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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87.4㎞ 해상에 자리한 홀로섬, '독도'. 이리저리 찢긴 채 날카로운 대립 각을 세우던 우리에게 민족혼을 일깨운 독도는, 이제 더 이상 홀로섬일 수 없다. 일본의 연이은 독도 망언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풀려면 종전의 감정적 대응이 아닌 역사 및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본지本誌 '고택을 찾아서'는 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동 일대의 투막집을 통해서 울릉도 개척민의 독도 아리랑을 살펴보았다. 여기에 소개한 집들은 1883년(고종 20년) 울릉도 개척 당시 입도入島한 주민의 재래형 주거를 간직한 형태이고, 독도는 이들의 여름철 어업 기지였다.


독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휴가철과 맞물려 울릉도로 향하는 관문인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여객터미널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10시에 동해의 푸른 물결을 가르기 시작한 쾌속선은 주전부리로 반건조 오징어 한 마리를 다 먹기도 전인 12시 30분에 갈매기가 군무를 펼치는 동도항에 닿는다.

동도항에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좁고 짧은 길가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오징어가 꾸덕꾸덕 마르고, 촌부들이 펼쳐 놓은 대소쿠리마다 울릉도 특산물인 고비 더덕 미역취 쑥부쟁이 엉겅퀴로 그득하다. 주변 식당에 들러 식사를 주문하자, 몇 가지 해산물과 함께 초간장으로 절인 명이(산마늘) 장아찌가 나온다. 명이는 울릉도 전역에서 자생하는 나물로, 먹을 것이 없던 울릉도 개척 당시(1883년) 개척민이 이 나물로 목숨을 연명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면 울릉도 개척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공도정책空島政策은 일본의 억지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 등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청동기 또는 철기시대로 추정한다. 울릉도와 독도는 512년(신라 지증왕 13)에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돼 우리 고유의 영토로 존재해 왔다. 하슬라주何瑟羅州(현재 강릉지역)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던 해상 세력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면서부터다.

일본은 왜 독도 망언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1417년 조선 태종의 수토搜討 정책을 공도空島 정책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수토 정책이란 당시 국법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비우게 하고 주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순찰한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 이후 울릉도와 독도엔 여진 해적과 왜구가 자주 출몰해 약탈을 일삼아 사람이 살기 어려워지자 태종은 울릉도와 독도에 군대 파견을 검토했다. 그러나 주민 대부분이 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라 그것이 여의치 않자 내린 결론이 수토 정책이다. 이를 두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자 조선이 300여 년 울릉도와 독도를 포기하는 공도 정책을 펼쳤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공도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고문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조선은 수토 정책을 쓰면서도 1614년(광해군 6년)에 대마도주에게 울릉도에 왜구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書啓(조선시대에 임금의 명령을 받은 벼슬아치가 일을 마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만들던 문서)를 보냈고, 1693년(숙종 19년)에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왜구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왜 사이에 외교 분쟁이 발생하자 이듬해 삼척 첨절제사(조선시대 각 진영에 둔 종삼품 무관 벼슬) 장한상으로 하여금 울릉도를 수토케 한다. 1696년(숙종 22년)에는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백기주佰耆州 태수와 담판을 벌여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왜구의 출어, 벌채 금지 서계 조선에 전달) 받는다.

조선 고종은 1881년에 종래 수토 정책 대신 울릉도 개척령을 발표하고 1883년 7월부터 강원 경상 전라 충청 도민을 이주시킨다. 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를 보면 당시 울릉도 체류민은 조선인 140명(출신별로 전라도 115명, 강원도 10명, 경상도 10명, 경기도 1명)과 일본인 78명이고, 직업별로 배를 만드는 조선造船이 129명, 약초를 캐는 채약採藥이 9명, 나무를 베는 예죽刈竹이 2명이라고 나온다. 한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울릉도 독도의 종합적 연구》에는 당시 4척의 배에 백미 60석, 솥 2정, 종자용 벼 10석, 콩 5석, 조 2석, 팥 1석, 기타 20여 종의 물자와 설읍설촌設邑設村을 위해 작업할 목수와 대장장이들과 방어용 총검 등의 무기를 실어 보냈다고 나온다.

이후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칙령 41호'를 발표하고 울도(울릉도) 군수의 관할 범위를 울릉도와 죽도 석도(독도)로 규정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하는 1905년 시네마현 고시보다 5년이 앞선 것이다.

그러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강화하고자 고선 고종 때 입도시킨 울릉도 개척민의 집은 어떤 형태였을까. 최성호 겸임교수(전주대학교 건축학과)는 집의 형태와 구조는 자연과 사회 문화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울릉도 민가는 동해안 지역에서 보이는 북방계 모습을 띤다고 설명한다.

북방계 모습을 띤 울릉도 민가

조선 고종 때 울릉도 개척령에 따라 입도한 개척민의 집은 태백산맥 동쪽의 것을 기본형으로 삼았다. 따라서 울릉도의 너와집과 투막집을 이해하려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집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강원도 동해안은 오래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음에도 집 구조는 북방계 모습을 간직했다. 신라 진흥왕 이후 지배층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정착민들의 대부분은 북방계였기 때문이다. 동해안에 남은 상류층 집 및 강릉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7호) 등과 같은 관아건물도 함경도 집과 같은 겹집 구조임을 보면 지배층도 점차 지역 건축 문화에 동화됐음을 알 수 있다.

구조적 특징은 대부분 'ㄱ'자형으로 돌출 부분은 외양간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외양간은 부엌과 직접 면해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도 집 안에서 소를 관리하기 편하고 맹수로부터도 보호할 수 있다. 태백산맥 산 중 집의 자재는 대부분 목재다. 지붕은 굴참나무껍질(굴피집)이나 참나무를 쪼개 만든 나무기와(너와집)로 덮고 벽체의 많은 부분에 널빤지를 댔다. 이러한 주거 문화 속에 살던 사람들이 울릉도에 입도하다 보니 투막집이 동해안의 집 구조를 닮은 것이다.

나리분지의 투막집과 우데기

개척민들은 집 지을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우선 원초적인 집을 짓고 살았는데 바로 통나무 귀틀집이다. 그렇다고 집 짓는 수준이 낮아 통나무집만 지은 것은 아니다. 통나무 귀틀집을 선호한 것은 울릉도에 내리는 눈 때문이다. 평균 적설량 100㎝, 최대 적설량은 200㎝인데다 나리분지 지역은 300㎝까지 쌓이기에 눈의 하중을 견디는 귀틀집을 선호한 것이다. 이러한 집을 '투막집'이라고 한다.

또한 많은 적설량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집구조를 만들었다. 바로 처마 끝에 설치한 벽체인 '우데기'다. 눈이 안쪽까지 쌓일 경우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기에 처마 밑 공간을 확보하고자 처마 끝에 벽을 다시 설치해 눈이 들이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우데기와 지붕 재료는 울릉도 내에서도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했다.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에선 우데기를 볏집으로, 그렇지 않은 곳에선 빈지나 바자 등으로 설치했다. 바자는 시누대와 비슷한 식물로 만들고 빈지는 널빤지로 만든다. 지붕 역시 지역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했다. 벼농사가 가능한 곳에선 볏짚을, 그렇지 않은 곳에선 너와를 얹었다.

현재 울릉도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집은 세 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집은 두 채다. 나리동 너와집 및 투막집(중요민속자료 제256호)은 문화재 지정번호가 같다. 나리 분지 초입의 너와집은 울릉도 초기 개척 당시 가옥 형태를 잘 간직했다는데 현재의 집은 1940년대에 지은 것이다.

집은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정지(부엌)를 중심으로 우측으로 온돌방 3칸, 좌측으로 마구간 1칸을 일렬로 배치했다. 벽체는 얕게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자연석을 놓은 후 통나무를 엇갈려 쌓고 그 사이에 진흙을 발라 메웠다. 처마 끝단에 설치한 우데기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막았다. 방으로 출입은 우데기로 둘러쳐진 통로에서만 가능하고 방끼리는 연결하지 않았는데, 벽체가 통나무라 방과 방 사이에 문을 설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붕은 우진각 형태로 나무 너와를 얹었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았다. 강원도 너와집은 긴장대로 너와가 바람에 날리거나 흘러내리지 않도록 눌러주는데 이곳에선 그렇지 않다. 본채 앞쪽엔 人자 형태로 볏짚을 엮어 만든 변소가 있다.

1945년에 지은 투막집은 나리분지 너와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집은 몸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헛간, 우측에 변소와 돼지우리를 배치한 'ㄱ'자형 구조다. 평면은 좌측부터 정지·큰방·머릿방·사랑방순으로 배치했는데, 사랑방은 후대에 달아낸 것이다.田


글·사진 윤홍로 기자 도움말 최성호

도움을 주신 최성호 님은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eongho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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