으로 특별한 별미로 기억될 것입니다.”田


김창범<본지 편집위원> /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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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의 펜션 이야기] 전통 문화의 별미를 차려 놓은 한옥 펜션마을, 영주 '선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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