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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철종이 살던 용흥궁(2007. 5월호 소개) 외에도 철종과 관련된 집이 한 채 더 있다. 강화읍에서 84번 지방도를 따라 전등사로 가다 보면 우측에 철종 외가(문화재 자료 제 8호)가 있다. 철종 4년(1853년)에 지은 집으로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고 한다. 용흥궁이 지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철종의 외가도 철종의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서 옮겨왔는지, 강화 토박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철종 집안이 심한 감시 속에 살았기에 염씨 집안 역시 그리 넉넉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외척으로서 걸맞은 대우를 위해 이 집도 새로 지은 것으로 본다.
철종 외가는 앞에 넓은 전답이 바라보이는 완만한 대지에 자리한다. 집 뒤는 완만한 경사지여서 배산背山한다기보다 차분하게 앉아 있기에 권위적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대문이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염씨 집안 따님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는 용흥궁과 같은 솟을대문이었다고 한다. 이전처럼 솟을대문이 있었다면 집의 모습이 고즈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에

집의 구조와 배치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 누마루가 보이고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붙어 있다. 문에서 바라보이는 4칸 사랑채에 연이어 1칸 부엌이 붙어 있고, 그 좌측에 4칸 안채가 있다. 즉 부엌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나뉜다. 사랑채와 안채는 전면 9칸의 단일 건물로, 이렇게 마당을 공유하면서 연이어 한 건물로 지은 경우를 찾아보지 못했다.

사랑채 좌측은 누마루가 전면으로 돌출돼 있고, 안채 우측의 부엌과 방들 역시 돌출돼 있어 전체적으로 ㄷ자 형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사가私家가 매우 크고 장대하게 느껴진다. 집을 길게 지은 것은 사랑채와 안채를 앞뒤로 배치할 경우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하고 주변이 넓으므로 자칫 집이 왜소해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듯하다. 명색이 왕의 외척 집이라 작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은 것 같다. 평지에서 집이 크게 보이도록 전면을 넓혀 배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구분이 없어 안채와 사랑채가 내외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염씨 집안 따님에 의하면 그 사이에는 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문도 1칸 더 안채 쪽으로 돌출돼 있었기에 지금처럼 개방적인 모습은 아니었고,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내외담에는 협문이 있어 안채와 사랑채 연결이 원활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에서의 호출은 설렁줄(처마 끝 같은 곳에 달아 놓아 사람을 부를 때 줄을 잡아당기면 소리를 내는 방울)로 했다고 한다.

대목의 자부심 엿보이는 사랑채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1칸 규모의 대청 좌우에 2칸짜리 방이 있다. 예전에는 사랑채 누마루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누마루 앞의 연못은 적절한 배치로 보인다. 사랑채 누마루는 바로 행랑채에 가려 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 이러한 조망의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연못을 배치했을 것이다.

누마루는 연등천장이다. 팔작지붕일 경우 선자扇子 서까래의 마구리가 모이는 부분을 합각으로 처리하는 구조와 얽혀 매우 복잡해진다. 그리고 선자 서까래를 정확히 짜지 못하면 흉하기에 대부분 눈썹천장을 설치해서 가리는데 이곳은 그대로 노출시켰다. 합각 부분의 목구조를 간결하게 처리하고 선자 서까래도 잘 짜놓아 모양새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선자 서까래가 매우 가지런한 것이 솜씨 좋은 목수가 지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렇다 보니 굳이 가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대목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쪽마루로 각 방을 연결해

안채는 대문 우측의 중문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중문칸은 현재 凸자 형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는 안채 마당 쪽으로 광이 1칸이 더 있었다. 건물의 배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중문의 위치가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별도의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 건넌방 즉, 사랑채와 가까운 방을 사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안채 대청의 일부 부재에는 붉은 계열의 색이 칠해져 있다. 붉은 색을 칠한 부분은 최근 수리할 때 놓친 부분이다. 이 집도 근대에 들어 전체적으로 도색을 했던 것 같다. 붉은 칠은 일제시대 이후 근대에 들어 한때 유행했던 것으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따님에 의하면 안채 대청 전면 기둥에도 원래는 분합문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은 근대에 들어 일부가 개조됐다고 한다. 집안에 우환이 계속될 때 집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신의 어머님이 집을 개조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부엌 아래쪽에 방 3칸이 나란히 있었는데 1칸을 줄였고, 기단도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는데 낮추었다고 한다. 기단을 낮추는 것은 원래 있던 기단의 돌을 누여놓아 낮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의 기단이 전반적으로 낮은 것이라고 한다.

행랑채는 지금과 같이 중간이 잘려나가지 않고 중문채와 연결돼 있어 밖에서 보면 행랑채가 가지런하게 늘어선 모습이었으며, 행랑채 하부도 사괴석四塊石(벽이나 돌담 또는 화방火防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으로 쌓아 방화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행랑채 모습이다. 대문 옆에 있는 방들도 예전에는 헛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쪽은 헛간이고 한쪽은 마구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랑채가 끝나는 부분에는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안채로 직접 들어가는 협문도 있었는데 수리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뒤쪽으로 쪽마루가 쭉 연결돼 있었는데 수리하면서 지금처럼 분절해 설치했다고 한다. 예전 쪽마루가 연결된 것은 내부의 동선을 원활하게 함일 것이다. 이렇게 쪽마루로 방들을 연결하는 예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이 집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부엌 바닥에 묻혀진 항아리다. 주인의 말로는 물을 퍼내기 위해 항아리를 묻었다고 한다. 매우 특이한 경우다. 물이 많은 곳으로 많을 때는 아궁이까지 물이 들어차 불이 꺼져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한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고자 항아리를 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물 처리다. 수맥이 지나가는 곳은 집을 짓지 않고, 물이 들어올 곳 같으면 기단을 높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러한 처리가 잘 되지 못한 것 같다. 대지가 집 앞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어 조금만 신경 쓰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田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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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강화 철종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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