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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鄭汝昌 고택으로 더 유명한 정병호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은 하동 정씨 가문의 종택이다. 정병호(일두, 1450`~1504 / 세종 32~연산군 10) 선생은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분으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에게 배웠고,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됐다.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소격서참봉이 됐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로 연산군을 가르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됐고,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정병호 가옥은 정여창 선생 사후 약 200년이 지난 1690년에 지어졌다. 그때 안채를 짓고, 그로부터 150여 년 뒤인 1843년 사랑채를 지었다. 솟을대문에는 충신 한 분, 효자 네 분의 정려旌閭가 있다.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데 다섯 개나 걸려 있느니 하동 정씨 가문의 내력을 알 만하다. 네 개의 효자 정려나 사랑채에 걸린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에서 ‘효’를 가문의 정신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님에게 효도하고자 출사出仕를 사양한 정여창 선생의 효 정신이 후손에게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정병호 가옥에서 처음 느끼는 즐거움은 솟을대문에 이르기까지 고샅의 은근한 정취다. 고샅은 마을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고샅 입구에서는 대문이 직접 보이지 않으며 은근히 길고 깊다. 그러한 이유는 방어적 의미, 즉 집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고샅 가운데 제대로 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은 대전의 동춘고택, 예전 ‘왕초’라는 드라마에도 소개된 창평 고씨마을 고샅 그리고 남사마을 최씨 댁의 고샅 정도다. 동춘고택의 고샅은 밋밋하고, 창평의 고샅은 다소 좁고 지루한 느낌이 들며, 남사마을 최씨 댁의 고샅은 높은 담으로 답답하다. 그렇기에 정병호 가옥의 고샅만큼 정취가 아늑하지는 않다. 지금은 담이 예전보다 높아져 인간적인 맛은 감소했지만 집까지 가는 길은 쉬 보여 주지 않는 여인의 수줍음과 고즈넉하면서도 그 은근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풍수상 좌향을 바꿔 앉힌 사랑채



정병호 가옥의 배치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사랑채는 동향으로 배치했다. 원래의 사랑채는, 현재 사랑채 남쪽 광이 있는 자리에 안채와 같은 향이었다. 1843년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풍수의 영향으로 좌향坐向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좌향까지 바꾸면서 변화를 준 배치 때문에 사당의 위치가 일반 배치와 전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 배치보다 안채를 훨씬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옛날의 배치는 사랑채를 밖으로 내세우고 좌측에 중문을 두고, 그 뒤에 안채를 둔 일반적인 형식이었을 것이다.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길옆의 중문 안 사랑채와 광채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배치는 결국 내외 규범을 더욱 심화시켰다. 새 사랑채는 합천 묘산의 묵와고가默窩古家 누마루 형식을 차용하면서 이전 사랑채보다는 더욱 권위적인 모습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안채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단을 높여 지은 사랑채는 그 이상 권위적일 수 없다. 사랑채의 기둥 또한 원기둥을 사용해 격식을 한 단계 높여 권위를 더했다.
사랑채 높이를 안채 마당에 맞추어 짓다 보니 기단이 높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랑채를 새로 지은 도편수도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랑채 기단을 2단으로 조성했다. 첫 번째 기단을 적당한 높이로 낮추고, 그 위에 다시 단을 높여 사랑채를 구성했다. 그럼에도 솟을대문으로 들어서 사랑채를 볼 때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사랑채 벽면에 커다랗게 써 놓은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몸을 더욱 움츠리게 만든다.

사랑채는 앞뒤에 퇴를 둔 전후퇴집이다. 쓰임새가 가장 많은 가운데 칸은 칸살을 넓혀 활용성을 높였다. 사랑채 우측 누마루 앞쪽에는 자그마한 정원을 구성했는데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만들고, 그 좌우에 주봉主峰보다 낮은 봉우리를 만들어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이처럼 사랑채 정원을 적극적으로 만든 예는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들다.

대지도 넓어 사랑마당도 만만치 않다. 아마 정원이 없었다면 작은 사랑채까지 휑하게 뚫려서 삭막했을 것이다. 정원의 위치가 적절하여 넓은 마당에 적당한 차폐감을 만들어서 작은 사랑채의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에 삭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타 주변의 나무는 근대에 이르러 심은 것이라고 한다.



집의 넉넉함이 적선으로 나타나



안채는 민도리 3평주 오량집이다. 바깥 사랑채가 권위를 갖추었다면 안채는 실용성을 적극 반영해 지은 집이다. 안채의 기단은 밖에서 움직이기 편하게 낮은 외벌대로 돌렸다. 이 낮은 기단이 사랑채와 대비되는 부분으로 안채 전체 분위기에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 좌측에 부엌을 둔 안채는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칸 반 규모다. 옆으로 길게 지어 규모가 상당히 커 보인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주 칸을 넓게 잡고 전후에 퇴를 놓아 방 간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안채를 길게 짓다 보니 마당이 매우 넓어져 시원스럽다. 좁은 골목과 같은 중문마당을 지날 때의 답답함이 안채에 들어서면 일거에 사라져 버린다. 넓은 마당 서쪽 편에 우물이 있고 동쪽 편에 사랑채를 대한다. 안채 대청은 네 칸 규모지만 칸살이 넓어 시원하다. 이렇듯 넉넉한 집에서 살면 사람의 마음도 저절로 넓어진다. 그러한 마음은 주변에 대한 적선積善으로 나타났다. 그 덕분에 해방 후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좌·우 간의 이념 대립이나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가세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고 종부는 증언한다.



이 집의 배치를 보면 독특한 점이 있다. 집을 편하게 돌다 보면 미로 같은 느낌이 들면서 어느 덧 집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집의 구조가 내부로 개방돼 있기 때문이다. 외부로는 시각적으로 완벽한 폐쇄 구조지만 내부로는 내외의 정도가 매우 약하다. 사랑채도 안채 쪽으로 어느 정도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광의 배치 때문이다. 광을 사랑채와 안채에서 같이 사용하도록 배치하다 보니 안채를 완벽하게 구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함양 개평리


개평리는 민속마을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어느 민속마을 못지 않은 옛 마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이곳에는 정병호가옥 외에도 함양오담고택(咸陽梧潭古宅/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咸陽介坪里盧參判宅古家/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함양개평리하동정씨고가(咸陽介坪里河東鄭氏古家/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등이 있다. 또한 함양개평리소나무군락지(咸陽介坪里소나무群落地/경남기념물 제254호), 함양개평리소나무(咸陽介坪里소나무/경남기념물 제211호) 등이 있다. 특히 함양개평리소나무는 이곳에 살고 있는 하동 정씨의 소유가 아니고 거창의 정온 선생 댁인 초계 정씨의 소유이다. 하동 정씨 집성촌에 초계 정씨가 관리하는 대지가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田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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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개방감과 폐쇄감을 한눈에 함양 정병호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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