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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논밭이 완만한 경사지에 정남향(자좌오간子坐午間)으로 자리한 유계화柳桂和 가옥(중요민속자료 138호)은 안채 대청의 상량문에 따르면 고종 3년(1866)에 지은 집이다. 한 단 높은 ㄷ자형 안채와 한 단 낮게 지어진 ㄷ자형 사랑채가 맞물려 口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문 쪽을 향해 자리한 사랑채가 나오는데, 가운데는 몸채에 안채 쪽으로 꺾인 좌우 1칸은 날개에 해당한다. 몸채는 대청과 아래·윗방으로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양 옆 날개 부분은 곳간과 방·함실이다. 안채 역시 넓은 대청과 안방을 드린 몸채와 날개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고전적 기법으로 지은 이 집은 현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일대에서 보기 드문 口자형 평면 구조이다. 안마당의 우물과 향나무, 뒤뜰의 향나무와 감나무 대추나무 등 전통적 조경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완만한 경사지에 멀리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앞산을 안산案山 삼아 편안하게 자리잡은 유계화 가옥은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口'자형 집이다. 충청도에는 口자 집이 5채(홍성 엄찬 고택/이삼 장군 고택 등) 정도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퇴계학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口자형 집이 발달한 경상도가 남인南人-조선 선조 때 동인東人에서 갈라진 당파.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北人에 대하여 유성룡과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파- 중심의 지역이므로, 그들이 이러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데 지역성을 띤 주변 집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집은 口자형 폐쇄 구조지만 마당도 넓고 뒷마당도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매우 밝고 시원하다. 안마당은 4칸×4칸 규모로 널찍하고 사랑채가 대지의 경사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아 햇볕이 잘 들므로 막혔다는 느낌이 안 든다. 집 전체의 경사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사랑채의 기단은 안마당에서 보면 매우 낮으며 안채 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기 전까지 집에 높이 차이가 나는지 못 느낄 만큼, 그 처리가 자연스럽다.


중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에서 안채로

현재 이 집의 대문은 남쪽으로 나 있다. 집 주인은 원래 대문은 서쪽에 있었는데 60년 전쯤 남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집터 서쪽 중문 앞에 일부 남은 내외담이 바깥으로 둘러쳐진 담까지 연장된 흔적에서 그 말이 사실인 듯하다.

대문 앞 커다란 은행나무는 지금 담 밖에 있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도면에는 집 안에 있던 것으로 나온다. 원래 사랑채 앞에 집의 상징으로 심었을 것이다.
사랑채는 전면 6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전툇집이다. 현재 동쪽 맨 끝 칸에서부터 광, 부엌, 사랑방 2칸, 대청 1칸, 방 1칸 규모로 사랑방으로 꾸민 4칸 앞에 툇마루를 놓았다. 이러한 모습은 문화재 지정 당시와 차이가 난다.

사랑채에서 특이한 부분은 아궁이를 설치한 칸이다. 그 앞쪽 툇간에 고루高樓를 설치했는데, 그 높이가 낮아 머리를 구부려야만 들어간다. 그러나 반 칸 안으로 들어가면 다락을 드리지 않아 일반 부엌처럼 작업하는 데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또한 사용자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이곳에서 중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안채로 들어가도록 문을 냈다.


수맥보다 실용성을 강조해 집 안에 판 우물

안채에 보기 드물게 우물을 팠다. 수맥이 집터 아래를 통과하면 좋지 않다는 관념으로 대개 집 안에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 한편으로 집의 관리가 하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주인이 가사를 전담했다면 설사 수맥에 문제가 있더라도 우물을 팠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은 듯하다.

현재 우물 옆에 기둥을 하나 설치하고, 그 기둥에서 건물의 상인방까지 가로지른 나무를 도리 삼아 지붕을 설치했다. 예전에는 우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설치했다고 한다. 우물 위에는 도르래를 설치했다.

안채의 몸채는 전후툇집으로 툇간 쪽에 모두 기둥을 세운 2고주高柱 오량집〔五梁家〕 구조이다. 지금은 전면 툇간만 남고 후면 툇간은 흔적만 보인다. 집은 홑집, 전툇집, 전후툇집으로 발전한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건물을 보다 다양하게 사용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전후툇집도 초기에는 전퇴와 후퇴의 모습이 명확했지만 점점 방으로 사용하다 보니 후대로 오면서 특히 뒤쪽 툇간은 평면상 흔적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습은 이 집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뒤쪽에는 쪽마루를 설치했는데 과거 도면에는 없던 것이다.


부엌 살강에 문과 창을 낸 까닭은

안채로 드나드는 출입문은 중문中門과 반대편 샛문 2곳이다. 이렇게 양쪽에 문을 둔 경우는 흔치 않다. 안채는 중문 건너 쪽으로 안방과 부엌을 드렸는데 부엌은 3칸 반 규모로 매우 큰 편이다. 부엌에 설치한 살강(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처마 밑에 살강을 설치한 집을 자주 접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살강에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과 창을 설치했다. 또한 살강은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처마 밑까지 올리는데, 이 집은 부엌 상부에 드린 다락 때문에 그 높이까지만 설치했다.

우리나라 옛집 부엌에는 환기 즉,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는 연기를 빨리 배출시키고, 여름철에 음식물이 상하지 않도록 모두 살창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 집 살강에 설치한 창은 긴 띠 형식으로, 양 끝단 각 1/8 정도만 살창이고 창문 길이 3/4 정도는 창호지를 바른 창문이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창호지를 붙인 문틀 상부에 반원형 철물을 설치했는데, 분명 창문을 여닫는 장치인 것 같다. 여러모로 살펴보았을 때 채광창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설퍼 보인다. 또한 살강이 부엌 상부의 다락 때문에 다른 곳보다 낮아 자칫 비가 들이쳐 창호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에도 창호지를 바른 점, 모든 창이 살창임에도 유독 이곳에만 창호지를 바른 점이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한편 부엌에 다락을 너무 낮게 드려 크기에 비하여 협소하게 느껴진다. 다락을 넓게 만든 것은 이 집의 살림 규모와 연관이 있다. 집주인이 보관하는 유계화 씨의 땅문서나 소작료에 관한 문서를 보면, 집 주변뿐 아니라 충청남도에까지 이 집안 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상당한 재력가 집안이었으므로 당연히 넓은 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현재에 맞추어 집을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창고는 관리하기 불편해졌다. 집주인은 이곳에서 살고자 부엌을 개조하려는데 천장이 너무 낮아 입식으로 꾸미기가 힘들다고 한다. 현재 부엌 바닥을 한 자(30㎝) 정도 파서 높이를 적절히 맞추고자 개조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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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문화재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 주인의 이름을 차용하기에 '유계화 가옥'이다. 이제까지 알던 집은 모두 남자 주인의 이름을 차용했으므로 이 집의 주인도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당시 소유주는 여성이었다. 그 배경은 유계화 씨 생전의 순탄치 않은 삶 때문이다. 집주인은 이 집을 고모뻘인 유계화 씨에게 증여 받았다고 한다. 유계화 씨가 9살 때,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된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자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유계화 씨는 당시 이화여전을 나왔을 정도로 인텔리였으나 독신으로 살았기에 자신이 계속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유계화 씨가 이 집을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田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글쓴이 최성호 님은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eongho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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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퇴계학파의 영향을 받아 口자로 지은 청원 유계화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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