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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쳬담촌'은 풍수상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쌍용교구雙龍巧構 형국에 속한다.

마을 이름은 농촌 전통 테마 마을을 계획하면서 남사가 지닌 고가古家 및 유교 · 유림 등의 지명도에다 표면적으로 옛담마을고 내면적으로 예절을 담는다는 뜻을 합한 것이다. 풍수와 어우러진 자연 경관과 함께 전통 가옥들은 선인들의 발자취를, 좁고 긴 돌담길(고샅)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남부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인 남사리 서주 이씨 고택(경남 문화재 자료 118호)은 고샅에'X'자로 몸을 포갠 회화나무 안쪽에 자리한다. 건물 배치는 안채에서 바라보면 전면에 사랑채가, 좌측에 곳간채가, 우측에 아래체가 'ㅁ'자형을 이룬다. 안채는 앞뒤에 툇간(退間)을 둔 들보 5량의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ㅡ'자형이고 건넌방 툇마루는 대청보다 약간 높여서 그 밑에 아궁이를 만들었다. 사당은 대개 안채 부엌 반대 방향에 위치하는데, 이 고택의 사당은 곳간채 뒤에다 안채와 같은 방향으로 배치했다.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앉힌 사랑채는 안채와 마찬가지로 앞뒤에 툇간을 둔 들보 오량 팔작지붕이다. 방 사이에 1칸 대청을 부고 물품을 편리하게 보관하도록 뒤 툇간을 넓게 잡음으로써 겹집 형태를 띤다.





영남지방에서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된 마을로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이하 남사)을 꼽는다. 남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여 리를 흘러와 멈추어 선 수려한 니구산尼丘山이 만든 반달 모양의 터를 사수천(남사천)이 휘감아 도는 천혜의 경승지에 자리한다. 마을은 쌍용교구 즉, 앞 당산이 수컷 용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컷 용의 머리로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문 형국이다. 탁월한 풍수지리 때문인지 선비가 많이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 가문과 고장을 학문으로 빛냈다. 공자가 탄생한 니구산과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사수강 그리고 사양정사·니사재·이동서당 등의 서재 이름은 선비의 마을임을 알게 한다.

산청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 진양 하씨가 남사에 먼저 정착했다고 하나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에 단종 복위 사건으로 처형당한 성삼문의 이모부인 이숙순이 위협을 느끼고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성주 이씨가 자리잡는다. 이숙순은 조선 개국공신 이자 태조 이성계의 부마인 이 제의 손자다. 병자호란때는 박승희와 박승필이 외가인 이곳으로 피난하면서 밀양 박씨가 자리잡는다. 이 외에 전주 최씨, 연일 정씨, 재령 이씨 이렇게 주로 6성이 살았지만 현재는 30성에 가까운 150여 가구가 산다.



전통 마을의 공간을 구분한 고살

토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남사의 고샅은 근대문화재다. 묵은 토담과 돌담은 사수천 강돌로 건물 외곽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경남 서부지방 양반 마을의 전통적 공간 구조와 형식을 보여준다.

반가班家인 이씨 고가와 최씨 고가 그리고 사양정사와 이사재엔 토담을, 민가엔 돌담을 쌓아 담의 구조와 재료·형식으로 신분을 구분한 점이 눈에 띈다. 상류층 건물의 토담은 하부에 길이 50∼60㎝인 막돌을 2, 3층으로 쌓은(메쌓기) 후, 그 위에 반죽한 황토를 펴고 막돌을 일정 간격으로 얹고 사이에 반죽한 황토 채우기(찰쌓기)를 반복하며 쌓았다. 담 상부엔 우수雨水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한식 기와나 일식 평기와를 얹었다.

태조 이성계의 부마인 경무공 이 제와 그의 부인인 경순공주를 모신 사당에서 이씨 고택으로 돌아들면 이끼 낀 돌담 중간에 300여 년 수령의 회화나무 두 그루가'X'자로 몸을 포개고 막아선다. 자연과 돌담이 빚어낸 절묘한 조화에 탄성을 내지를 정도다. 이 회화나무는 머리를 맑게 하고 정신 집중력을 높이는 선비나무로 예부터 서재나 제실에 많이 심었다.



세울 쌓인 고살 너무에서 하늘 천 따지

남사의 상징인 X자형 하회나무 고샅으로 들어서면, 마을에서 가장 오랜 1700년대 건물인 성주 이씨 고택이 나온다. 안채(18세기)와 사랑채(1910)의 건립 연대가 200년 정도 차이가 나므로 구조와 조형적으로 한옥의 변천 과정을 관찰하게끔 하는 전통 민가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아래채·곳간채가'口'자형을 이룬다.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배치고, 사당은 곳간채 뒤쪽이지만 안채 왼쪽 전면이라 시각적으로 막힌 독특한 배치다. 사대부가에선 대개 권위를 나타내고자 대문을 크고 높게 만드는데, 이 집은 이웃한 필지 때문인지 집터 서남쪽에 자리잡은 대문이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중문보다 작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와 외양간채가 마주한 사랑마당이다. 이 마당 북쪽으로 전면 4칸에 측면 2칸 반 규모인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한다. 기단의 정면과 측면은 화강석 장대석이고 배면은 자연석이다. 가구는 민도리 5량 홑처마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에 눈썹기와를 얹었다. 벽체는 황토벽으로 1996년 산자(지붕 서까래 위나 고물 위에 흙을 받치기 위해 엮어 까는 나뭇개비) 이상 부분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형을 살리고자 회벽을 바르지 않았다고 한다.

외양간채는 전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로 외양간과 광·뒷간으로 이루어졌다. 뒷간은 마을 내 최씨 고택처럼 2층이라 일을 보려면 계단을 올라가야만 하는데, 특이하게도 변기 2개가 나란히 한다. 2층 뒷간은 조선시대《임원경제지》에서 인분을 위생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자 권장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2층에서 일을 보면 인분이 1층의 흙이 담긴 상자에 담겨지고 그 위에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면서 발효를 촉진시키는 방식이다.

사랑채 동쪽엔 전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인 중문 간채가 자리하는데 중문과 광이 있고 출입문은 안마당 쪽으로 터 놓았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5량 구조 팔작지붕의 안채는 전면 7칸에 측면 2칸 반으로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동남향이다. 건넌방 1칸, 대청 2칸, 안방 2칸을 두고 방과 대청 전면에 1칸 폭의 툇마루를 두고 뒷면엔 작은 벽장을 달았다.

대청 뒷벽으로 개방된 툇마루를 단 것이 특이하다.

건넌방 툇마루는 대청보다 20㎝ 정도 올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아래채는 전면 4칸에 측면 1칸 반 크기로 동향이며, 남쪽에 부엌과 방·대청 등을 배치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뽑았다. 서향한 광채는 전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안쪽은 칸을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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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이씨 입향조 이숙순의 후손인 이상택 씨가 얼마 전까지 이 집에 거주했으나 최근에 그는 약초에 조예가 깊은 노창운 씨에게 관리를 맡겼다. 노씨는 현재 이씨 고택을 일반에게 약초와 양반 문화를 테마로 한 전통 체험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 글 · 사진 윤홍로 기자 도움말 문화재청, 남사예담촌 이씨 고가 노창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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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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