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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강화군 유형문화재 제20호)은 조선 왕조 25대 임금인 철종哲宗(1831∼1863년)이 어려서 살던 잠저潛邸다. 잠저란 세자 책봉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른 분이 살던 사가私家를 말한다. 현재 용흥궁은 예전 철종이 살던 곳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철종 4년(1853년)에 건물을 새로 지어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후 용흥궁은 고종 때인 광무 4년(1900년)에 이재순이 중건했다고 하니, 현재의 건물은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철종(이름 변, 아명 원범元範)은 정조의 아우인 은원군의 손자로서, 헌종이 후손 없이 돌아가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영조의 손자는 붕어崩御한 헌종과 철종인 변 둘밖에 없어 철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철종은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로 유배당했다. 이때 원범의 나이는 11세였다. 그후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은언군, 부인, 며느리가 사형을 당하고, 그후 아버지와 형은 철종의 형인 원경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이 발각되어 사사賜死를 당했다. 이때 원범의 나이는 14세였다.

많은 드라마에서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자 원범을 무식한 농사꾼으로 이야기하지만 곱게 자란 왕실의 자제였을 뿐이다. 14세까지 영조의 직계 왕손인 아버지가 살았으니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명필은 아니더라도 매우 잘 쓴 글씨인 철종의 어필御筆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범은 아버지가 죽은 후 생활이 궁핍해지자 왕실 가족의 생활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체험한 후 일부러 은둔을 자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필자에게 조선왕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 누구였는가를 말하라면 주저 없이 철종이라고 답할 것이다. 철종은 단종보다도 더 불행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이미 왕실 가족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뼈저리게 느꼈고, 왕위에 올라서도 세도가에 휘둘려 아무 것도 못하는 허수아비처럼 생활하면서 언제 왕위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트레스가 쌓여 한참 젊은 나이인 서른셋에 세상을 하직했다고 본다. 철종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깊은 회한 속에서 일생을 보낸 불행한 왕이었을 것이다.

철종이 관의 감시 속에서 생활한 집

그러한 철종이 생활했기에 잠저로 다시 태어난 용흥궁은 그의 생애만큼이나 가식에 차 있는 집이다. 용흥궁은 살림집이 아니다. 한마디로 전시용 가옥일 뿐이다. 과거 철종이 살던 집은 초라한 초가였기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과거 초가집 터는 용흥궁 사랑채 옆에 별도로 잠저구기비潛邸舊基碑를 세워 그 위치를 알려 놓았다.

용흥궁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강화유수부가 있던 곳이다. 즉 용흥궁이 위치한 곳은 관아의 입김이 직접 미치는 중심가에 속한다. 이러한 곳에 철종 일가의 집이 있었다는 것은 중앙에서 귀양을 온 왕족을 관의 감시 하에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왕실에서 철종 집안의 행적을 명확하게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6월 6일 붕어하자 곧 하교를 내려 ‘영조의 자손은 강화에 있는 원범밖에 없다’며 그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한다. 그리고 사흘 후인 6월 9일에 철종이 인정문에서 즉위한다.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철종을 즉위토록 한 것은 이미 왕실에서 철종 일가의 행적을 소상히 알았다는 것을 뜻한다.

안채 뒤에 위치한 사랑채

용흥궁의 솟을대문은 골목에서 다시 꺾여 고샅 안쪽에 위치한다. 다른 곳과 달리 사랑채가 안채 뒤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솟을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는 구조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담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애매하여 안채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안채에 사람이 살지 않기에 원래 그렇게 한 것인지 후대에 보수하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분명치 않다(강화군청에 따르면 최근에 보수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부지가 좁다보니 솟을대문 바로 안쪽 마당이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대문 앞에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야 했기에 더욱 옹색해졌다. 이러한 옹색함 때문에 ‘용흥궁’이라는 당호堂號가 무색해진다. 솟을대문에서 우측으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고 좌측으로 가면 계단을 올라 일각문을 통해 사랑채로 들어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다시 꺾여 들어가기에 안채로의 진입이 매끄럽지 못하다.

안채는 ㄱ자형이다. 좌측에 건넌방이 있고 2칸 대청 그리고 동쪽에 2칸 규모의 안방이 있다. 안방 앞으로 2칸 부엌이 돌출되어 있다. 이곳은 일반 부엌하고 위치가 다르다. 대부분의 집은 부엌이 좌측에 있는데 이곳은 우측에 부엌이 위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우선 입구가 안채 좌측에 있다 보니 부엌을 좌측에 배치할 경우 대문에서 바라보이는 부분이 건물로 막혀 답답할 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필요한 작업 공간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용흥궁이 살림집이 아니었다는 모습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사랑채 배치를 보면 전망과 권위를 위하여 언덕에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안채가 가려 시원한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실제 사람이 살기 위한 집이라면 사랑채 부엌 상부에 고미다락을 설치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벽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모습은 안채의 건넌방도 마찬가지다. 부엌도 살림집으로 계획한 것이라면 장독대 등을 확보하기 위해 부엌 밖의 공간이 매우 넓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공간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집에는 툇마루가 많지 않다. 사랑채 전면 외에는 툇마루를 찾아볼 수 없다. 퇴는 생활에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공간이다. 따라서 안방이나 건넌방 또는 대청 뒷부분에 퇴를 놓는 경우가 많다. 이 집에서 살 생각이 아니다 보니 생활에 필요한 퇴를 많이 생략한 것이다.
안채의 불발기창도 일반 집에 비하여 매우 크다. 한옥문화원 신영훈 원장은 이렇게 클 경우 내부에 있는 사람이 불안해하기에 불발기는 작게 만드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기에 불발기를 크게 만든 것이다.

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지은 집

용흥궁에서는 왕의 잠저로서 권위를 내세우려는 시도도 보인다. 우선 사랑채를 높은 곳에 배치함으로써 안채와의 위상에서 차별화를 두고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굴도리집으로 사랑채를 만들었다. 안방이나 큰사랑방의 간살을 일반 집보다 훨씬 크게 잡아 방을 넓게 만들었다. 안방과 큰사랑방의 간살 넓이는 다른 집의 칸 반 크기로 매우 넓어 시원스럽다.
건물 부재는 당시 목재 사정을 고려할 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사용했다. 기둥의 한 변 길이가 일반 사가에 비하여 최소 1.5배 이상 되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랑채가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사랑채가 후면에 위치한다. 사가에서 사랑채는 바깥주인의 생활 공간 역할만 하지 않는다. 안채가 상징적인 중심 역할을 한다면 사랑채는 집을 보호하고 안위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사가에서 사랑채는 출입자를 감시함으로써 외부인으로부터 안채를 보호한다. 용흥궁에서는 그러한 기능이 없다. 사랑채는 유유자적하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배치는 당연히 살 집이 아닌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용흥궁에서 아쉬운 점은 집을 지은 목수는 당대 최고의 수준은 아닌 듯하다. 사랑채 누마루의 선자扇子도 귀퉁이만 선자서까래로 하였고 섬세함에 있어서도 조금은 아쉬움이 남게 한다. 지방관이 주도하여 지은 집이기에 최고의 목수를 수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해서인지 또는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장식이 배제된 소박한 모습이다. 왕실에서 지은 다른 사가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집임에는 틀림없다.田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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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살림집이 아닌 전시용 가옥, 철종 잠저潛邸 강화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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