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의 이항희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33호)은 안채와 사랑채·행랑채·광채·곳간채로 이루어졌다. ‘숭정崇禎 기원 후 사신유四辛酉 오월 초삼일 진시辰時 입주상량立柱上樑 건좌손간乾坐巽間’이라 적힌 안채의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철종 12년(1861)에 지은 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채를 제외한 기타 건물은 1930년대 다시 지은 것이어서 안채에 비해 격조가 떨어진다. 집 앞쪽에 ‘一’자형 행랑채와 사랑채가, 안쪽에 ‘ㄱ’자형 안채가 그리고 광채와 곳간채는 안채 양옆에 각각 자리한다.


이항희 가옥의 특징은 무엇보다 외부 공간의 구성과 조경이다. 서쪽 측면에서 사랑채와 동쪽 곁의 회나무를 바라보며 바깥마당에 이르고, 행랑채 동쪽 끝 대문으로 들어서 가운데 마당의 아담한 공간을 느끼며 일각대문(중문)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선다. 큰 공간에서 작은 공간, 다시 중간 공간 식의 구성과 전개는 율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덧붙여 사랑채 동쪽의 수령樹齡 300∼400년 된 회나무, 안마당 한쪽 화단의 모과나무와 향나무, 뒤꼍의 감나무 등은 전통 민가의 정원 기법에 따랐는데 별다른 정원 시설 이 없음에도 고졸한 느낌이 든다.

이 집의 사랑채는 서쪽 측면으로 진입하고 동쪽은 언덕으로 이어지며 앞쪽의 담이 없는 바깥마당은 매우 넓다. 행랑채 동쪽 끝 대문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경계짓는 ‘ㄱ’자형 담 아래 조그만 중정中庭과 대문과 축을 맞춘 쪽대문이 나온다.


一자로 나란히 배치한 사랑채와 행랑채

행랑채는 맞걸이 3량 8칸으로 배치는 동쪽에서부터 대문간과 헛간·작은구들광·큰구들광·외양간·잿간순이다. 건축 연대는 20세기 초지만 농가의 경영시설인 곳간채와 광채만은 20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행랑채는 맞배지붕인데 북동쪽 끝 부분만 작은 합각이다. 평면은 전면 14칸, 북쪽 날개 9칸, 대문간을 포함해서 남쪽 날개 9칸이다. 솟을대문 옆이 문간방이고 서남쪽 모퉁이는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간이며 나머지는 몇 개의 구들방과 광이다.

댓돌이 낮은 행랑채 오른쪽 사랑채는 죽담이 높아서 우람하게 보인다. 그 오른쪽은 언덕으로 이어지고, 앞은 담이 없는 넓은 바깥마당이다. 사랑채는 큰사랑방과 대청·건넌방을 배치하고 바깥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사랑채 주초는 크고 작은 자연석을 난층으로 높이 쌓고 댓돌을 놓았으며 합각 지붕에는 골기와를 얹었다.

건축 연대는 1930년대로 납도리의 장혀 밑에 소로를 끼워 헛창방을 보냈다. 3칸 전후좌우 툇집으로 사랑방과 대청·건넌방을 드리고 앞퇴와 머리퇴에 툇마루를 깔았다. 뒤쪽 모퇴에 장방長房(너비보다 길이가 길고 큰 방)을 둔 것이 특이하다.


안채-중부지방의 평범한 배치

행랑채 대문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 사이로 쪽대문이 보인다. 이렇게 바깥마당과 가운데마당·안마당으로 구분한 공간 구성과 전개가 이 집의 큰 특징이다.
안채는 중앙에 2칸 대청을 두어 구조가 활달하고 기둥 사이가 넓은 반면 높이는 낮아 안정감을 준다. 곱은자형 평면 구조로 대청 왼쪽이 안방, 아래쪽이 넓은 부엌, 오른쪽이 골방과 건넌방이다.

대청은 전후퇴를 모두 트고 가운데 앞 고주는 생략했지만 뒤 고주는 그대로 박았다. 대청은 마당 쪽으로 열려 안방 앞 툇마루를 이용해 부엌으로 드나든다. 이것은 부잣집의 전형으로 앞뒤좌우 모두 머리퇴를 뒀는데 부엌 측벽에는 아랫퇴가 없다. 머리퇴와 서쪽퇴에 툇마루를 놓고 동서 양쪽 모퇴에 작은 토광을 만들고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벽은 판장板牆으로 막았다.

안방은 윗방과 4짝 미서기로 구분하고 안마당 쪽으로 겹창을 달았다. 윗방은 대청과 4짝 분합문으로 연결하고 뒤퇴 샛벽에 세살 출입문을 냈다. 반가에서 일반적인 창호 형태이다.

건넌방은 측벽에 겹창을 내 머리퇴로 연결하고 뒤퇴에 대청에서만 통하는 골방을 드렸다. 건넌방 앞은 약간 디밀어 함실부엌을 만들고 상부에 벽장을 달았다. 앞뒤 칸을 터서 넓게 쓰는 부엌 부뚜막은 안방과 부엌 사이 빈칸에 설치하고 상부에 다락과 벽장을 드렸다.

구조는 모두 2고주 5량집인데 대청 중앙만 1고주 5량이다. 정으로 다듬은 외벌대 화강암 댓돌을 돌리고 낮은 덤벙 주초를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특이하게도 마룻보가 여느 집보다 휠씬 긴데, 이것은 지붕의 물매가 낮음을 의미한다. 대들보는 둥근꼴이고 마룻보는 모를 죽인 네모꼴이다. 이 모두 민가의 가구架構 수법으로 보인다. 지붕은 합각형으로 골기와를 얹었는데 ‘ㄱ’자형 집이기에 합각이 3개 생겼다. 합각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

이항희 집은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채 이렇게 세 공간으로 구획하여 내담을 둘러치고, 이를 밖으로 다시 크게 둘러싸서 또 하나의 외담을 만들어 구획한 점이 특이하다. 특히 정원은 사랑채의 경우 전통미를 잃지 않게 조성했다. 전체적으로 1919∼1921년 사이에 지은 이 집은 전통적 건축 기법에서 벗어나 건물의 간살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기의 대표적 지주 계층의 살림집이다.田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글쓴이 최성호 님은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eongho080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고택을 찾아서] 중부지방 반가班家의 전형 청원 이항희李恒熙 가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